책소개
“여성들은 할 수 있는 저항을 계속했다”
미치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여자들
천지신명에게 외면받고도 살아남은 존재들의 이야기
“우리가 괴력난신을 읽고 쓰는 이유가 다름 아닌 해방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_조예은(소설가)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용기는 남았다” _이수현(소설가, 번역가)
첫 장편소설 《한성부, 달 밝은 밤에》의 드라마화를 확정 짓고, 장편소설과 에세이, 다양한 앤솔러지 소설집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소설가 김이삭이 첫 소설집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래빗홀, 2024)를 출간한다. 데이트폭력 가해자를 피하여 고택에 머물던 여성의 기이한 체험담 〈성주단지〉, 학교의 금기를 어긴 여성 청소년들이 겪는 학교 괴담 〈야자 중 ×× 금지〉, 옹녀의 시점에서 다시 쓴 ‘변강쇠전’ 〈낭인전〉,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여성혐오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오컬트물 〈풀각시〉, 조선 후기 박해받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에서 벌이지는 괴이한 이야기 〈교우촌〉까지 호러 장르의 미학과 문학적 완결성을 모두 갖춘 단편소설 다섯 편이 묶였다.
수록작에는 각각 귀신과 괴물, 논리적이지 않은 힘으로 대표되는 ‘괴력난신’이 등장하고, 작품 속 인물들은 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연대와 위로를 청한다. 비정상으로 낙인찍혀 주변으로 밀려난 인물들에게 괴력난신은 낯설고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비슷하여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이삭의 소설이 으스스한 호러적 재미와 함께 통쾌한 해방감을 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24년 여름, 서늘하고도 다정한 김이삭의 세계를 만나볼 시간이다.
목차
성주단지
야자 중 ×× 금지
낭인전
풀각시
교우촌
해설 │ 변두리에서, 안과 바깥을 이으며 이수현
작가의 말
추천의 말
저자
김이삭 (지은이)
출판사리뷰
“여자가 벽을 부순 순간, 괴담의 규칙은 깨진다”
괴담 밖으로 전진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추방된 이들을 위한 호러 김이삭 첫 소설집
무서운 괴물을 피해서 도망만 치던 여자 주인공이 어느 순간 도끼를 들고 괴물을 공격하잖아요.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히면 두려움이 다른 감정이 되거든요. 분노가 되는 거죠.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더는 걔가 무섭지 않았어요. _〈성주단지〉
한국 호러문학장의 주목받는 신인 김이삭이 첫 소설집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를 펴낸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다섯 편의 수록작은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각 주인공은 여성을 향한 폭력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 고통받다가 기이한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다만 이들은 남성의 도움을 구하는 공포영화의 여성 주인공들과 거리가 멀며, 끔찍하게 훼손된 신체로 남지도 않는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신들을 피해자 혹은 괴기스러운 타자로 규정하는 이들에게 반격하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간다.
맨 앞에 놓인 단편 〈성주단지〉는 교제 폭력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다만, 그가 피해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극대화해 재미를 찾는 대신, 주인공이 옛 기담에서 용기를 얻어 가해자에게 맞서겠다고 결심하는 데에서 호러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낭인전〉의 ‘옹녀’는 여러 번 상부(喪夫)했다는 이유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나지만, 원작인 《변강쇠가》에서처럼 끔찍한 최후가 아닌, 새로운 목적지로 나아간다. 〈풀각시〉의 주인공은 자신을 괴롭히던 양반가 아들에게 살을 날린다. 여성이자 아이라는 이중의 마이너리티를 가진 〈야자 중 ×× 금지〉와 〈교우촌〉의 주인공들은 세계의 이면을 알게 되지만 낙오된 자들을 저버리고 자신의 생존에 안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쫓겨난 사람을 인지하고, 그 사람이 규칙을 부수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김이삭은 이렇게 호러 장르의 클리셰 속에서, 여성·소수자 주인공들로 하여금 어떤 결단을 내리게 하여 괴담의 법칙을 깨뜨리고, 새로운 서사의 물꼬를 튼다. 장르적 재미와 미학을 모두 갖춘 김이삭의 작품 세계는 이렇게 여성·소수자 서사와 호러의 공존 가능성을 탐색한다.
“저 안 미쳤다니까요?”
통쾌하게 터져 나오는 괴력난신의 말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우리는 위태로운 현실로 돌아온 찜찜함이 아니라, 제자리를 찾은 듯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_이수현(소설가, 번역가)
〈성주단지〉는 “선생님도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시죠?”(p. 9)라는 화자의 항변으로 시작된다. 화자는 고택에서 한 기이한 체험을 ‘선생님’으로 지칭되는 청자에게 이야기한다. 이때 이 ‘선생님’은 의사 혹은 상담사이자 남성으로 추정되며, 화자의 체험담을 좀처럼 귀담아 듣지 않는다. 〈낭인전〉의 주인공 옹녀도 비슷한 상황이다. 여섯 남편을 잃고 동네 밖으로 쫓겨난 옹녀는 이미 천지신명이 외면한 존재다. 이때 옹녀의 사연을 묻고 그녀를 돕는 것은 마찬가지로 세계 밖을 떠도는 비정상의 존재, 늑대인간 강쇠다. 〈야자 중 ×× 금지〉의 아영, 정원, 예원 역시 세계 바깥의 존재인 소녀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외부의 시선을 피해 삶을 터전을 마련한 〈풀각시〉의 서율과 〈교우촌〉의 아가다를 돕는 이 역시 세계에서 밀려난 비정상의 존재다.
이처럼 김이삭의 작품 속 인물들은 처음부터 발언권을 박탈당했거나, 말을 늘어놓을지언정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논리 정연한 세계에 닿지 못한다. 한마디로, 천지신명은 이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들은 천지신명 대신 괴력난신에게 말을 건다. 귀신, 괴물 등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괴이한 힘을 지닌”(‘작가의 말’, p. 293) 괴력난신은 세계에서 밀려난 존재들이 의지할 수 있는 ‘비정상’의 신이다. 이 소설을 추천한 조예은 소설가는 “우리가 괴력난신을 읽고 쓰는 이유가 다름 아닌 해방감에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소외된 목소리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 괴력난신의 통해 이들이 힘을 얻을 때, 우리는 이때껏 몰랐던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로 만든 전복적 기담들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호러 확대경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의 또 한 가지 매력은 가장 한국적인 소재의 재발견일 것이다. 한국의 민속 신앙과 세시 풍속을 소재로 삼은 〈성주단지〉와 〈풀각시〉는 물론이요, 판소리 ‘변강쇠가’를 SF호러물로 다시 쓴 〈낭인전〉,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누구나 하나쯤 들어본 학교 괴담을 소재로 하는 〈야자 중 ×× 금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교우촌〉이 모두 그렇다. 김이삭은 이렇듯 한국의 과거와 현재, 역사적 사실와 구전되는 민담을 넘나들며 풍부한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흥미진진한 서사를 구현한다. 유려한 묘사로 그려지는 고택의 풍경(〈풀각시〉)이나, 괴담과 학칙이 공존하는 학교의 모습(〈야자 중 ×× 금지〉)은 그 자체로 장르적 재미를 더하는 이 소설집의 묘미다. 더욱 눈여겨볼 점은 김이삭이 단지 한국적인 소재만을 차용하여 한국의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작품 분위기를 조성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소재와 호러의 적확한 연결점을 찾아낸다는 점이다.
〈낭인전〉과 〈풀각시〉는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여성 혐오의 역사를 들춰내는 동시에, 강인한 여성 인물이 이러한 악습을 돌파해가는 모습을 통해 기존 호러 서사의 문법을 뒤집는다. 〈야자 중 ×× 금지〉는 학교와 괴담이 어째서 어울리는 조합으로 평가받는지, 학교가 청소년들을 어떻게 길들여왔는지를 정확히 짚어내는 동시에, 북한 이주민 2세대 청소년의 눈에 비친 학교의 모습을 그려낸다. 〈교우촌〉은 조선 시대의 천주교 교인들의 삶을 호러라는 장르로 조명하며 고통받던 민중의 삶을 조명한다. 〈성주단지〉는 데이트 폭력 피해 여성을 통해 한국의 민속 신앙의 가치를 재발견한다. 이렇게 호러문학장의 새로운 얼굴 김이삭은 한국 사회의 맹점들을 정확히 건드리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