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 서울대학교 김호동 명예교수, 「타임스」 강력 추천 *
대륙을 방랑하며 우리의 세계를 만든 유목민들의 1만2,000년 역사
그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물을 옮기고 동서양을 교류하게 만들었다
기록물과 건축물을 중심으로 한 역사에서 유목민은 야만인, 미개한 종족으로 그려진다. 주류 세계사에서 유목민의 위치는 침략하는 자, 살생하고 파괴하는 무리일 뿐이다. 『노마드』는 이러한 기록 중심의 역사가 인류 문명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유목민을 배제하는 “반쪽짜리 역사”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아 간접적으로만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유목민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신화와 서사시, 유목민이 남긴 유적과 방랑하는 삶에 맞는 유전자까지, 유목민에 대한 최신의 연구는 유목민들이 어떻게 자연에 순응하며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만들어왔는지 보여준다. 또한 이 책은 기존의 정착민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유목민 제국의 역사를 톺아봄으로써, 유목민들이 견지해온 민주주의, 종교의 자유 등의 가치가 서로 다른 문명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고 르네상스가 꽃피는 데 일조했음을 드러낸다. 독자들은 유목민을 중심으로 한 이 책을 통해서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절반의 인류사를 들여다보는 한편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방식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목차
이란, 자그로스 산맥에서
제1부 균형 잡기
제2부 제국 세우기
제3부 회복하기
감사의 말
저작권자에 대한 감사의 말
삽화 참조 목록
주
참고 문헌
역자 후기
인명 색인
저자
앤서니 새틴 (지은이), 이순호 (옮긴이)
출판사리뷰
우리는 모두 한때 수렵채집인이었다
신화와 역사를 오가는 유목민들의 이야기
유목민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와 역사 곳곳에서 등장한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가 한때는 수렵채집인이었으며, 차차 정착을 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성경은 풍요롭고 여유로운 수렵채집인의 삶을 에덴동산의 이야기로, 신석기혁명으로 인한 유목민과 정착민 사이의 갈등을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기록하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성벽 안에 사는 왕 길가메시가 성벽 바깥의 자유로운 삶을 상징하는 인물 엔키두를 애도함으로써 유목민의 삶의 방식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아쉬워한다. 오시리스와 그의 동생 세트에 관련된 이집트 신화에서도 정착을 이끄는 지도자(오시리스)와 그것을 질투하여 그를 살해하는 유목민(세트)의 서사가 반복된다.
한편 1만2,000년 전의 유적인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에 관한 최신의 연구는 유목민들이 대규모의 조직력을 가진 존재였음을 상상하게 한다. 무게 16톤에 높이 5.5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유적지의 주변에는 집터나 지붕, 화덕과 같은 일상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유목민들이 이곳에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룩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괴베클리 테페는 최초의 축조 예술을 창조할 만큼 발전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제식 행위를 해왔음을 방증한다.
유목민이 향유한 삶의 방식은 우리의 유전자에도 깊이 남아 있다. 정착 생활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는 한 장소에 진득이 앉아 있지 못하고 관심사가 빠르게 변하는 성질을 “산만함”으로 치부하고 교정하려 든다. 그러나 유전학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성정은 “유목민 유전자” DRD4-7R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일 가능성이 있다. 현대적인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DRD4-7R 보유자들은 어쩌면 유목하는 환경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칭기즈 칸의 몽골부터 아틸라의 훈족, 티무르의 티무르 제국까지
민주주의의 가치와 동서양의 교류를 이끈 유목민 제국들의 역사
정착민들의 수가 늘고 삶의 형태가 복잡해진 후에도 유목민들은 광활한 대초원 지대를 가로지르며 자신들만의 문명을 이룩해냈다. 훈족, 아랍인, 몽골인, 중국 원나라의 여러 민족들을 비롯한 다수의 유목민들은 중국 만리장성으로부터 헝가리까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들의 왕성한 활동은 대륙 양끝의 문물이 움직일 수 있도록 했고,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유목민들은 지도자를 뽑을 때에도 모든 후보자들을 모아 적법한 절차를 거치는 등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했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 종교의 자유 또한 인정했다. 유럽 다수의 군주들 역시 유목민들의 지도자에게 사절을 보내 그들과 교류하고 때로는 그들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다른 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정착하지 않은 채로 자신들만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이슬람의 역사가로서 유목민족의 흥망성쇠를 연구한 이븐 할둔은 유목민들의 아사비야(assabiyya)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유대, 연대의식, 단결심, 결속 등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에게 유목민들의 힘을 집결시키고, 유목민들이 가족과 부족을 넘어 강력한 연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한다. 아사비야를 통해 집결한 유목민들은 스스로의 제국을 창건하고 문명을 이룩한다. 중요한 것은 아사비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생각하며 자유롭게 옮겨 다니고, 자연의 순환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븐 할둔은 유목민 국가인 아바스 왕조의 흥망성쇠를 돌아보면서, 정착의 삶에 익숙해지는 때부터 아사비야가 약해지고 안락한 삶에 젖는다고 지적한다. 즉 유목민들이 자신들의 특성인 자유로움, 방랑이 그들 제국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지배를 지향한 서구의 지식인들,
삶의 터전을 잃고 역사에서 밀려나는 유목민들
흑사병 이후 유럽의 항해선들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유목민들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유럽인들이 지중해를 건너 모험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졌고, 자연에 순응하는 유목민들의 삶이 부정당하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자 영어 사전에서 유목민을 가리키는 nomad가 사라졌으며,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데 유목민이 미친 영향도 역사 기록에서 축소되었다. 자연의 이치에 맞춰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연합하며 살아온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인구가 확연하게 줄어든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연에 따르는 삶, 방랑하며 사는 삶을 잃어가고 있음을 자각한 사람들이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세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수 근처에서 자급자족하면서 동시대인들에게 자연에서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후 영국 외교관 해럴드 니컬슨과 그의 아내이자 작가인 비타 색빌-웨스트는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으로 떠나 유목민들의 삶을 체험했고, 그 내용을 영화 「초원」으로 개봉했다. 유목민의 삶이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치는 사람들의 의식에는 도시에서의 삶이 인생의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유목주의와 멀어지면서 대두된 도시에서의 삶은 노동 시간의 증가와 누구든 비슷한 삶의 방식, 자연과의 괴리 등을 특징으로 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들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 자연에 순응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유목민의 삶의 방식을 되찾을 것을 촉구한다.
디지털 환경이 구축되면서 오늘날에는 새로운 “유목민”들이 등장했다. 한곳에 매이기보다는 다양한 곳으로 가볍게 이동하며 삶을 꾸리는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또한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섭리에 맞게 사는 삶도 재조명받고 있다. 이 책은 신화와 전설, 역사를 오가며 오랫동안 그러한 삶의 방식을 지켜온 유목민들에 집중한다. 자연에 맞서지 않고 그 흐름을 따르며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유목민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커다란 울림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