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필요한 것은 사랑의 말이라고 믿고 싶어”
슬픔과 아픔, 그리고 미움에 잠겨 있다가도
끝내는 사랑의 말을 발견하며 깨어나는 다정한 목소리
윤슬처럼 반짝이는 언어로 시인만의 내밀하고 감각적인 세계를 가꾸어온 이소연 시인의 세번째 시집 『콜리플라워』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기도 한 시인은 “모서리가 많은 삶의 어두운 구석”(주민현, 추천사)을 찬찬히 살피며, 어둠을 깊이 응시한 이만이 발견할 수 있는 다채롭고 입체적인 사랑을 노래한다. 전작들에서부터 이어져온 여성과 생태, 그리고 언어를 향한 시인의 깊은 애정이 다시금 변주되며 찬란한 선율을 이룬다. 삶의 보이지 않는 이면과 끊임없는 존재의 마찰로부터 굳건한 사랑을 길어 올리는 시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목차
제1부 · 수건은 시간을 옮긴다
우리 집 수건
사슴뿔 자르기
콜리플라워
관람
집 옮기기
모른 척하기
버렸다, 불 질러 버렸다
코번트리 부인
휴 그랜트의 아내 코번트리 부인이 퓰리처상을 받았다
저 꽃은 저물 무렵
연필선인장 키우기
보석감정사
애덤
돌려세우기
제2부 · 후회는 인간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
기부
블루베리를 씻어 요구르트에 섞어 먹는 아침
사람 없는 그림을 보다가
나는 걷는다
밤에 먹는 사과
코번트리 부인이 앙코르와트에서 가져오지 못한 것들 1
죽도록, 중랑천
충실한 슬픔
경춘선 숲길
듣는 동안
앨리스의 상자
침묵도 입술을 연다
머그컵
제3부 · 새로운 이끼
내 안에 누가 있다
경건한 그림자
변명
해몽
음력의 가계
양서류적인 코번트리 부인
완벽한 이야기 1
완벽한 이야기 2
도깨비시장 그리기
오목놀이
푸른빛의 말
창 속의 내가 나를 보는 오후
제4부 · 맺히는 것들이 모두 비상구로 보여
거울의 방
숲의 마감
옮겨 앉을 준비
코번트리 부인이 앙코르와트에서 가져오지 못한 것들 2
혼자
코번트리 부인의 튤립 한송이
작게, 굽은 등을 하고
새들의 안부를 묻는 아무
서진이의 하굣길
집
보풀
해설|김태선
시인의 말
저자
이소연 (지은이)
출판사리뷰
“생물이 자라 사랑하고
쓰고 남을 아름다운 힘을 찾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시선에 담아낸 애정 어린 순간들
이소연의 시는 “보아야 할 것은 꼭”(「코번트리 부인」) 보는 데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에도 구애받거나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선이다. 이를테면 시인은 미술관에 가서도 “미술관 바깥의 매미와 잠자리”(「관람」)를 비롯한 외부의 풍경에 신경을 쏟으며 “그림보다 미술관에 같이 간 친구가/보고 싶어요”(「코번트리 부인」)라고 말한다. 이렇듯 자유로운 응시는 삶의 “이면에 보이지 않게 머물러 있는 것들에 시선을 던지면서 들끓는 침묵의 목소리에”(김태선, 해설) 귀를 기울이는 원동력으로써 구체적인 일상이 시적인 순간으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한다. “사실 그림은 색으로 덮은 것이 아니라/색에서 빠져나온 여백”(「관람」)이라는 관념의 반전도, “구멍 난 양말과/친구의 뒤꿈치 각질을 신기해하는 얼굴”(「보풀」)을 마음에 새기는 다정함도 모두 여기서 파생된다.
자유로운 시선이 선사하는 것은 일상을 시적 순간으로 전환하는 활기뿐만이 아니다. “사랑과 미움이, 밝음과 어둠이,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어떻게 한 몸인지 알게”(추천사)하는 이소연의 특장점 역시도 여기서 비롯된다. 시인은 풍경과 사물에 맺히는 표면적인 아름다움에만 시선을 두지 않는다. 사랑의 충만함과 행복 이면에 가려진 고독과 불행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는 “밤을 새우지 않아도 어둠이 잘”(「보석감정사」) 보이는 사람, “밤의 몸이 출렁출렁 쏟아질 것”(「옮겨 앉을 준비」) 같은 순간 속에 잠겨 빛을 헤아리는 사람, 그리고 “불행을 추적하고 탐구(「내 안에 누가 있다」)”하며 깊이 응시하는 사람이다.
“죽도록 미워하려고
중랑천 끝까지 걸어가는 동안
죽도록 사랑하고픈 마음이 생기고 난리다”
그래서 이소연이 말하는 사랑은 유독 빛난다. “당신이 나를 비난”하는 와중에 “다정은 어떻게 생겼나”(「죽도록, 중랑천」)를 고민하는 양면성이, “슬픔에 잠겨서도 계속 사랑을 했다”(「충실한 슬픔」)는 충실함이 우리들 삶에 흐르는 복잡다단한 애정의 본모습과 깊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전히 그대로인 세상”(「양서류적인 코번트리 부인」)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고통에도 다시 한번 주목한다. 그는 가부장적 질서가 만든 규범은 “남자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해내면서 살고 있”는 “세상의 여자들”(「코번트리 부인」)에겐 무의미하며, “여자가 금기하는 세상은 없었”(「충실한 슬픔」)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더 나아가 삶의 질서를 다시 배열함으로써 사회적 규범에 따라 “나뉜 대로 나뉘어 살아가는 인간”(「코번트리 부인이 앙코르와트에서 가져오지 못한 것들 2」)의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해나간다.
삶은 존재들이 모서리로 마찰을 일으키는 일이다. “당신과 통한다고 생각”하다가도, 돌연 “통로 끝엔 자물쇠로 잠긴 철문이 있”(「사슴뿔 자르기」)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상처 입지 않기 위해/서로의 가장 빛나는 뿔을 잘라”(「사슴뿔 자르기」)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저마다 다르고, “무지개는 빛과 물방울을 빌려 뜬 몸”(「애덤」)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존재는 ‘다른 하나’의 존재와 만남으로써 아름답게 떠오르는 순간을 맞기 때문이다.
시인은 “나는 알게 되었다 마침내/내 안에 누가 있다”(「내 안에 누가 있다」)는 말로 끝끝내 사랑을 말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고백한다. 시인은 “맨발로 서서 백년을 보낼 수 있다”(「앨리스의 상자」)는 끈질긴 기다림 끝에 “모조리 잃었다 싶을 때 다시 얻듯이”(「집」) 찾아오는 사랑을 잘 알고 있다. 어둠속에서 불행과 슬픔을 오래도록 탐구해 온 시인이 발견하고 발명한 것이 매번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이소연에게 시는 곧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삶”(시인의 말)이다.
시인의 말
밤마다 친구들을 사랑하다 잠든다.
시인의 말을 고민하는데, 자기 이름을 쓰라고 하는 친구가 있었다.
누구의 이름을 쓰더라도 시인의 말이 되게 살고 싶다.
나를 가족을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삶
그런 게 시인가 한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심장이 뛰고 있다.
오늘은 가장 낮은 하늘을 쥐었다가 놓았다.
그늘 속으로, 산 것만 좋아하는 박새가 들어간다
2024년 5월
이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