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위대한 철학자들이 초대하는 다채로운 욕망의 향연
욕망의 본질은 무엇일까? 욕망과 욕구는 어떻게 다를까? 어떤 욕망이 좋은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흉내 내지 않고 가장 자기다운 욕망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끝없는 불만을 떨쳐내고 욕망을 온전히 표현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이 책은 철학적 관점에서 욕망의 개념을 조명한다. 플라톤, 스토아학파,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욕망의 정의를 통해 ‘결핍, 통제, 힘’이라는 세 갈래의 사상을 살펴본다. 그리고 오늘날 내적 자유를 위해 ‘다르게 욕망하기’에 나선 다양한 흐름도 소개하면서 불안과 무기력, 우울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욕망의 진정한 힘을 일깨운다. 아울러 뇌과학과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 등 다방면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욕망의 면면을 파헤친다.
또한 모방욕망 이론과 사회적 인정욕구에 빠진 엄지세대를 비롯해 욕망에 관한 주요 이슈들을 소개하면서, 이를 통해 헛된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와 기쁨을 얻으며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내면의 기쁨과 성장, 영혼의 풍요로움을 키우는 철학의 지혜를 전한다. 이 책은 고독과 우울의 시대를 헤쳐 나가도록 돕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지혜와 통찰을 음미하는 실천적 지혜의 향연장이다.
목차
머리말
1부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
1. 플라톤과 결핍으로서의 욕망
2. 욕망이라는 이름의 뇌
3. 욕망의 모방
4. 질투
5. 소비주의와 욕망의 조작
6. 위험에 빠진 엄지세대
7. 성적 욕망
2부 욕망의 통제
1.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 : 절제의 지혜
2. 스토아 철학과 불교 :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기
3. 종교법
4. 행복한 절제를 향하여
3부 빛나는 삶을 위한 다르게 욕망하기
1. 스피노자와 힘으로서의 욕망
2. 니체와 ‘위대한 욕망’
3. 생의 약동을 높이고 완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기
4. 욕망으로서의 사랑이 지닌 세 가지 차원
5. 욕망의 신비
6. 과감히 욕망하기 그리고 삶의 방향 전환
결론
미주
저자
프레데리크 르누아르 (지은이), 전광철 (옮긴이)
출판사리뷰
이 책은 욕망에 대한 철학의 계보라 할 수 있다. 시대와 동서양을 망라한 위대한 철학자들의 욕망에 대한 철학적 관점을 살피면서 ‘결핍과 통제, 그리고 힘’이라는 세 갈래의 사상을 소개한다. 욕망을 결핍의 관점에서 바라본 플라톤, 인간이 누려야 할 쾌락의 원동력이지만 절제가 필요하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거나 억눌러야 한다는 통제의 관점에 선 불교와 스토아 철학, 욕망을 인간의 본질이자 생의 약동을 높이고 완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힘으로 본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융 등 욕망에 대한 다채로운 지혜와 통찰의 향연으로 초대한다.
이와 함께 르네 지라르의 모방욕망 이론, SNS에서 사회적 인정 욕구에 빠진 엄지세대의 위험, 프로이트와 생물학과 심리학의 만남,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와 욕망 조작, 포르노 공식과 섹스 능력의 숭배에 따른 성적 욕망의 고갈, 사랑의 세 가지 차원(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등 욕망에 관한 주요 이슈를 소개한다. 이렇듯 이 책은 시대의 흐름과 주요 주제를 씨줄과 날줄로 엮는 구성을 통해 욕망의 면면을 파헤치고 있다. 이를 통해 헛된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와 기쁨을 얻으며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내면의 기쁨과 성장, 영혼의 풍요로움을 키우는 철학의 지혜를 전한다. 이 책은 고독과 우울의 시대를 헤쳐 나가도록 돕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지혜와 통찰을 음미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의 향연장이라 할 수 있다.
욕망은 불행의 씨앗인가, 행복의 원천인가?
욕망은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우리의 성장에 꼭 필요한 힘이긴 하지만, 지향하는 사람이나 대상에 따라 슬픔이나 기쁨, 행복이나 불행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행동하도록 이끌고 온전히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존재의 원동력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파괴적이거나 헛된 열정, 끝없는 불만, 시기와 욕심에서 비롯한 증오나 좌절, 심지어는 내면의 자유를 앗아가는 갖가지 중독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래서 욕망에 웃고 욕망에 우는 모습이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욕망을 결핍, 욕구불만, 위험하거나 퇴폐적인 쾌락과 연결하는 경향이 크다.
조지 버나드 쇼는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절실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얻는 것이다.” 유머러스하지만 깊은 통찰에서 나온 이 말은 끝임 없이 불만족에 시달리는 인간의 욕망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욕망의 특성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우리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진자처럼 흔들린다.”는 훨씬 더 비극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 고통받고, 그것을 얻자마자 싫증이 나서 또다시 욕망하며 고통받는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 욕망의 비극
고통의 원인은 이것만이 아니다.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이 바로 무한히 욕망한다는 점이다. 동물의 경우 기본적인 욕구와 안전이 충족되면 더 이상을 찾지 않는다. 지배욕이 있더라도 일단 자신의 영역에서 지배하는 위치에 선 유인원은 사바나 전체를 정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마을을 지배하고 나면 옆 마을도 지배하고 싶어 하고 그다음에는 전체 국가와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 어쩌면 우주까지 그 욕망이 뻗어갈지도 모른다. 이러한 특징은 물질, 사회적 지위, 지식과 정보 등 모든 것에 적용된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결핍에 대해 플라톤은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가 갖지 못한 것, 우리가 아닌 것, 우리에게 부족한 것, 그것이 바로 욕망과 사랑의 대상이다.” 이러한 정의를 통해, 인간이 육체화됨으로써 신성함의 근원에서 분리되었고 향수에 젖은 영혼은 신성과 다시 연결되기를 끊임없이 원한다는 플라톤 철학의 중심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신성과 다시 연결되지 못하는 한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을 대신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물질이나 대상을 무한히 갈망하게 된다는 결핍으로서의 욕망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뇌과학의 발견 - 도파민에 휘둘리는 인간의 욕망
플라톤의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뇌를 연구하는 신경과학의 놀라운 발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즉, 선조체라는 인간의 원초적 뇌 부위가 음식, 섹스, 사회적 인정, 정보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욕망을 충족시킬 때마다 선조체는 쾌감을 일으키는 분자인 도파민을 방출하며 보상회로를 작동한다. 그런데 문제는 선조체가 한계를 모른다는 데 있다. 항상 더 많은 쾌락을 좇도록 부추기며 절대로 “이제 그만!”이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이미 100여 년 전에 철학자 베르그송은 “쾌락은 생명체의 생존을 위해 자연이 고안해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수단이란 바로 도파민이다.
이러한 선조체의 역할과 보상회로에 대해 신경과학 연구자 세바스티앙 볼레는 《인간 버그》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뇌는 욕구가 충족되더라도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 이러한 프로그래밍 패턴은 극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양을 늘려야만 쾌락 회로를 자극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는 만족을 모르는 원초적 동기를 충족하기 위해 대뇌피질의 힘을 이용한다. 대뇌피질이 제안하고 선조체가 처리한다는 원리로 볼 수 있다. 사실상 원초적 뇌 부위인 선조체가 대뇌피질을 지배하며 부추기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은 “항상 더 많이” 욕망하는 인간 뇌의 타고난 경향을 보여준다.
해결책은 욕망의 제한과 억제일까?
현대의 기술과 경제적 자유주의는 대뇌피질의 힘으로 구축되었다. 그런데 이 기술과 경제적 자유주의의 동맹은 많은 사람들이 뇌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의 부추김에 반응하도록 이끌었다.
자원이 한정된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히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무모한 돌진은 생태적 견지에서 재앙일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개인들에게는 끝없는 불만의 원천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날 극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한 우리는 이 영구적인 소비주의와 원시적 두뇌의 기능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욕망에 의식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대 철학자들과 전 세계의 많은 종교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욕망은 제한되고 억제되지 않으면 위험하다. 온갖 종류의 전쟁과 폭력으로 이어질 것이다.”고 가르쳤고 성경에서는 “이웃의 것은 무엇이든 탐내지 말라”고 명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욕망과 연결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했고, 스토아 철학에서는 욕망을 억제하고 자각된 의지로 대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렇듯 모든 고대의 지혜가 욕망을 줄이거나 제한하라고 촉구했음을 알 수 있다. 항상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특성상 자칫 불행과 사회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욕망의 제한과 억제가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기에 제한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스피노자의 견해에 더 큰 무게를 실어준다. 욕망이란 예컨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힘과 의미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성과 성찰을 통해 욕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스피노자, 기쁨을 키우는 힘으로서의 욕망
스피노자의 사상은 존재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려는 노력인 ‘코나투스’에 기초한다. 그는 존재의 원동력이자 우리가 생존하도록 이끌고 존재의 힘을 키우는 코나투스를 ‘욕구’라고 규정하고 나아가 “욕망은 자기의식을 지닌 욕구”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욕망은 우리가 더욱 더 살아있음을 느끼고, 행동하는 힘을 키우고, 기쁨 속에서 성장하기 위해 길러야 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쁨을 “덜 완전한 것에서 더 완전한 것으로의 이행”으로, 반대로 슬픔을 “더 완전한 것에서 덜 완전한 것으로의 이행”으로 정의한다. 기쁨과 슬픔은 우리 생명력의 증가 또는 감소에 따라오는 두 가지 기본 감정인 것이다. 존재하고 행동하는 힘이 줄어들 때마다 우리는 슬픔을 느끼고, 그 힘이 늘어날 때마다 기쁨을 느낀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영원한 기쁨에 도달할 때까지 기쁨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러한 기쁨에 도달한 상태를 “완전한 행복”이라 불렀다.
스피노자는 불교와 스토아 철학과는 달리 의지나 이성만으로는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심한 악습이나 중독을 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신의 기능만으로는 감정의 힘을 이겨낼 수 없고 감각과 기분부터 시작하여 우리 존재 전체를 사로잡는 욕망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감정은 저지하려는 감정보다 더 강한 감정에 의해서만 저지되거나 억제될 수 있다”는 중요한 진리를 확인한다. 따라서 중독이나 증오, 슬픔, 공포를 이성으로 억누르기보다는 사랑이나 기쁨과 같은 강렬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욕망이 ‘솟아오르도록’ 하면서 이성과 의지를 통해 그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안과 우울의 시대, 욕망의 방향 전환이 절실하다
사람들은 지난 3년간의 팬데믹으로 지치고, 기후변화와 우크라이나 전쟁, 구매력 감소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다. 또 많은 이들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모든 제도를 불신하는 가운데 도덕적, 심리적으로 상처받으며 위축감을 느끼고 있다. 그 결과 철학자 베르그송이 “생의 약동”이라 불렀던 것이 약해지고 직업과 사랑, 성, 지성 등 삶의 모든 영역에 욕망의 힘이 줄어들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은 활력과 삶의 즐거움이 사그라들고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이 찾아오는 불안과 우울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생의 약동과 욕망의 고갈은 또한 가장 물질적인 욕망이 고조되는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삶의 위기 때문에 겪는 우울함을 보상하고자 자신에게 작은 쾌락을 주기 위해 소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주의는 강박적 구매, 섹스와 게임과 소셜 네트워크 중독, 사회적 인정에 대한 욕구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소비주의에 빠지면 우리의 깊은 욕망과 큰 기쁨은 사소한 욕구와 헛된 쾌락으로 변질된다. 그러면 욕구와 쾌락의 노예가 되어 우리의 가장 깊은 갈증을 채우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주의와 사회적 인정이 아닌 다른 가치를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소유보다는 존재, 성과보다는 삶의 질에 더 초점을 맞추며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검소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저자는 이렇듯 자기만의 욕망을 깨닫고 자신을 성장시키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고유한 본성에 따라 자신을 최대한 펼쳐나갈 수 있는 대상으로 욕망을 향하게 해야 하며 그럴 때에만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칼 융의 “개성화 과정”을 비롯해 생의 약동을 높이고 완전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에 대해 살펴보는 것으로 책의 마지막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 책의 구성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1부에서는 철학적 · 생물학적 · 인류학적 · 사회학적 차원에서 결핍으로서의 욕망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을 검토한다. 특히 인간의 원초적 뇌 부위인 선조체가 어떻게 우리를 무한히 욕망하도록 밀어붙이는지, 광고와 소셜 네트워크가 우리를 더 많이 욕망하고 소비하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이러한 충동을 활용하는지 살펴본다. 또 르네 지라르와 함께 타인이 원하는 것을 욕망하게 만드는 모방욕망의 힘을 살펴보고, 불행과 폭력으로 이어지는 탐욕과 질투의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나아가 프로이트와 생물학의 도움을 받아 성적 욕망의 복잡성에 대해서도 파헤친다.
2부에서는 인간이 욕망의 함정과 환상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철학적, 종교적 흐름이 외적 규범(종교법), 이성과 절제(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 의지나 초연함(스토아주의와 불교)을 통해 욕망을 규제하려고 노력해온 방식을 살펴본다. 또 성적 금욕, 단식, 나눔, 간소한 생활방식 추구 등 욕망을 조절하는 현대의 방식을 검토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욕망을 힘으로 보는 스피노자의 견해를 살펴본 후에 우리 존재를 깊고 지속적인 즐거움으로 이끄는 긍정적인 감정에 기초하여 욕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다. 또 니체, 융, 베르그송과 함께 우리의 욕망하는 힘을 키우고 특히 창의성을 통해 ‘생의 약동’을 불어넣는 방법을 알아본다. 덧붙여 사랑의 욕망, 즉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의 세 가지 차원을 고려하면서 애욕이 불러오는 애정 결핍의 마음을 극복하고, 진실함과 기쁨으로 충만한 사랑에 이르는 길을 탐색한다. 그리고 욕망과 선물로서의 사랑을 요체로서 전하려 했던 예수와 같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의 메시지를 되짚어보며, 많은 현대인들이 자신의 욕망을 바꾸고 삶을 변화시키도록 이끄는 이치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러한 이치에 따를 때 우리는 우리 자신, 다른 존재, 그리고 지구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마다가스카르, 불교와 서양의 만남, 50 · 20 · 1,000만 - 눈길을 끄는 저자 이력
저자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마다가스카르 태생의 프랑스인인 그는 어릴 때부터 고대 철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철학서들을 접했고 급기야는 ‘불교와 서양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의 한 유명 출판사 편집자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다 서른 살에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전업 작가의 길이라는 모험을 감행한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의심에 흔들리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침내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현재까지 5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고 20개 언어로 출판했으며 세계적으로 1,000만 부가 넘는 책으로 독자와 만날 수 있었다. 시장조사 전문기관 GjK가 선정하는, 5년간(2011~2015) “행복과 영성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에 관한 책을 가장 많이 판매한 작가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주목할 만한 행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극작가, 다큐멘터리 방송작가, 만화스토리 작가로도 활약하며 작품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또한 어린이와 함께하는 철학 워크숍을 운영하는 SEVE 재단, 국경 없는 환경협회(Environnement sans frontiees)를 공동 설립했으며, 동물을 위한 동행협회(Association Ensemble pour les Animaux)도 설립했다.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