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상

잔상

13,320 14,800
제조사
아작
원산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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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름이 있긴 있어요. 사실은 여러 개죠.
하지만 모두 몸말이에요. 저는?… 분홍이에요.
입말로 옮기면 아마 분홍일 거예요.”

경제적 불안과 대공황이 계속되고 세상 곳곳에는 각종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실업자가 된 나는 이 기회에 여행을 떠났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공동체를 경험했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머물던 공동체를 벗어나 걷다 새로운 공동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켈러’라고 불리는 이 공동체는 앞을 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시청각장애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모두가 시청각장애를 가졌는데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소통을 해온 걸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오고 있었던 걸까? 이곳에서 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

존 발리 (지은이), 최세진 (옮긴이)

출판사리뷰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받은 내 소설들은 모두 제목이 P로 시작했다

이 소설은 중요한 SF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가장 중요한 SF 문학상이란 매년 세계 SF 컨벤션에서 시상하고 컨벤션 회원(독자)이 투표로 결정하는 ‘휴고상’과 미국과학소설작가협회(전문가)가 수여하는 ‘네뷸러상’을 말한다. 이 소설은 네뷸러상을 수상했다.

인간이 노력을 기울인 많은 분야에서 상을 주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상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조지 C. 스콧이나 말론 블란도 수준으로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상을 받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들이 옳았다. 험프리 보가트는 역할이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지적했다. 어떤 역할은 어렵고, 어떤 역할은 쉽다. 어떤 역할은 연기를 전혀 요구하지 않는데,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실제로 ‘연기’를 못하므로 그건 괜찮다. 친구들이 친구들에게 투표한다. 사람들은 표를 얻기 위한 캠페인에 돈을 쓴다.

험프리 보가트는 모든 배우를 같은 작품에서 연기를 하게 해서 심사위원단이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볼 때는 말이 되는 소리다.

내가 ‘P 요소’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있는데,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받은 내 소설들은 모두 제목이 P로 시작했다.

물론 아무 의미도 없다. 하지만 내가 휴고상을 받기 직전까지 갔던 다른 작품의 이름이 〈캔자스의 유령(The Phantom of Kansas)〉이었다는 사실을 덧붙이면, 정말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피하기 힘들다. 〈캔자스의 유령〉은 그해 휴고상 최종 후보에 딱 두 작품이 올랐기 때문에 수상에 실패했다고 들었다. (물론, 그해 휴고상을 받은 그 단편은 꽤 좋았다. 실은, 매우 훌륭했다. 그 작품은 다름이 아니라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 맨(The Bicentennial Man)〉이었다.)

내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토머스 M. 디쉬가 어떤 사설에(어느 잡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노동절 그룹’이라고 이름 붙인 사람들에 대해 썼다.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음모 집단이 아니라, 70년대에 SF 작가로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본다 N. 매킨타이어가 그 그룹에 들어 있었고, 스파이더 로빈슨과 나, 그리고 다른 작가 대여섯 명도 있었다. 토머스는 우리가 항상 휴고상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또 우리가 휴고상의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알랑거린다고 비난했는데, 휴고상 투표권자들은 SF 독자 중 다소 적은 비율로서, 특정 연도에 세계 SF 컨벤션에 참가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휴고상에 투표할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다. 세계 SF 컨벤션은 매년 다른 도시에서 개최되며, 현재는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하는 행사로 성장했다. 이 행사는 미국의 노동절 주말에 열린다. 따라서 토머스가 이름 붙인 ‘노동절 그룹’이라는 용어에는, 우리가 조직적인 팬덤 출신이며 절대로 컨벤션을 빠지지 않기 때문에 노동절에 모두 모일 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가 노동절에 열리는 컨벤션에서 휴고상 투표권자들이 SF에 원하는 것들에 관한 정보를 교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체가 지나치게 도전적이지 않고, 우울하기보다는 고양시키며, 실존적 불안보다는 삶에 대한 긍정적 전망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뭐, 그런다는 이야기였다.

첫째, 그 사설이 나왔을 당시 나는 세계 SF 컨벤션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따져봐도 딱 두 번 가봤다.

둘째, 휴고상을 받으려고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은 저급한 취향으로 여겨지고, 내가 아는 어떤 작가도 작년에 시카고에서 봤던 것 같은, 그리고 지금 콜드 마운틴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공중파를 광고로 채울 예산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휴고상 투표권자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좋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이건 인정하겠다. 나는 소설을 하나 마치면, 연단에 서서 은으로 만들어진 로켓 우주선 트로피를 받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작품을 쓰기 전이나 쓰는 동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전혀 없다.

미안하다. 그냥 털어놔야겠다. 내가 앞서 말했듯이, 상이라는 건 따지고 보면 의미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 상이 필요하겠는가?

이제 나는 다음 장편소설 집필 작업으로 돌아가야 한다. 최근에 발간한 《붉은 천둥(Red Thunder)》의 속편이 될 것이다. 나는 존 D. 맥도널드가 《트래비스 맥기(Travis McGee)》 시리즈에서 그랬듯이 제목에 색깔을 넣을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여러 생각이 떠올라서 결정을 못 하고 있다. 자주색 천둥(Purple Thunder)이 나을까, 분홍색 천둥(Pink Thunder)이 나을까?

암갈색(Puce), 암자색(Petunia), 주황색(Poppy), 민트색(Peppermint), 밝은 보라빛을 띤 청색(Periwinkle)….

나는 시각장애인을 몇 사람 안다. 그 첫 번째 사람은 엘머인데, 조부모님 댁이 있던 텍사스주 코시카너의 우체국에서 신문과 사탕, 담배 판매대를 운영했었다. 시내에 살 때, 매일 할아버지와 나는 우체국까지 몇 블록 걸어가 우편물을 받아왔는데, 우리는 항상 멈춰서 엘머와 이야기를 나눴다. 엘머는 내가 얼마나 자랐는지 보기 위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곤 했다. 대개는 “많이 자랐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마침내 198센티미터로 정점을 찍었다. 나는 여러 차례 그곳에 앉아 만화와 SF 잡지를 읽으며 즐거운 오후를 보냈다. 내 평생 훔쳐본 거라곤 SF밖에 없지만, 엘머가 파는 것은 절대로 훔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SF 중독자일지라도 그렇게 저급한 짓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잡지를 훔쳐 청바지에 집어넣을 때 엘머가 듣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정도로 훌륭했다.

코시카너는 내가 어렸을 때 멕시코만 연안의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였다. 여름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고, 우리 가족은 한 달에 적어도 한 번, 보통은 두 번씩 주말에 차를 타고 편도로 4시간 걸리는 거리를 갔었다. 텍사스주에서 그 정도의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코시카너는 어린 소년에게는 천국이었다. 완전히 녹슨 쇠와 까칠까칠한 나무로 만든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우며 특이한 놀이기구가 10여 개 있는 공원이 있었다. 아이를 싫어하는 미친 기술자가 설계한 게 틀림없었다. 개인 상해 전문 변호사라면 그 놀이기구들을 보자마자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렸을 것이다. 어떤 놀이기구를 타더라도 손가락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잘려나갈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기구들에서 노는 게 재미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갔을 때는 모두 사라지고, 대신 부드럽고 해가 없는 플라스틱 놀이기구로 바뀐 상태였다. 랠프 네이더가 코시카너에 와서… 망쳐놨다. 단언컨대, 지금의 세대에는 겁쟁이들만 잔뜩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코시카너에서 단연코 가장 좋았던 것은 내 할아버지의 가게였다. 그 가게는 ‘듀크 앤 에어즈(Duke & Ayres)’라는 체인점으로 저렴한 물건만 판매하는 잡화점이었다. 텍사스 출신이 아니라면 그 체인점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울워스(Woolworth)’와 비슷한데, 다만 더 작고 더 저렴했다. 할아버지 가게는 높은 양철 천장이 있고 길고 좁았으며, 나무로 된 판매대들 사이의 통로가 두 개뿐이었다. 여성 판매원이 계산대 뒤에 서서 고객을 기다렸다.

천장에는 당시 최신 조명이었던 형광등이 줄지어 달려 있었는데, 하나씩 따로따로 켜야 했다. 할아버지가 나를 목말 태우고 한 통로로 갔다가 다음 통로로 가면, 내가 형광등 줄을 하나씩 당겨서 켰다. 형광등은 5분 동안 깜빡거리다 불이 들어왔다. 내가 충분히 자란 후에는 매일 아침 7시에 통로를 달려가며 펄쩍 뛰어 줄을 당겼다. 여름에는 천장에 달린 선풍기도 켰다.

가게의 위층은 사용하지 않았는데, 스티븐 킹 소설의 배경으로 어울릴 만한 장소였다. 방들이 논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한때는 전문직들이 사용하던 사무실이었다. 아마 1920년대 석유 호황 당시 사무실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 당시 코시카너는 지금보다 훨씬 더 컸다. 2층은 창고로 쓰였는데, 싸구려 잡화점의 창고에서는 온갖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뭐든지 다 있었다. 침을 뱉는 개수대에 아직도 피가 말라붙어 있는 낡은 치과 의자도 있었다. 오래된 잡지와 신문, 금속으로 만든 연하장 전시대, 엽서 더미, 유리와 유리 절단용 작업대, 세기가 바뀔 무렵의 낡은 옷가지, 그리고 엄청난 거미줄이 쌓여 있었다. 물건들에서는 거미와 쥐똥, 쉰내, 곰팡이, 흰곰팡이, 그리고 썩어서 말라붙은 냄새가 났다. 벵골 호랑이만 한 먼짓덩어리들이 있었다. 2층 창고에는 조명이 없었지만, 우리는 손전등을 가지고 올라가는 건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 그 창고는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창고에는 마네킹이 있었다. 일부는 몸집이 크고, 대머리이며, 발가벗었다(물론 성별도 없었다. 당시는 마네킹의 가슴에 젖꼭지도 달리지 않았다). 몇 개는 옷이 입혀져 있었다. 내가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 있는 모든 마네킹이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거기에는 몸뚱이 부위들이 있었다. 절단된 팔과 다리, 머리, 몸통이 넘쳐흐르는 상자들. 그것들을 조립하거나 격렬하게 분해하기도 했다. 그렇게 놀다 보면 고급 장난감 가게인 ‘파오 슈와츠’나 유치원에서 해주는 동화 시간 같은 건 금세 잊어버렸다. 그 다락방은 이야기를 찾아내는 곳이었고, 나와 내 친구들은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깜짝 놀랄 이야기들을 찾아냈다.

할아버지는 가게에 있는 거의 모든 상품을 그 동네에서 가장 싼 가격에 팔았다. 할아버지의 손님은 대부분 흑인이었는데, 그들은 말 그대로 빈민가에 살았다. 그래서 나는 당시 또래의 전형적인 텍사스 백인 소년들에 비해 흑인들을 많이 알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매년 그 지역의 울워스나 뉴베리 체인점보다 훨씬 많이 팔았다. 그리고 검안사인 융거만 박사보다 안경을 많이 팔았다. 사탕 판매대에는 커다란 유리 상자 안에 이를 썩게 할 50가지의 사탕이 쌓여 있었다. 나는 원하는 건 뭐든지 먹어볼 수 있었으며, 나중에는 할아버지를 도와서 페니 가격에 사탕을 퍼주기도 했다. 기다란 장난감 판매대도 있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장난감 판매대 뒤쪽 바닥에서 보냈다. 여성 판매원들이 나를 넘어 다니는 동안, 나는 각 상품이 진정으로 놀 만한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는, 중요하고 결정적이며 까다로운 제품 검사 작업을 수행했다. 성가신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했다. 나는 품질 관리도 담당했다. 운송 중에 뭔가 고장이 날 경우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기록하고 제조업자에게 알리면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후 동생이나 나에게 그 물건들을 줬다. 고장이 났나요? 큰일이네요. 곧 우리가 열심히 가지고 놀면 어차피 엉망이 될 텐데, 처음에 살짝 깨진 걸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크리스마스 아침에 할아버지 가게에는 댈러스 니만 백화점의 전시품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망가진 물건이 많았다.

시각장애인 엘머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 모든 이야기가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과 아무 상관도 상관없지만, 코시카너를 언급하지 않고는 이 책을 넘길 수 없었다.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토머스 M. 디쉬가 ‘노동절 그룹’이 음모 같은 것으로 휴고상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이 소설 〈잔상〉을 그 사례로 든 것 같다. 그랬다면, 성공했다. 그랬다면, 계속 그렇게 하라. 나는 그 전이나 후에 쓴 어떤 이야기보다 이 작품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전에 다른 몇몇 작가들이 말했듯이, 이 작품을 온전히 내가 만들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출처는 정확히 밝힐 수 있다. 어머니들이 임신 중 풍진에 걸리는 바람에 시청각장애인으로 성장한 한 세대의 아이들에 관한 신문 기사였다. 마치 베이비붐처럼 시청각장애인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그들의 특별한 요구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들 대부분이 신체장애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 거라 믿는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적응력에는 거의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곤란한 처지가 이 소설에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거의 저절로 써졌다. 그리고 집필을 마쳤을 때 울음이 나왔지만, 그 이유는 모른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 눈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도, 매일 밤 다시 울고 싶었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썼던 어떤 작품보다 직접적으로, 혹은 편지로 가장 많은 반응을 받은 작품이다. 사람들의 반응 중에는 “그 이야기가 내 삶을 변화시켰어요”라는 것도 있었다. 그런 반응 덕분에 얼마나 기뻤는지는 이루 표현하기 힘들다. 이 소설은 장애인을 위한 주차 공간과 화장실 특별칸이 생기기 전 장애인 인권 운동이 성장하던 시기에 썼다. 이 단편을 써줘서 감사하다고 내게 말씀해주신 분들 중 많은 분이 장애인이었다. 이 소설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여러분에게도 감동을 주길 바란다.

상품필수 정보

도서명
잔상
저자/출판사
존 발리 (지은이), 최세진 (옮긴이),아작
크기/전자책용량
121*196*20mm
쪽수
152쪽
제품 구성
상품상세참조
출간일
2024-06-10
목차 또는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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