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해방적 대항 정치를 만들어 가야 할 근본적 이유를 찾는다”
이 책은 젊은 정치철학자 한상원 교수(충북대)가 지난 2018년 이후 쓴 정치철학적 주제들의 논문 모음집이다. 각 글은 서로 다른 주제와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각 글 사이에 일정한 역할 분담과 주제 배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실린 모든 글은 서로 다른 주제들과 방향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 강조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과잉’이 낳은 귀결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결여’가 낳은 귀결이라는 지적이다.
목차
│책머리에│ 8
서문: 민주주의의 위기, 주체의 위기 11
제I부 인민의 이름으로: 포퓰리즘의 시대
제1장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로서 인민주권 19
제2장 포퓰리즘, 데모스, 급진 민주주의: 라클라우와 무페의 ‘인민’ 담론 구성에 관하여 59
제3장 포퓰리즘의 이중성과 민주주의의 민주화 101
제II부 인권의 정치와 시민권의 정치: 퇴행에 저항하기
제1장 반지성주의와 위기의 민주주의: 탈진실 정치와 민주적 집단지성 139
제2장 혐오 발언 규제 논쟁과 인권의 정치 169
제3장 인간과 시민의 ‘이데올로기적’ 권리선언?: 맑스,아렌트,발리바르 209
제III부 다시 만나는 세계시민주의
제1장 맑스의 국제주의와 환대의 정치-윤리 251
제2장 세계시민주의의 자기반성: 부정변증법적 비판을 통한 고찰 285
제3장 국민국가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 발리바르의 세계정치와 관국민적 시민권 319
│발표지면│ 359
저자
한상원 (지은이)
출판사리뷰
많은 학자들이 지금의 시기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정의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도 그러한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출발한다. 그러나 이 위기의 대안으로 민주주의를 ‘확장’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에서 민주적 요소를 ‘축소’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다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위기에 대한 진단 속에서 그 처방으로 탈정치적 민주주의를 제시하는 경향들이 존재하며 심지어 주류적인 의견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우익 포퓰리즘이나 권위주의 정치세력의 부흥, 반지성주의나 혐오 정서의 확산 등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절차적 합의와 전문가 결정으로 환원하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서는, 민주주의의 민주적 요소들이 계속해서 축소되어 온 것이 바로 지금의 민주주의 위기를 낳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쉽게 간과된다.
오늘날의 위기는 민주주의가 근본적인 수준에서부터 탈정치화, 탈민주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지금의 위기가 다름 아닌 정치적 주체의 공백으로 인한 위기, 즉 주체의 위기, 주체성의 위기라는 사실이다. 점차 유권자들을 소비자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대우하는 기성 정치세력의 관점 속에서는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데모스demos의 권력kratos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이 망각되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데모스 혹은 인민은 집권 세력의 시혜에 의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발명하며, 요청하고, 심지어 그것의 실현을 강제하는 집단적 힘을 행사하는 집단이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집합적 주체를 요청한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주의는 사회 제도도 아니고 국가 질서의 일부를 이루는 체제의 이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고대 아테네의 전통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는 제도화된 질서나 체제의 관념과 함께, 그러한 체제를 구성해 내고 동시에 변혁하기도 하는 주체의 참여라는 관점에서 사유 되어왔다. 민주주의 정치는 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이 집단적으로 수행되는 정치적 행위의 장에 참여함으로써, 그 사회의 주권자로 거듭나는 주체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정치를 사회적 지배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주권적 연합으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정치에 고유한 역동성은 그러한 연합이 실행되기 위한 주체화 속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오로지 유권자로서의 정체성만 남은 다수 대중은 그러한 주체가 될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현대 정치는 점차 주체를 배제하는 민주주의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 사회를 운영하는 집권 세력들은 그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떠나 시장의 사적 권력을 강화하고, 기업의 이윤 추구의 권리가 사회의 공적 이익과 다수의 관심을 넘어 전 사회를 초월하는 불가침의 영역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그 결과 불평등과 불안정으로 인해 예속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의 프레카리아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져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했다. 경제적으로 배제된 자들이 정치적인 주체가 될 권리에서도 배제되고 있다. 무한경쟁에 내몰린 원자화된 개인들의 고립된 삶은 이러한 이중적인 배제에 직면하여 무기력과 좌절에 내몰리고 있다.
이 순간, 누군가 이 배제된 자들을 주체로 호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집합적 주체성에 이름을 부여한다. 고립과 배제에 시달려야 하는 개인들은 자신들을 집단적 주체성으로 호명하는 이 힘에 폭발적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우익 포퓰리즘 운동이 미국과 유럽에서, 또 한국과 동아시아에서도 폭발적인 힘으로 표출된 이유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는 주범이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이 등장했고, 누구나 포퓰리즘을 쉽게 비난하게 되었다.
오늘날 목격되고 있는 것은 ‘포퓰리즘 비판’이라는 담론 지형이 민주주의의 탈정치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오늘날 누군가 포퓰리즘 운동의 한계를, 특히 우익 포퓰리즘 운동의 파괴적인 성격을 강하게 비판하고 싶다면, 그는 그 이전에 그러한 포퓰리즘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고, 민주주의 그 자체가 탈주체화, 탈정치화, 나아가 탈민주화되는 이 상황을 먼저 고발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민주주의를 ‘민주적’ 방식으로 확장하려는 기획의 일부로 이해한다. 앞서 소개된, 오늘날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이 민주주의의 ‘과잉’인가 민주주의의 ‘결여’인가 하는 물음은 여기서 결정적이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은 인민주권의 민주적 원리가 점차 상실되어 가는 현재의 상황에서 민주적 주체성을 사유하기 위한 시론이다.
지은이의 말
오늘날 혐오의 정치화와 그 거대한 대중적 동원력을 볼 때마다 이 현실에 좌절하다가도, 그에 맞서는 흐름이 기어이 어떻게든 터져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정치는 늘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때로 우리에게 어떠한 감동을 주는 찰나의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이 바로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지금시간Jetztzeit이다. 그러한 순간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성좌에 대한 기대는 우리로 하여금 정치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정치에 대한 권리를 민주주의의 핵심적 이해 방식이자 존재 이유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결정과 집합적 자기 통치를 위한 정치의 권리 속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해방적 대항 정치를 만들어 가야 할 근본적 이유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