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글쓰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카프카는 환상 세계의 창조자다”
새롭게 공개된 작품 100여 점 포함
사상 최초로 카프카의 그림 전작 수록!
프란츠 카프카는 글쓰기 외에 그림을 그리는 데도 진지한 열의를 보였으나 오늘날까지 그림을 그리는 카프카의 이미지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비해 크게 조명받거나 부각되지 않았다. 이는 최근까지 알려진 그의 그림이 40여 점에 불과해 그 수가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19년 오랜 소유권 분쟁 끝에 마침내 개인이 비공개로 소장하고 있던 카프카의 그림들이 모두 공개되었고, 이후 시각예술가로서 그의 정체성이 다시금 주목을 받으며 연구되고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그림들』은 바로 ‘시각예술가로서의 카프카’에 초점을 맞춰, 카프카의 그림 전체를 총망라해 선보이는 최초의 책이다. 이스라엘국립도서관이 소장중인 새롭게 공개된 그림들뿐 아니라 옥스퍼드의 보들리언도서관, 빈의 알베르티나미술관 등 각지에 흩어져 있는 카프카의 소묘화 전작을 제작된 시기와 유형에 따라 정리해 최대한 원화 크기에 맞춰 컬러로 실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편저자인 연구자 안드레아스 킬허가 카프카의 그림과 글이 맺는 미학적 연관성에 관해 쓴 글과, 카프카의 그림에서 인간의 몸이 예술적으로 어떻게 다뤄지는지를 고찰한 주디스 버틀러의 글을 통해 독자적인 작품으로서 카프카의 그림, 글쓰기와 그림의 관계 등을 깊이 있게 분석한다. 또한 책에 실린 카프카의 그림을 분류해 163번까지 번호를 매기고 해제와 함께 정리한 ‘카탈로그 레조네’를 수록하여 미술사적 가치까지 더했다.
목차
머리말: 카프카의 그림에 얽힌 역사와 법적 분쟁 7
안드레아스 킬허
그림들 27
1. 한 면 혹은 두 면짜리 낱장 그림, 1901∼1907년경 (작품 번호 1~84)
2. 스케치북 (작품 번호 85~119)
3. 여행 일기에 그린 그림, 1911∼1912년 (작품 번호 120~125)
4. 편지에 그린 그림, 1909∼1921년 (작품 번호 126~136)
5. 일기와 노트에 그린 그림, 1909∼1924년 (작품 번호 137~146)
6. 원고에 그린 문양과 장식, 1913~1922년 (작품 번호 147~163)
카프카의 그림과 글쓰기 209
안드레아스 킬허
“하지만 무슨 땅이 그렇고, 무슨 벽이 그렇단 말인가?” 273
: 카프카가 스케치한 육체적 삶
주디스 버틀러
카탈로그 레조네 287
파벨 슈미트
감사의 말 353
주 354
도판 크레디트 369
저자
안드레아스 킬허, 주디스 버틀러, 파벨 슈미트 (지은이), 민은영 (옮긴이)
출판사리뷰
카프카의 그림들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카프카의 그림 상당수가 그의 사후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갈 때까지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카프카의 친구이자 작가 막스 브로트와 브로트의 상속자 일제 에스테 호페가 얽혀 있는 오랜 분쟁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1921년 작성한 유언장에서 카프카는 자신의 글과 그림을 전부 태워달라고 브로트에게 부탁했으나, 브로트는 카프카의 모든 유고를 보존해 나치의 위협을 피해서 여행가방에 담아 이스라엘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의 생전에 이미 이 문서들을 비서이자 친구인 일제 에스테 호페에게 증여했다. 1968년 브로트가 사망한 이후 호페는 카프카 유고에 대한 소유권을 온전히 행사하여 일부 편지와 원고를 경매를 통해 판매했지만 그림만은 단호하게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 2007년 호페가 사망한 뒤 이스라엘국립도서관이 브로트/카프카 문서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10년에 걸친 법적 소송을 벌인 끝에 승소하여, 마침내 카프카의 그림들이 대중 앞에 공개된 것이다.
그렇게 겨우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그림 100여 점을 포함한 카프카의 그림들을 이 책은 크게 세 그룹으로 분류한다. 첫번째 그룹은 1901년경에서 1907년경 사이에 제작되었고 전체 작품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상당수가 스케치북에서 나온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카프카의 어떤 글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독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수효가 현저히 적은 두번째 그룹은 카프카가 여동생이나 친구에게 보낸 편지, 일기, 1909년부터 1924년 사이에 사용한 노트에 그린 그림들로 대체로 상당히 정확히 날짜를 특정할 수 있다. 1907년경까지의 그림이 글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했다면, 이 소묘화 대부분은 일기나 편지의 내용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화나 표현은 텍스트를 이미지로 조화롭게 옮기거나, 혹은 더 나아가 이미지를 텍스트에 종속시키는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는 글이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 등장해 그림과 글쓰기 사이의 긴장감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그룹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생겨난 장식적인 형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일부는 명백히 글을 쓰거나 줄을 그어 글자를 지우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글과 그림 사이의 중간 지대를 차지한다.
풍부한 인용과 도판으로 설명한
카프카 그림과 글쓰기의 관계
카프카의 그림 전체를 한 권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함께 수록된 안드레아스 킬허와 주디스 버틀러의 글, 그리고 카탈로그 레조네를 읽으면 글의 부수적 연장선상이나 글에 딸린 삽화가 아니라 독자적인 예술작품 그 자체로서 카프카의 그림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킬허의 글은 카프카의 그림과 글쓰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카프카가 미술에 관심을 갖고 예술 관련 학생 단체와 동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가장 많은 그림을 남긴 대학 시절(훗날 카프카는 이 시기를 회상하며 “이 그림들은 그 시절에 내게 그 무엇보다 큰 만족감을 주었”다고 말한다)부터 조명해 역사적-전기적 토대를 쌓아나가는데, 이때 인용된 카프카의 여러 글과 풍부하게 제시된 관련 이미지는 글쓰기와 그림 모두에 “복합 재능”을 지닌 카프카를 이해하고 그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카프카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상호 참조 관계로 구축하지 않고 오히려 갈등과 긴장 관계로 보았고, 이 사실은 그가 자신의 소설에 삽입되는 이미지에 대해 편집자에게 거듭 우려를 표했던 일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후일 『실종자』의 일부가 되는 단편 『화부』(1913)에 ‘뉴욕 항구에서’라는 설명이 붙은 권두 삽화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카프카는 삽화가 이야기를 지배할까봐 두렵다는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이 년 후 『변신』의 출간을 앞둔 카프카는 삽화 작업이 시작되기 전 미리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 부디 ‘벌레’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일만은 피해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카프카의 요청대로 탄생한 『변신』의 속표지 그림(“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어둠에 잠긴 옆방”)은 카프카가 두려워한, 텍스트를 예상하게 하거나 침해하는 효과를 내지 않는다. 대신 그저 암시 정도에 그침으로써 시각예술은 의미의 개방성과 텍스트의 우화적 모호성에 자리를 양보한다. 그리고 이로써 조화로운 ‘서화’가 아니라, 두 예술 매체의 자율성과 그 결과로 발생하는 둘의 상호적 긴장을 모두 포용하여 각각의 힘을 가시화하는 ‘서/화’가 탄생한다.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카프카의 그림세계
카프카의 그림은 몇 개의 간단한 선만으로 인체를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인물들은 많은 경우 동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으며 현실의 육체는 구현할 수 없는 도약의 움직임, 인간의 동작이라는 흔적만 지닌 채 솟구쳐오르는 움직임으로 암시된다. 나아가 그림에서 육체는 중력에 구애받지 않아 수평을 거부하고, 때로 허공에서 곡예를 부리고, 바닥 위에 둥둥 떠 있는 발로 균형을 잡고, 땅이나 벽 같은 주변 구조에 대한 의존조차 무시한다. 주디스 버틀러는 일부 비평가들이 이런 카프카의 소묘화를 파울 클레의 초기작과 비교하거나 하위 등급의 표현주의에 속한다고 평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 그림 컬렉션은 너무나 다면적이고 흥미로워서 그런 식의 요약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버틀러의 말처럼 카프카의 그림들은 어떤 정형화된 양식이나 예술 경향으로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강렬한 독창성을 발휘한다. 그야말로 카프카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시각적 언술이자 예술적 표현인 것이다. 그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그림세계가 온전하게 담긴 이 책 『프란츠 카프카의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그림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린 손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카프카의 글만큼이나 매혹적인 그 생동감에 완전히 마음을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