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채
‘왜’와 ‘어떻게’를 반반씩 다루는 켄타우로스적 사유의 결정체
소천비평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수상
현장평론가 김형중의 여섯번째 비평집
“공평을 기하자면 켄타우로스적 비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반쯤은 ‘어떻게’를 다룰 줄 아는 형식주의적 비평가이고 또 반쯤은 ‘왜’를 다룰 줄 아는 사회학적 비평가 말이다. 주의하라. 꼭 반반이다. 합리적인 타협의 여지는 없다.” ─프랑코 모레티, 『근대의 서사시』, 새물결, 2001.
문학평론가 김형중의 여섯번째 비평집 『시절과 형식』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연구서를 펴낼 때마다 첫 비평집 『켄타우로스의 비평』(문학동네, 2004)의 서문을 다시 읽는다는 그는, 이번 신간의 ‘책머리에’에서 프랑코 모레티 『근대의 서사시』의 한 구절을 다시 한번 인용한다. 가능한 한 ‘왜’와 ‘어떻게’를 반반씩 다루는 ‘켄타우로스적 평론가’가 되겠다는 지난 다짐을 되새기는 것이다. 2000년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문학평론가인 김형중은 문학작품을 일거에 꿰뚫는 통찰력과 작품을 다면적으로 해독해내는 탁월함으로 문단과 작가로부터 끊임없는 호명을 받아왔다. 한국 사회의 뼈아픈 역사를 과거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개인의 역사가 어떻게 문학사적으로 자리 잡는지에 대해 몰두해온 그는, 스스로 “광주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원한이 남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문학평론가의 비평 작업이 문학에 국한되는 일에 의구심을 갖는다. 이렇듯 자기 안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았던 그는, 첫 비평집에서 해마다 5·18에 관한 글을 쓰겠다는 다짐을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지켜오고 있다. 이는 비평 작업이 개인의 연구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를 다각도로 살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7년간 써 모은 글을 묶은 이번 연구서를 통해 여전히 “시절이 글쓰기의 형식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혹은 잘 고안된 형식이 어떻게 해당 시절에 성대를 빌려주는지에”(「책머리에」) 관심이 많다는 김형중은 여전히 한국 문단에 경종을 울리는 현장비평가이다.
목차
1부 사(史)적이고 사(私)적인
불과 시험 - 프로이트의 마음의 위상학과 안도현의 ‘연탄’ 연작
이청준 문학과 ‘한(恨)’ - 「남도 사람」 연작을 중심으로
응답하라, 1983 - 박노해, 황지우, 백낙청의 시대
1980년대 민족민중문학론의 결여
마르크스주의와 형식 -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대하여
눌변의 문학 - 이인성, 『낯선 시간 속으로』
2부 증언과 시점
기억을 복원한다는 것 - 김숨, 『L의 운동화』와 『한 명』
증언과 시점 - 김숨,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불가능한 인터뷰 - 김숨, 『듣기 시간』
소설과 증기기관 -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와 김숨의 『떠도는 땅』
임철우, 사도 바울 - 임철우, 『연대기, 괴물』
나야, 몽희 -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
3부 광주에서
그 밤의 재구성 - 김현과 5·18
공동체와 죽은 타인의 얼굴 - 『봄날』을 다시 읽으며
‘총’이라는 물건 - ‘사건’으로서의 5·18 과 ‘총’
5·18 을 가르친다는 것
그에게는 병식(病識)이 없어서 - 지만원의 『뚝섬 무지개』에 대하여
정작 중요한 것 - 전두환의 죽음에 부쳐
4부 여록(餘錄)
‘최악’의 소설사 - 김이설론
아이를 찾았습니다만 - 김영하론
죽음이 다녀간 후 - 손홍규론
우리는 세 부류로 나뉜다 - 김숨, 『제비심장』
그것이 온다 - 백민석,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분노조절장애 시대의 묵시록 - 백민석, 『공포의 세기』
소설과 SNS - 백민석의 『버스킹!』과 이장욱의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추리할 수 없는 세계의 추리소설 - 이장욱,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다시, ‘환대’에 대하여 - 이기호,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책임의 소재 - 편혜영, 『소년이로』
비(非)윤리 혹은 미(未)윤리적 소설 쓰기 - 백가흠론
제비가 떠난 후 - 윤대녕론
내가 뭘 잘못하지 않았는데- - 임현, 『그 개와 같은 말』
파기된 계약 - 양선형, 『클로이의 무지개』
젊은 아톨레타리아트의 초상 - 서이제, 『0%를 향하여』, 이민진, 『장식과 무게』, 신종원, 『전자시대의 아리아』
저자
김형중 (지은이)
출판사리뷰
어떻게: 혹독했던 상처에 과거형은 없다
한국문학사에 대한 발언을 한데 묶은 1부는 평론가 김형중의 다양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안도현의 ‘연탄’ 연작을 분석한 글은 한국문학에서 불(연탄)이 상징하는 성적 욕망과 프로이트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분석한 「불의 입수와 지배」를 병치시켜 누구도 피할 길 없는 ‘불의 시험’ 앞에 놓인 인간의 ‘반성’과 ‘죄책감’의 어조를 재차 확인한다. 불의 뜨거운 속성이 어떻게 인간의 자아에까지 가닿는지에 대한 연구와 분석은 널리 알려진 문학작품을 새로이 해석하고 그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듯 김형중의 비평은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개인의 사(私)적인 일처럼 여겨지는 작중의 상황이 어떤 형식으로 문학사(史)로 기록되는지에 대해 분석한다.
기억을 복원해 증언해낸 문학작품을 엮은 2부에는 문학이 증언의 형식을 취할 때 뒤따라오는 고민과 위험성에 대해 말하면서 이를 주제로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는 김숨과 임철우를 여러 번 소환한다. “혹독했던 상처에 과거는 없”(p. 97)다는 그는 우리 사회에 애도가 필요치 않았던 시절이 없었음을 상기시키며 탄식한다. 작중 ‘나’(복원 전문가)에게 학생운동가 이한열(L)의 운동화를 복원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오면서 시작하는 김숨의 『L의 운동화』는 문학이 왜, 어떻게 역사로 남은 기억을 복원해야 하는에 대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역사 현장의 복원 이전에 작가에게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애도’와 ‘증언’이라고 답하는 듯한 김숨의 소설은 “L의 운동화는 또한 지상에 존재했던 단 한 사람의 것이었고, 그의 체취와 발 모양만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가 걷고 뛰었던 길들의 궤적만을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고유하고도 특이한”(p. 103) 상징성을 지닌다.
김형중은 2부에서 『L의 운동화』외에도 『한 명』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듣기 시간』 『떠도는 땅』등 김숨의 작품을 여러 번 호명함으로써 이러한 작업이 응당 이루어졌어야만 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시간을 현재로 소환하는 임철우 역시 김형중에게는 끊임없이 연구되어야만 하는 ‘기억 발굴자’에 가깝다. “죽은 아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라는 「흔적」의 첫 문장은 그 아무리 커다란 고통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는 작가의 결연한 의지와 자신의 삶과 고통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 윤리적 덕목을 보여준다.
소설 속 모든 문장을 희생자를 인양하는 데 바친 임철우는『돌담에 속삭이는』에서 “모든 법의 효력이 정지되고 단순히 ‘눈에 띈다’는 사실만으로 죽임을 당”한 제주 월산리 학살 사건을 다룬다. 작중 화자 몽희의 시선을 따라 전개되는 작품에는 우리가 외면하려 했던 ‘응시’가 담겨 있어 독자에게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섬찟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의 나와는 관계되지 않은 일들, 이미 지났다고 치부할 수 있는 사건들. 하지만 내 눈앞에 놓인 모든 풍경이 누군가가 머물다 지나간 자리라 생각하면 우리는 몽희의 시선,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는 그 눈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가능한 한 덮어두려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이기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반드시 기억하고 끊임없이 소환해내 복원해야만 하는 일일수록 우리는 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때 현장평론가 김형중은 다시 한번 말한다. ‘어떻게’ 그 처절하고도 혹독한 상처를 과거로 만들 수 있느냐고.
왜: 죽은 타인의 얼굴과 문학이라는 감정 교육
문학평론가 김현과 5·18의 관계를 비롯해 공동체에 관해 다룬 3부에는 문학작품을 분석 대상으로 삼지 않고 평론가 김형중이 오래토록 사유해온 한국 사회의 병폐에 대해 말한다. 한국문학장의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비평 활동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논의의 대상으로만 언급되는 사회적 재난에 대해 꼬집는다. 인간의 본능이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심리와 안위를 향한다는 것과 별개로 ‘나’의 보존이 타인에게로 향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급작스럽게 내게 당도한 죽은 타인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다. “재난과 참사와 거대한 국가폭력이 끊이지 않는 사회의 경우, 그런 순간은 드물지 않”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죽은 타인의 얼굴은 나 자신의 존재를 감각하는 것조차 낯설게 만들고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윤리의식에 질문한다. 5·18 민주화운동으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5·18을 다룬 작품들조차 어떠한 감정의 정동 없이 역사적 사실로만 이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에 저자는 “5·18이 여전히 현재적이며 우리가 매일매일 경계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회귀하고 말 야만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 데 ‘감정’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p. 225)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한국의 예술이 그간 5·18을 어떻게 재현해왔는가, 하는 질문과도 맞닿는다. 이렇듯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역사에는 제대로 된 애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통해 다시 한번 목도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한국사를 교과서적 역사로서만 접하게 되는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타인의 죽음 앞에 무감해지지 않는 감정 교육이고 이는 우리 세대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4부는 ‘여록(餘錄)’이라는 소제목에 맞게 특정 주제로 나뉜 글을 모으기보단 그동안 작업한 비평을 모았다. 기성작가가 구축해온 작품 세계부터 첫 작품집을 낸 신인 작가의 작품까지 두루 살피는 마지막 부를 다루면서 김형중은 ‘시절’과 ‘형식’에 대해 다시금 살핀다. 앞서 지나간 시절과 계속해서 쌓이게 될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우리에게 감정 교육의 중요성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물음은 문학의 세대 구분이 기성에서 신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 서로의 역사관과 작품관을 횡단하면서 교차하는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신의 문화 자본을 상속받은 신인 작가들을 “마치 21세기의 벤야민들” 같다고 말하는 평론가 김형중은 자신이 짊어진 역사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역사의 복판에서 여전히 치열하게 한국문학의 지형을 그려나가는 현장평론가, ‘어떻게’와 ‘왜’라는 질문을 서슴지 않는 켄타우로스적 비평가로서 한국 사회와 한국 문단이 외면해온 시절을 소환해내 잘 벼려낸 문장으로 자기만의 형식을 구축해왔다.
이 책, 『시절과 형식』은 결코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던 한 비평가의 기록이자 우리가 문학을 어떻게 읽고 왜 사랑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