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미국 단편소설의 르네상스를 이끈
노동계급 절망의 기록자
레이먼드 카버의 국내 첫 인터뷰집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며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로 불리는, 작가들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국내 첫 인터뷰집 『레이먼드 카버의 말』이 출간되었다. 대표작 『대성당』을 비롯해 그의 많은 소설과 시, 산문이 국내에 번역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카버의 내밀한 이야기가 출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단편소설이 외면받던 시기에 오직 단편소설만으로 문학적 성취를 이룬 그에게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고, 이에 답하는 과정은 인터뷰어들뿐만 아니라 카버 자신에게도 그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행위”가 되어주었다.
“글쓰기란 무언가를 발견하는 행위예요.” 카버는 1987년에 프란체스코 두란테Francesco Durante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잘 진행되었을 때에는 인터뷰 또한 그에게는 새로운 발견의 행위가 되었다. 이 대화들을 통해 카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검증해보고, 자신에 대한 비평에 대답하고, 나중에 쓰게 될 에세이와 비평 들에서 발전시킬 생각을 시험해보았다. - 10쪽
총 24편의 인터뷰에는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카버의 아이디어, 끊임없는 퇴고와 같이 글쓰기에 대한 것뿐 아니라 그가 바라보는 당대의 문학적 풍경이 담겼다. 더불어 가난했던 유년, 이른 결혼과 아이들을 부양해야 했던 젊은 시절, 그 후로 이어진 알코올의존증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 또한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카버의 육성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세계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동시에 그 자신인 까닭을 이해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고통과 절망을 지나 마침내 죽음마저도 뛰어넘”은 삶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투고한 소설이 실린 선집을 받고 레이먼드 카버가 그랬듯이, 품에 안고 곧장 침대로 들고 갈 책이다.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이 책에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한 작가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이 많아 인터뷰를 꺼렸지만, 막상 만나면 예의 바르게 상대의 말을 들은 뒤 웅얼거리면서도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이 목소리에 나는 반하지 않을 수 없다. (…) 작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늘 고민 중인 내게 고통과 절망을 지나 마침내 죽음마저도 뛰어넘어 은총과 감사에 이르는 이 작가의 삶은 언제나 감동적인 이야기다. 끝까지 읽을 것을 권한다. - 김연수(소설가)
목차
서문│ 마셜 브루스 젠트리, 윌리엄 L. 스털
우리 자신의 삶의 메아리
최선의 예술
3×5인치 격언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의 위상은 더 높아진다
아무리 희미하더라도 끈질기게
한 번에 하나씩
전 늘 글을 쓰고 싶어 했어요
황무지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
제대로 된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해 독자들을 확신시킵니다
노동계급의 절망의 기록자
보이는 것 이상의 것들
카버 나라의 리얼리즘
쪼개져 흐르는 세계
삶이 열리기 시작한다
문학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선명함과 단순함의 세계
생과 사의 문제
글쓰기란 무언가를 발견하는 행위예요
낭비하는 글쓰기
미국 문학과 레이먼드 카버
증언하는 사람
무척 마음에 드는 변화
어둠이 그의 책들을 장악한다, 그의 삶이 아니라
끝내야 하는 책이 한 권 있어요. 전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옮긴이의 말
연보
찾아보기
저자
레이먼드 카버 (지은이), 마셜 브루스 젠트리, 윌리엄 L. 스털 (엮은이), 고영범 (옮긴이)
출판사리뷰
온몸으로 겪어낸 좌절과
열리기 시작한 “두 번째 삶”
레이먼드 카버가 ‘이야기’를 발견한 것은 어릴 적 아버지가 책을 읽는 모습에서 “사적인 행위”를 본 순간이다. 사적인 영역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가난한 집안에서 독서는 그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것으로 보였고, 카버는 책을 읽고 또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갔다. 그러나 열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했던 결혼과 곧이어 태어난 두 아이는 글쓰기보다는 먹고사는 일에 매진하게 했으며, 그에게 예술이란 “그렇게 할 만한 여유가 있을 때 추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일을 하는 틈틈이 차에 나가 앉아 무릎에 노트를 올려두고 글을 쓰던 그였지만, 이후 겪게 된 알코올의존증은 삶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렸다.
지금은 희망이라는 게 있지만, 전에는 특히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의미에서의 ‘희망’이란 건 저한테 없었어요. 지금은 세계가 오늘 나에게 존재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내일도 존재하리라는 걸 믿어요. 전에는 이런 믿음이 없었죠. 아주 오랫동안 저는 아주 즉흥적으로 살았고, 술 때문에 저 자신과 주변 사람들 모두를 끔찍한 곤경에 몰아넣었어요.
- 189쪽
그러나 카버가 온몸으로 겪어낸 좌절들은 그로 하여금 세상의 “더 낮은 곳”에 놓인 이들을 주목하게 했다. “작가는 그보다 더 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낮은 곳에 시선을 둘 수도 있다는 거죠.” 그의 인물들이 “너무나 무력”한 점에 대해, 이를테면 “고장 난 냉장고를 고치는 대신에 불평만 하고 앉아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카버는 무언가가 고장 났을 때 그걸 고치거나 새로 살 돈 같은 건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대답한다. 이들은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난한데, 오랜 시간 그의 편집자이자 친구로 함께한 고든 리시의 말에 따르면 카버는 그런 누추함을 “찬양”하고, 나아가 “어느 누구도 시도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시적인 것으로 만들어”낸다.
어떤 인생들에서는 사람들이 늘 성공을 거두죠. 그리고 그렇게 되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이에요. 다른 인생들에서는 사람들이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크고 작은 것들을 아무리 원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애를 써도 성공을 거두지 못해요. 그리고 물론, 이런 인생들이 써야 할 가치가 있는 인생들이죠.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생이요. 제가 해온 대부분의 경험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 성공하지 못하는 인생과 관련 있어요.
- 89쪽
그가 ‘두 번째 삶’이라 부르는, 알코올의존증에서 벗어난 삶이 펼쳐지면서 카버의 작품에는 가느다란 희망과 동정심이 더해진다. 그 스스로 “마음을 열어주는” 과정이었다고 말한 「대성당」이 대표적인 예다. 변화한 환경과 건강해진 정신이 그를 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전망”으로 이끌었다고 이야기하는 한편, 언제든 “상상의 문”을 열면 여전히 절망의 “질감”도 떠올릴 수 있다는 그에게서 더 다양한 세계를 그리게 된 작가의 기쁨이 느껴진다.
“쓰지 않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집요한 쓰기에서 탄생한 문학적 증언들
카버의 소설이 그토록 독특한 스타일을 지닌 이유는 그만의 어조 덕분인데, 그에게 어조란 “작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그는 “비아냥거리”지 않으며, 등장인물들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리”지 않는다. 그는 이 세계의 ‘증인’으로서 이야기를 전달한다. 소설의 영향력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 소설이 하는 일 중 하나는 한 세계의 소식을 다른 세계로 전해주는 거예요.”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예민하게 포착하며, 그것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어느새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삶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오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카버의 문학은 “한 줄 한 줄 모두 진실”일 수밖에 없다.
쓰지 않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게 될 때에는 예외겠지만요. 그렇게 되면 물론 그만 쓰게 되겠죠. 하지만 제가 쓸 수 있고 무언가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느끼는 한, 계속할 생각입니다.
- 354쪽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글을 쓸 때면 전화선을 뽑아놓고, 문에 ‘방문 사절’ 표지판을 걸어두고, 자신 외에는 아무것에도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쓴다. 사망 직전까지 이어진 인터뷰에서조차 카버는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내비쳤다. “끝내야 할 책이 한 권 있어요. 회고록(믿어져요?)을 써야 하고, 출판해야 할 시들도 있어요. 전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글쓰기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그가 쌓아 올린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문학적 증언으로 남았다. 그 열렬한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이 인터뷰들은 그 자신과 더불어 이 세상의 소외된 모든 이에게 목소리를 주고자 했던 한 작가의 귀중한 기록이다. 이 사려 깊은 목소리를 통해 그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던 삶의 귀퉁이들을 이해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