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최초의 상소, ‘만인소’
조선 ‘공론 정치’의 생생한 복원
현미경으로 보는 조선사
조선은 우리가 무심코 상상하는 그저 그런 전제 왕권이 지배한 나라가 아니었다. “인심이 동의하는 바를 공론이라 하고, 공론이 있는 바를 국시國是라고 한다”라는 이이李珥의 말처럼 조선은 공론정치를 지향했고, 이로 인해 관료를 넘어 재야 유생들에게까지 상소를 올리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1565년 22차례에 걸쳐 연명 상소운동인 ‘백인소’를 시작으로 집단 상소가 이어졌다. 조선 시대 일상에서 현대적 의미를 길어내는 작업에 천착하고 있는 지은이는 류이좌(추정)의 《천휘록》을 바탕으로 1792년 조선 최초의 ‘만인소’를 꼼꼼하게 복원했다. 이 과정에서 권점圈點(벼슬아치 후보자 이름 밑에 지지를 표시하는 점 찍기), 근실謹悉(상소 남발을 막기 위한 성균관의 확인 절차) 등 여느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조선사의 내밀한 사실을 만날 수 있다.
목차
머리말_열려 있는 청원문화
프롤로그_어머니의 눈물
편지_아니 갈 수 없는 길|어머니의 눈물_위험한 길
01 도산별과_새로운 희망
영남_반역의 땅|정조의 즉위_희망과 절망 사이|도산별과_새로운 영남의 희망
02 반발_류성한의 상소
발화_류성한의 상소|비판_당파를 넘어|확산_윤구종 사건|의도_정조의 생각
03 분노_공론의 수렴과 소행
소식_영남의 행보|의결_여론 형성과 도회|상소운동_공론이 갖는 권위|소행_상소운동의 시작|지역_배소 유생들의 활약
04 소청_본격화된 상소운동
조직_소두와 공사원|운영_상소 준비와 예산|소두의 재선출_이념의 강조
05 1차 봉입_이산의 눈물
근실_상소를 막는 빌미|실랑이_그리고 묘수|봉입_왕의 눈물|비답_아픔과 공감
06 회유_그리고 2차 상소
성균관_근실불허의 책임|회유_내려진 관직|고민과 출사_늦어지는 상소운동|재소 준비_명분과 소두의 재선출|부조_도움도 명분에 맞게|2차 봉입_형식적 비답
07 삼소_시도와 좌절
왕의 회유_이제는 돌아갈 때|왕이 내린 비용_받아도 문제, 받지 않아도 문제|설득_명분에 따른 거부|갈등_명분과 현실|말미_사도세자의 기일|중지_그리고 낙향
에필로그_만인의 청원, 만인소운동
영남_만인소 이후|배경_조선의 권력과 상소의 권위|의미_만인소의 가치와 영향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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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상호 (지은이)
출판사리뷰
시대를 뛰어넘는 정치셈법
지은이가 주목한 것은 미시적 사실만이 아니다. 정조와 그 측근인 채제공이 기득권층인 노론 견제를 위해 새로운 지지 세력이 필요했다든가, 영남 사림에 힘을 부여하기 위한 도산별과가 영남 사림을 정치적 동반자로 삼겠다는 의미였다는 등 만인소 운동의 굵직한 배경을 짚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자기 입으로 공론화하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공론의 장으로 올라오면 이 문제를 다루겠다는 정조의 노회한 속셈을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영남 사림에 정국 주도권이 넘어갈 것을 우려한 노론의 노심초사도 당시 권력다툼이 현대 정치판의 정치공학을 뺨칠 정도였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노론인 이조참판 김희의 주도로, 상소운동을 주도한 소두疏頭 이우나 성언집에게 관직을 주어 만인소 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하려 한 시도가 그것이다. 또한 몇몇 중신들은 만인소 운동의 지도부에 부조를 보내는가 하면 근실 권한을 지닌 성균관 유생 대표들이 집권층의 눈치를 보느라 거부했다가 처벌받는 대목 또한 마찬가지다.
무릎을 치게 하는 의미 부여
책은 만인소 운동의 배경, 영남 유림의 상경 과정, 소두의 임명이나 상소문 마련, 처리 과정, 비용 등을 세밀하고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1만 57명이 연명했다는 사실이 단순한 물리적 숫자가 아니라 ‘만백성의 이름’에서 보듯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 ‘모든 백성의 뜻’을 ‘하늘의 뜻’을 받드는 유교 정치 이념이라는 의미를 들려준다. 또한 만인소 운동이 1823년 서얼 9,996명이 참여한 서얼 차별 철폐 상소나 1881년 1만 3,000여 명의 유생들이 청원하는 ‘척사 만인소’ 등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인소 운동은 유학적 권위를 빌려 구체적인 정책 변화를 촉구했던 시민운동으로 언로 자체가 의미 없는 시기가 되었을 때는 강한 무력운동의 철학적 기반으로 작용했다며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의 뿌리로 지적하는 대목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사극을 웃도는 읽는 재미
그렇다고 책이 딱딱하거나 고리타분하지는 않다. 지은이의 유려한 글솜씨에 힘입어 어지간한 사극 드라마를 능가하는 재미가 도드라진다. 그 정점은 우여곡절 끝에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정조에게 1차 상소를 전하는 장면이다. “이우의 목소리가 끝이 나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그믐이 얼마 남지 않아 달빛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희정당 주위를 눌렀지만, 이마저도 진신과 장보들의 긴장감을 가리지는 못했다. …… 촛불 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 희정당을 감싸고 돌았다. …… 정조는 상소를 듣던 그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었다. …… 류이좌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곁눈질로 그 답답한 상황의 이유를 알아보려 했다. …… ‘눈물’이었다. 용안 위로 촛농을 닮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처럼 드라마틱한 장면을 쉽게 만날 수 있을까.
책은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에 이은 ‘조선사의 현장으로’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한데 전작이 그랬듯이 단순한 ‘현장답사기’를 넘어선 진지한 역사서이다. 주석이 본문의 4분의 1에 이를 정도인 것이 이를 웅변한다. 충실한 역사적 사실 소개, 이에 관한 설득력 있는 해석과 더불어 재미를 놓치지 않은 수작秀作이기에 지은이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