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5·18 생존자 임영희가 선사하는
광주 오월공동체로의 시간여행
삐뚤빼뚤 서투른 그림 속에서 나를 만나다
나,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뒤바꿔버린 그해 오월의 이야기
여기,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하나의 생애가 있다. 1956년 보배의 섬 진도에서 태어나 광주 양림동에서 생애 가장 뜨겁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맞이했던 임영희의 삶이 그렇다. 56세의 나이에 급성뇌졸중으로 장애를 갖게 된 그는 코로나 시대를 보내며 크레파스와 사인펜을 집어들었다. ‘그림의 의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비된 오른손 대신 서투른 왼손이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삶의 굵직한 마디마디에 새겨진 곡진한 이야기들은 그린 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림 속에서 고개를 내민다. 《양림동 소녀》는 긴 세월 속에 감춰진 과거를 더듬어보는 시간여행이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간 그곳에선 다양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임영희는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광주로 유학 간 이야기, 그곳에서 문학과 글에 대한 꿈을 키우는 이야기, 그 꿈의 터전이 된 양림동에서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을 시작하고 5·18 항쟁에 시민군으로 참여하게 된 이야기, 노년기에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 이야기를 담담하고도 명랑히 풀어낸다. 임영희의 생애 속에서 우리는 그 개인의 역사를, 또한 우리 모두의 역사를 뒤바꿔버린 찬란한 오월공동체와 마주하게 된다
목차
서문 8
1부 / 보배의 섬을 떠나오다 13
2부 / 양림동 소녀 53
3부 / 광주 오월공동체 87
4부 / 단비를 마시며 아침을 맞는다 125
그림으로 의식을 치르다 157
저자
임영희 (지은이)
출판사리뷰
무엇을 그릴까? ‘나를 그려보자’
“엄마, 심심하니까 그림 좀 그려봐요.”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저자는 아들에게서 그림을 그려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급성 뇌졸중 후유증으로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그는 왼손에 도구를 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광주 양림동에서 보냈던 10대 학창 시절을 주로 떠올리며 그렸지만, 기억의 틈새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순간들이 계속해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게 그린 80여 점의 그림들은 〈양림동 소녀〉라는 30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탄생했다. 자신의 삶을 표현한 그림과 함께 그 그림을 구술로 설명하는 저자의 나지막한 음성이 내레이션으로 흐르고, 아들인 오재형 감독의 피아노 연주가 배경음악으로 곁들여지는 방식이다. 영화는 곳곳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서울독립영화제, 광주여성영화제,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광주독립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2023년 한 해 제15회 서울국제노인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부문 대상을 비롯해 4개의 상을 수상했다. 제44회 청룡영화상에서는 청정원 단편영화부문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삶의 근거지가 된 양림동, 송백회와 보프룩 카페
이 구술사의 중심이 되는 광주 양림동은 저자가 삶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낸 장소다. 그 자신의 말처럼, 양림동에서 보낸 젊은 시절은 인생의 ‘전성기’이자 ‘하이라이트’다. 진도 출신인 그는 어린 나이에 광주로 유학 와 10대와 20대를 양림동에서 보냈다. 양림동에 위치한 수피아여중/여고를 다니며 문학 소녀의 꿈을 키웠고, 수피아에 새겨진 독립운동의 자취를 더듬으며 “유신에 저항하는 해방자의 길”을 모색해나갔다. 당시 무등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학교 교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문학의 폭을 넓혔다.
20대가 되어 연극 제작 등 문화 활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을 때도 양림동은 그 ‘사상의 기반’이었다. 당시 양림동에서는 많은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거주하며 공동체를 일구고 있었다. 그 역시 양림동을 근거지로 유신 반대 운동과 극단 활동을 이어나갔고, 1978년 12월에는 동료들과 함께 광주전남 최초의 여성단체 송백회를 꾸려 간사로 참여했다.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사람들을 옥바라지하는 여성들의 소모임으로 출발한 송백회는 공부와 토론 모임, 양심수 지원, 대중 시위, 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 기획 등의 활동을 조직했다. 송백회 회원들은 5 · 18 당시에도 들불야학과 함께 《투사회보》 등을 제작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교사, 간호사, 노동자, 주부, 청년운동가 등 진보적 사회의식을 가진 여성, 민청학련 구속자 가족, 민주화운동 활동가 부인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80여 명의 여성들로 구성된 송백회에서는 성매매를 목적으로 하는 관광, 가난한 농촌 여성들의 문제를 고민하고 이야기했다. 송백회의 창립 멤버였던 소설가 홍희담과 밀접하게 교류했던 저자는 이 시기에 시몬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여성 사상가들의 책을 읽으며 고민을 확장해갔다. 친한 동료이자 선배였던 홍희담의 집에서 그와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이어갔던 저자는 그 공간을 ‘보프룩 카페’(‘보’부아르, ‘프’리단, ‘룩’셈부르크의 첫 음절을 조합한 작명)로 이름 짓는다.
5 · 18 시민군으로 싸웠습니다, 절박하게
유년 시절의 명랑하고 풋풋한 에피소드에서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는 5 · 18 시민군으로 광장 한복판에 섰던 묵직한 순간에 도달한다. 국가가 시민에게 총칼을 겨눠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던 그때의 그 현장을 목도한 것이 씻을 수 없는 평생의 아픔으로 남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5 · 18 항쟁은 그를 지금껏 살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성한’ 광주 오월공동체의 모습들을 여러 장면으로 세밀하게 표현했다. 5 · 18 당시 함께 활동했던 다양한 여성들(주부, 직장인, 여고생, 할머니, 시장 상인 등), 5월 23일 계엄군이 잠시 물러난 해방 광주에서 주먹밥 같은 것을 나누며 서로를 보살피고 배려했던 시민들…… 그에게 5 · 18은 “태어나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는 그런 찬란한 공동체로 기억된다.
“공권력이 사라진 도시에서 시민들끼리 누구 하나 총구녁 겨누며 싸우지 않았고, 은행 터는 사람도 없었고, 한 건의 약탈 사건도 없었어. 서로서로 보살피고 서로서로 배려했지.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또 있었을까.”
그는 도청 분수대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범시민궐기대회) 이윤정의 〈민주화여!〉를 낭독했던 순간의 긴박함과 절박함에 대해서도 말한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가고, 시민군은 폭도로 몰리고, 언론 탄압으로 5 · 18 항쟁의 진실을 보도할 수 있는 길마저 막힌 상태였기에, 그는 절실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엄청 힘을 줘서 낭독”했다. “민주화여 / 영원한 우리의 소망이여 /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 우리는 총칼에 부닥치며 여기에 왔노라”
“떨릴 겨를이 어디 있어? 우리는 끝까지 싸우겠다, 뭐 그런 각오로 한 거지. 항쟁이 끝나면 나는 사형당할 줄 알았어.”
나의 삶을 바꾼 광주 오월
5 · 18 이후, 그는 힘겹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쳐왔다. 어떤 눈이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꿈,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며 쫓아오는 꿈에 시달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때 생긴 불면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로 도피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도피 중 갑자기 난소에 이상이 생겨서 급하게 수술을 받기도 했다.
“몇 달 새 사람이 메말랐고 고통스러웠재. 이렇게 머리끝에서 발까지 대못으로 박힌 것 같은 고통이었어.”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에서 5 · 18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5 · 18 이전부터 이어왔던 문화운동이 그만의 실천 방식이었다. 함께 서울로 도피한 친구들과 ‘해방 광주 오월’이라는 주제로 분수대에서 낭독했던 글들을 돌아가며 읽고 녹음해 테이프로 제작했고, 다시 광주로 돌아가서는 5 · 18 항쟁을 배경으로 하는 마당 공연 〈무등의 꿈〉을 기획해 무대에 올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탄생한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서 이뤄진 이 곡의 녹음에 참여한 것이다. ‘넋풀이: 빛의 결혼식’이라는 제목을 단 녹음테이프의 맨 마지막 순서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혹시 감시당할까봐 거실 창문을 담요로 다 막아놓고 녹음을 새벽까지 한 거야. 노래를 미리 연습해서 불렀던 게 아니고 그 자리에서 다 같이 배워서 했어. 나는 우리가 처음 불러서 녹음했던 이 노래가 이처럼 전국적으로, 또 세계적으로 많이 불릴 줄은 몰랐어.”
그림이 언어가 되기까지
50대에 접어든 어느 날, 그는 급성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후 후유증으로 오른쪽 몸이 마비되는 신체장애를 얻었다. 이 년간의 병원생활을 하며 밥을 먹는 것도, 걸음을 걷는 것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그가 다시 익히고 습득한 건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전에는 갖지 못했던 새로운 언어를 연마했다. 그의 왼손이 선사해준 그림이 바로 그 언어다. 그가 “미적미적하며 그린 그림”은 어느새 그를 ‘이야기로 지어진 아테네 신전’으로 인도했다. 그림이 언어가 되기까지 고통이 누룽지처럼 붙어 다녔답니다. 그런데 재미가 있었지요. 처음 경험하는 후련함이죠. 마음이 아주 편해졌어요.”
장애인이 된 그는 이제 “장애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시선”을 깨닫는다. 그가 나이 칠십을 바라보며 지은 《양림동 소녀》는 “다시 한번 ‘모든 이를 위한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가자는 권유”와도 같다. 이곳에서 그는 여성으로서, 국가폭력의 생존자로서, 또한 장애인으로서 세계를 다시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