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퓰리처상 수상작 『귀환(The Return)』으로 알려진 리비아계 영국 작가 히샴 마타르(Hisham Matar)의 독특한 에세이로, 깊고 오래된 상실감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치유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의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는 리비아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카다피 정권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물로 지목되면서 1979년부터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90년 카이로에서 납치되어 리비아 아부살림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1996년 이곳 정치범들이 대량 학살되는 사건이 벌어진 후 생사불명 상태로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가 납치되었을 때 마타르는 열아홉이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때부터 시에나 화파 그림들은 그에게 피난처이자 외부 세계와 만나는 통로가 되어 주었다. 아버지의 행방을 모른 채 삼십 년 가까이 흐른 뒤 그는 마침내 이 그림들의 고향을 찾는다. 시에나의 알레고리 속에 몸을 맡긴 ‘묘지 없는 애도자’는 상실에 맞서 살아 갈 방도를 이 도시에서 하나씩 발견해 나간다.
목차
두초의 문
방의 형태
머무는 곳
다윗과 골리앗
갑옷? 무슨 갑옷?
벤치
『흔적』
미술관 경비원들
푸른 리본
앉기
신앙의 문제
불
〈터키식 목욕탕〉
천사의 곤경
〈낙원〉
옮긴이 주
도판 목록
저자
히샴 마타르 (지은이), 신해경 (옮긴이)
출판사리뷰
시간을 요구하는 그림
너무나 많은 전시와 관련 정보가 쏟아지고 있는 요즘, 우리는 하나의 그림을 자신의 눈으로 차분히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겨우 틈을 내 미술관에 가서도 그 오랜 시간을 견뎌 우리 앞에 당도한 그림들을 잠깐씩 훑어보고 나올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은 예술도 빠르고 많이 경험하고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림은 왜 그려져 왔으며, 우리는 왜 그림을 보는 것일까.
리비아계 영국 작가인 히샴 마타르(Hisham Matar)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 속에서 찾아간다. 그는 하나의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는데, 서너 달은 기본이고 일 년이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버지의 행방은 단서조차 찾지 못한 채 사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계속 이런 방식으로, 한 번에 하나씩 그림을 본다. 이런 방식으로 보면서 많은 이득을 얻었다. 바라보다 보면 그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달라지곤 했다. 나는 그림이 시간을 요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림은 점차 그에게 삶의 물리적인 거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거처가 되었다.
묘지 없는 애도자
마타르의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Jaballa Matar, 1939-?)는 리비아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카다피 정권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물로 지목되면서 1979년부터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90년 3월 카이로에서 납치되어 리비아 아부살림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1996년 6월 29일 이곳 정치범들이 대량 학살되는 사건이 벌어진 후 생사불명 상태로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가 납치되었을 때 마타르는 열아홉이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때부터 시에나파 그림들은 그에게 피난처이자 외부 세계와 만나는 통로가 되어 주었다. 아버지의 행방을 모른 채 삼십 년 가까이 흐른 뒤 그는 마침내 이 그림들의 고향을 찾는다.
그가 시에나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버지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을 기록한 『귀환(The Return)』의 집필을 마친 즈음이었다. 그가 하필 시에나파 그림에 빠져든 이유는 무엇일까. 시에나 화파는 13-15세기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번성한 화파로, 그 시조라 불리는 두초 디 부오닌세냐, 고딕 양식을 접목한 피에트로와 암브로조 로렌체티 형제, 타데오 디 바르톨로, 마테오 디 조반니 등이 대표적 화가이다. 비잔틴도 아니고 르네상스도 아니며, 피렌체 화파처럼 극적인 느낌도 없는 그 그림들은, 어딘가 어색하지만 인간적이고 세밀하면서도 정서적인 묘법으로 마치 변종처럼 홀로 존재한다. 마타르도 처음에는 그 그림들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다. 그림들에서 흔히 보이는 대칭적인 구도와 노골적인 시선이 무례하고 적대적으로 느껴졌고, 기독교적 관례와 상징이라는 은둔 세계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보러 갔다. 그리고 그 그림들의 색, 섬세한 형태, 정지된 드라마가 점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던 때부터 지금까지 마타르는 몇 달에 한 번씩 내셔널 갤러리로 두초의 〈수태고지〉나 〈눈먼 사람을 치유하다〉를 보러 간다. 시에나로 떠나기에 앞서 마타르는 ‘진정으로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반어적으로 질문하는’ 그림인 〈눈먼 사람을 치유하다〉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완성된 것을 보여주기보다 보는 이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듯한 시에나파 그림들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림의 완성에는 감상자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그런 예술의 초기 사례라고나 할까. “그림이 보는 사람의 감정 상태에 얼마나 크게 좌우되는지, 인간이 공통으로 겪는 경험이 예술가와 보는 사람, 예술가와 대상 간의 계약을 어떻게 바꾸는지 이 새로운 협업 형태가 어떤 창작의 가능성을 주는지 그 그림들이 묻고 있음을 우리는 간파할 수 있다.”
시에나의 알레고리 속으로
시에나에 온 마타르는 캄포 광장의 푸블리코 궁전으로 향한다. 이탈리아가 통일된 국가가 되기 전에는 세습 군주가 지배하는 여러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었는데, 시에나는 시민 통치를 선호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 도시는 교회의 권위에서 벗어나 시에나 정부가 주축이 되어 스스로 세금을 결정해 거두고 법을 만들어 강제했다. 부유하고 잘 통치되는, 당시 기준으로는 민주적인 곳이었다. 13세기에 시에나 공화국의 정부 청사로 지어진 푸블리코 궁전은 그 행정의 중심이었다. 현재는 시청과 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내부에는 많은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마타르가 이곳을 여정의 첫 장소로 택한 이유는 시에나의 남다른 근원부터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의 살라 데이 노베(Sala dei Nove), 즉 ‘아홉의 방’에는 암브로조 로렌체티가 완성한 ‘알레고리’와 그 결실의 풍경들이 세 벽면을 채우고 있다. 중앙에 위치한 〈좋은 정치의 알레고리〉는 세속화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단호한 작품으로, 정의에 대한 찬가이자 시민 통치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지배적인 신과 같은 존재는 볼 수 없다. “그림 속 활동들이 분포된 방식은 유일한 권위를 찾으려는 욕구를 좌절시킨다. 대신에 그 그림은 어떤 정치적 선언의 시각적 행진을 보여준다.” 양쪽의 긴 벽에는 ‘알레고리’의 충고대로 따랐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될지를 보여주는 〈좋은 정치의 결과〉와 그러지 않았을 때를 보여주는 〈나쁜 정치의 결과〉가 그려져 있다. 무언가를 부정하려면 그것이 가진 의미를 분명하게 말해 주어야 하는데, 이 역설은 로렌체티의 프레스코화를 읽는 한 방법이다. 그의 그림은 칭송하고 또 비난한다. ‘알레고리’는 여러 덕목들의 위계와 권력과의 관계를 가르치면서 대놓고 명확하게 만들고 싶어 하고, 그 결실인 풍경들은 단정적이다. 그것은 시에나를 닮았고 또 모든 도시를 닮았다. 마타르는 악마로 묘사된 ‘폭정’에서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풍자한 트리폴리 담벼락의 낙서들을 떠올린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는 시에나에 있으면 시에나가 유일한 도시이거나 모든 도시인 도시로, 혹은 사실은 도시가 아니라 도시의 알레고리로 보이게 되는 그 느낌을 강조해 준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도시로서의 자아
마타르는 그림을 보는 것 이상으로 시에나라는 장소에 깊이 스며든다. 키자나 음악원, 캄포 광장, 푸블리코 궁전, 시에나 대성당, 피나코테카 미술관, 산 베르나르디노 기도원 미술관 등 여행객들이 한 번쯤 가 볼 만한 곳도 가지만, 숙소인 오래된 팔라초에서의 시간, 도시 공동묘지의 벤치에 앉아 있거나 시에나를 둘러싼 도시 방벽까지 걷는 시간도 만끽한다. 어느 날은 이 도시를 접하는 감각을 새롭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시의 한쪽 끝까지 걸어가서 여러 관문 중 하나를 통해 도시가 보이지 않는 지점까지 갔다가 다시 시에나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처럼 결연하고 그처럼 의도가 충만하고 그처럼 나의 존재에 관심이 많은 곳은 일찍이 가 본 적이 없었다. 어느 길로 접어들든, 내 걸음의 속도와 방향은 시에나가 결정하는 듯했다. 그때 기분으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처럼 오랫동안 가고 싶어 했던 그 낯선 도시에서 평생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이 도시에서 마주친 사람들에게서 뜻밖의 위로를 얻는다. 두오모 광장에서는 점잖은 나이지리아 여인과 인사를 나누고, 도시 방벽이 있는 언덕에서는 요르단에서 이민 온 아담과 그의 아들 카림을 알게 되어 집으로 초대를 받는다. 모두 이방인이 다른 이방인에게 보여주는 관대한 태도를 지닌 이들이었다. 금세 친해져 ‘사브리’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된 이탈리아어 강사 사브리나, 종일 서서 그림을 보는 그에게 의자를 건네는 피나코테카 미술관 경비원, 아흔번째 생일을 맞이한 오래된 이탈리아인 친구 베아트리체, 그리고 휴대폰에 녹음되어 있던 아내 다이애나의 목소리까지, 타지에서 마주친 낯설거나 친숙한 이 존재들은 그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동행한다.
내밀한 순례의 길
시에나에 머무는 동안 마타르는 그간 마음에 담아 둔 그림들을 보러 다닌다. 신보다 인간의 삶에 훨씬 큰 관심을 두고 있는 듯 보이는 두초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의 성모〉, 이보다 더 심란한 성모와 성자의 재현을 생각하기도 힘들 로렌체티의 〈젖을 주는 성모〉, 보면 볼수록 가슴 깊이 고통이 자리하게 되는 사노 디 피에트로의 〈수태를 알리는 천사〉 등, 모두 어딘가 조금씩 이상하면서도 보는 이의 생각과 감정이 들어갈 틈을 열어 놓는 묘한 그림들이다. 물론 시에나가 중심에 있지만, 런던, 트리폴리, 로마, 뉴욕 등 여러 장소와 그곳의 그림들이 실제로 또는 기억 속에서 소환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그 모두가 한 장의 천으로 만든 세월의 손풍금처럼 차곡차곡 접히는 듯했다. 여기 우리는 동시에 시에나와 로마와 트리폴리에 있었다.” 그리고 묘지 벤치에 앉아 있던 어느날, 그는 자신이 시에나에 그림을 보러 온 것만이 아니라, 홀로 애도하러, 새로운 지형을 살피며 여기서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알아내러 온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한 달의 여정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마타르는 바쁜 일정에 지쳐 가던 뉴욕 출장길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방문한다. 그리고 조반니 디 파올로가 흑사병 발발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445년경에 그린 〈낙원〉 앞에 다시 선다. 내세의 재회를 상상하는 이 그림 속 사람들처럼 아버지와의 재회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그는 그렇게 자기만의 내밀한 순례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