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미술 비평가 유지원이 한국의 동시대 미술사에서 특기할 만한 실천들이 쏟아진 2010년대 신생공간을 관통하며 쓴 에세이. 한 개인의 소비 영수증이 어떤 세계의 연대기를 보여줄 수 있음을 어렴풋이 증명하며 동시대 미술사에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를 채워 넣는다
목차
프롤로그: 상자를 열다
전시 보고 옥상에서 만나요
굿-즈의 불나방
미술을 소비하고 소유하는 방법
예쁜 것이 못생긴 집에 와야 한다니
장이 서면 달려가야 한다
같이 살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
물욕의 정체
컬렉션은 곧 독해, 어쩌면 자기 예언
시간을 얼려 보관하기
새로운 놀이의 규칙
우리가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신기루와 롤 케이크
미끄럽고, 울퉁불퉁하고, 기울어진 땅
열린 공간 닫힘
이야기는 계속된다
에필로그: 사는 일에서 사는 일로
미술 사물 도감
저자
유지원 (지은이)
출판사리뷰
기대 감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미술
신생공간으로부터 당도한 이야기
2010년대 서울의 홍대, 종로, 중구 등지의 공장지대, 시장통, 주택가 골목에 미술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들 공간은 1980년대에 태어나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와 함께 미술 대학을 졸업하며 사다리를 걷어차인 작가들이 자생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자기만의 취향을 계발하고 전시하는 데에 익숙한 같은 세대의 관객들이 이에 반응했다. 총 80명/팀의 신진 작가가 참여해 2015년 10월 14일부터 10월 18일까지 5일간 열린 미술 장터 『굿-즈』는 5,800여 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90년대에 경직된 주류 미술에 대한 대안을 표방하며 등장한 대안공간 운동과 달리(93쪽), 각 공간이나 작가의 산발적 플레이가 어떤 흐름을 형성하며 ‘신생공간’을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 바꾸었다. 새로운 열기 속에 여기저기에서 때때로 열린 미술 장터에서는 지갑이 얇은 창작자와 관객 사이에 활발한 거래가 오갔다. 저자는 이즈음부터 미술을 사기 시작했다. 한 번도 가깝다고 여겨본 적 없는 미술에 풍덩 뛰어들어 살다 보니, 벽, 책장, 장롱이 꽉 차버렸다.
이 책은 미술을 사다가 미술로 먹고살게 되었고, 그래서 미술이 살아가는 모습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된 저자가 한국의 동시대 미술사에서 특기할 만한 실천들이 쏟아진 2010년대를 관통하며 쓴 에세이다. 신생공간과 그곳에서 만난 작가들에 대한 회고와 작품들에 대한 비평이 뒤섞인 이 책에서 저자는 창작자 간의 느슨한 연대, 비평적 관객의 탄생, 소셜미디어로 연결된 익명의 동인 등 신생공간을 둘러싼 문화적 현상들에 주목한다.
눈으로만 보지 마세요
미술을 산 사람의 특권
『굿-즈』전(세종문화회관, 2015.10.14-10.18)으로 대표되는 젊은 창작자들의 미술 장터에서는 작업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나 작품의 파생물 형태의 작업물이 거래되곤 했다. “80년대 이후 출생 창작자들이 10대부터 일본의 대중문화 개방과 국내 만화 시장의 성장으로부터 서브컬처 문법에 익숙하거나 케이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소비의 직접적인 당사자였다는 점은 파생 아이템 생산에 가속기를 달아주었다.”(27쪽)
이렇게 가공된 미술품은 생활비를 조금 아끼면 구매할 수 있는 가격대인데다 한창 취향 계발에 몰두 중이었던 저자는 양손 가득 작품들을 사 들였다. 노르께한 벽지 위에 드로잉을 걸 자리를 찾고, 책장 칸마다 조각이 들어찼다. 제자리가 아닌 듯한 느낌도 잠시, 저자는 미술과 살을 부대끼며 사는 법을 터득한다.
표지에 쓰인 “눈동자가 아래를 향하는 두 쌍의 눈알처럼” 보이는 박아람 작가의 〈굴리기〉(2012)를 따라 눈알을 아래로 데구루루 굴려보기도 하고, 배경의 연필선을 따라 바삐 눈을 움직이며 칠을 더하기도 한다.(51쪽) 조각들은 더 손을 타는데, 권세정 작가의 노견 조각 중 하나인 〈어깨-팔꿈치〉(2018-2019)는 “털이나 얼굴 생김새 등 개체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지워진 채 몸통만 덩그러니 남겨져, 그것과 비슷한 크기였던 나의 늙고 병들었던 강아지와 겹쳐”져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킨다.(48쪽)
“다양한 재료의 조각과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드로잉이 일상을 침범할 때, 비활성화되어 있던 감각이 순간순간 살아난다.”(53쪽) 눈으로만 보라는 미술관의 지시를 무로 돌리고, 물리적인 접촉면을 늘려가는 감상법은 미술을 소유한 사람만의 특권이 된다.
흥행은 모르겠고, 흥겨웠던 것은 분명하다
저자가 미술을 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생공간’이 있다. 창작자와 관객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가격 태그가 붙어 있을 만큼 ‘굿즈’화 된 형태로 내놓은 작품을 많이 선보였다.
2010년대에 등장한 ‘신생공간’은 앞으로 미술사를 기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기존의 미술관과는 전혀 다른 장소(시장통이나 주택가 골목 등)에 들어서서 흰색 벽은 고사하고 창문도 없는 건물에서 전시를 여는가 하면, 반지하도 버젓한 미술공간으로서 관객을 맞았다. 그래서인지 “전시 감상에는 어김없이 그곳에 도착하는 길에 보았던 풍경이 스몄고, 건물과 전시장의 상태 또한 괄호 치기 할 수 없었다.”(14쪽)
공간을 운영한 창작자들은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창작의 성격, 작업 과정 등에 관심을 기울이며 서로를 공간에 초대했고, 관객들은 대가 없이 성실하게 감상평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며 창작자와 신생공간을 응원했다. 느슨하지만 함께 있다는 감각은 신생공간이 버텨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기성 미술계가 저어해온 ‘애호와 동인’의 감각으로 움직이는 미술 세계가 형성된 것이다. 아무도 돈을 벌지 못했지만(않았지만), 흥성흥성한 분위기 속에서 젊은 작가들과 관객들은 짧지 않은 시기를 함께 보냈다.
기성 제도 또는 시장의 어떤 공백, 어떤 돌파구, 어떤 분출구였던 신생공간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는 얼마간 그때와 거리 두기를 할 수 있게 된 저자는 “뚜렷한 이해관계나 수익 구조 없이 무척 다른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무언가를 즐기는 사건은 지속되는 편이 더 수상할 것이다. 이 생태계 혹은 놀이의 참여자는 이 흐름이 언젠가 끝날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으면서, 끝이 있기 때문에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했다”(80쪽)고 회상한다.
심지어 물건조차 아닌 것이 사고 싶어지다
신생공간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가져가려는 듯 아트페어가 젊어지고 있지만, 저자는 이곳에서는 작품을 거의 사지 않는다. 신생공간에서 미술을 산 것은 단순히 취향의 계발, 안목의 증명이 아니라 누군가의 미술 활동을 응원하는 행위였다. 신생공간이 대부분 운영을 종료한 지금, 저자는 “미술이 아닌, 심지어 물건조차 아닌 것”을 사고 싶어 한다. “어쩌면 여유란 고가의 작품을 사들일 수 있는 능력이라기보다 중대한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동료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과 마음,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동료들을 이어줄 수 있는 통찰, 유해한 선례를 남기지 않도록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 같은 것”(122-123쪽)에 가깝다고 생각해서다.
그렇기에 #미술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있은 후 저자는 차곡차곡 쌓아둔 상자들 속에서 남길 것과 버릴 것, 잠시 가지고 있을 것 등을 분류했다.(98-105쪽)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창작자가 걸어온 시간과 동떨어진 사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떨어져 나온 것도 아니다. 저자는 여전히 자신의 비루한 공간 속에 쌓여 있는 미술 사물들을 보며 “새로운 연결”과 “의외의 만남, 의미심장한 사건, 예상치 못한 폭발적인 에너지”를 기다린다. 이 책은 한 개인의 소비 영수증이 어떤 세계의 연대기를 보여줄 수 있음을 어렴풋이 증명하며 동시대 미술사에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를 채워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