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단 한 번
나 신들처럼 살았으니, 그 이상은 필요치 않노라.”
하늘과 대지의 경계에서 조각난 계시의 언어들
분열된 세계를 넘어 다시 신과 하나 되는
신성한 도취의 시간
18~19세기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시선집 《생의 절반》이 읻다 시인선 15권으로 출간되었다. 횔덜린은 낭만주의 정신의 중핵에 있는 문인일 뿐 아니라 헤겔과 셸링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독일 관념론의 발전을 이끈 철학자이기도 하다. 긴 여행 중 불가사의한 정신착란을 겪은 뒤 반평생 탑 속에서 유폐에 가까운 삶을 살았으며, 생전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사후에는 니체, 릴케, 하이데거, 아도르노, 벤야민 등이 그를 독일 현대 시의 선구자로 재평가했다. 이 선집은 횔덜린이 생전에 발표한 시뿐만 아니라 광증이 발생한 이후 집필한 미완성의 파편들에 큰 비중을 두며, 그가 평생 남긴 300여 편의 글 가운데 65편을 선별하여 4부로 구성했다. 1부에는 고전주의적 형식을 갖춘 비가와 송가를 수록했고, 2부에는 정신착란 이후 집필한 찬가를, 3부에는 시, 번역, 철학적 에세이에 걸친 파편을, 4부에는 탑 속에서 쓴 말년의 작품을 모았다. 이를 통해 고전적 정형성이 차례로 해체되고 파편화되면서, 심연을 향해 기울어지며 침묵과 섞여드는 과정을 담아냈다.
목차
1부 · 완결작
2부 · 찬가
3부 · 파편
- 1장 · 찬가 파편들
- 2장 · 핀다로스 파편들
- 3장 · 시학-철학적 파편들
4부 · 메아리
주
옮긴이 해제 · 횔덜린의 작품, 그리고 절반의 생들
저자
프리드리히 횔덜린 (지은이), 박술 (옮긴이)
출판사리뷰
잠을 모르는 말로, 가득 채워진 잔으로
한밤에 찾아드는 성스러운 기억
“나는 매일 사라진 신성을 재차 소리쳐 불러야만 합니다.”
- 《횔덜린 서한집》 중에서
횔덜린이 청년기를 보낸 18세기 말은 독일의 근대를 이끈 시대정신인 계몽과 비판이 내적 갈등에 직면해 다채로운 모순과 혼돈을 낳던 시기였다. 근대 과학의 기계론적 방법과 근대 철학의 비판적 요구는 무신론과 아나키즘으로 이어지면서 도덕과 종교, 국가의 기반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을 맞닥뜨린 이성은 회의주의와 교조주의라는 딜레마 앞에서 당혹감에 빠졌다. 이성에 대한 믿음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예술의 형이상학적 의의를 앞세우는 낭만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던 젊은 횔덜린 역시 근대 철학이 낳은 주체와 대상, 이성과 계시 사이의 심연을 넘어설 필요를 느꼈으며, 종교적 세계관이 쇠락해가는 가운데 예술을 통해 인간과 세계, 인간성과 신성 사이의 근원적 분열을 극복하여 절대적 합일에 이르고자 했다. 그는 신들이 떠나버린 세계에서 신과 인간을 다시 연결하는 예언자의 책무를 시인에게 부여하며, 그가 노래하는 강렬한 신인합일의 순간은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정신을 대표적으로 예시한다.
1부는 젊은 횔덜린이 괴테와 실러의 영향 아래서 고전주의 시의 정형적인 리듬과 구조를 익히던 시기의 작품을 묶었다. 대표작인 비가 「빵과 포도주」는 밤과 도취라는 현상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 신화의 세계와 그리스도교의 세계를 아우르는 역사철학적 구상을 시도한다. 태고적에 신들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 분리되지 않았으나,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신을 담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신들은 인간의 세상에서 탈주하고 말았다. 이처럼 황량한 현재 속에서 신과 인간이 하나였던 오랜 과거를 기억하는 마지막 존재, 신을 다시 담을 수 있는 예외적 존재는 곧 시인이다. 이 시에서 횔덜린은 시인에게 찾아드는 강렬한 영감과 도취의 순간을 포착하며, 세상이 모두 잠든 밤의 시간에 피어오르는 강력하고 원초적인 합일의 힘을 그려낸다.
아폴론의 내려침, 그리고 부서지는 계시의 언어
“우리는 하나의 문자, 해석도 없고
고통도 없어, 그동안
낯선 땅에서 거의 말을 잃었네.”
- 「므네모쉬네」 중에서
1802년 프랑스에서 알프스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수천 킬로미터의 여행 중에 횔덜린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최초의 착란을 경험하며,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아폴론 신이 나를 내리쳤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광증 이후에도 그의 작시 능력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변화와 발전을 보인다. 《생의 절반》 2부 이후는 이 광증이 발생한 뒤에 쓰인 글을 담고 있다. 19세기까지도 횔덜린의 시는 정신질환을 이유로 무가치한 것이라 폄하되었으나, 20세기 초에 작품이 재평가되면서 광기는 그가 얻은 계시력의 대가로 읽히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하늘과 대지의 경계에 선 전달자라는 시인의 운명을 노래한 「마치 축일을 맞이하여…」와 같은 시는 여행 중의 체험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작품에 따르면 시인의 과제는 천상의 번개, 즉 “아버지가 내리는 빛의 줄기”를 포착하고 그 빛을 노래 안에 감추어 인간에게 “천상의 은총을 넘겨주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신을 보려는 열망으로 인해 벼락을 맞은 세멜레의 신화가 암시하듯 위험천만한 일이다. 시는 진리를 누설한 대가로 찾아올 파멸에 대한 어두운 예감으로 끝나며, 완결되지 못한 파편으로 남게 된다.
비탄 없는 완전함을 찾아서
고대의 시편과 당대의 철학을 잇는 시적 여정
“[횔덜린의 번역에서] 언어의 조화는 너무도 심원하여, 의미는 마치 에올리언 하프가 바람에 스치듯 언어에 스칠뿐이다.”
- 발터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생의 절반》 3부에는 고전 번역 및 철학적 에세이 또한 수록했다. 횔덜린은 생전 소포클레스와 핀다로스 등 그리스 고전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이를 문학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고, 발터 벤야민은 그의 번역을 문학 번역의 이상적 전범으로 삼은 바 있다. 그런데 횔덜린은 핀다로스의 찬가 파편을 옮기면서 번역문에 산문을 덧붙여 번역과 창작을 조합한 독특한 장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들 글은 그리스 신화의 세계를 흐릿한 배경으로 삼으며 번역이 새로운 사유로 이어질 가능성을 실험한다. 또한 횔덜린은 대학 시절의 동학인 헤겔, 셸링이 독일 관념론의 대표 사상가로 성장하는 데 토양을 제공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3부에 실린 횔덜린의 철학적 파편은 칸트 이후의 관념론이 천착한 주체와 객체의 분열과 합일 문제를 논하며 이 사실을 예증해 보인다.
탑 속에 유폐된 채 흘려보낸 ‘생의 절반’
‘아폴론의 내려침’을 겪은 지 몇 년 뒤 광증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횔덜린은 6평 남짓한 작은 탑에 갇혀 지내게 되었고, 그 안에서 36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탑 속에서도 수없이 많은 시편을 남겼으나 당시에는 정신질환자의 글로만 인식되었기에 대부분 폐기되었다. 그러나 우연히 살아남은 48편이 글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4부는 이 가운데 일부를 엮었다. 이 시기 횔덜린은 대상을 붙드는 법을 잊은 채 신화적 세계 속에서 심상들 사이의 오솔길을 자유롭게 오고간다. 나아가 자신의 이름조차 거부하며 ‘스카르다넬리’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름과 백여 년을 넘나드는 날짜로 서명을 남긴다. 이들 시는 1인칭과 2인칭, 과거 시제와 미래 시제 없이 오직 3인칭 현재 시제로만 쓰였으며, 그 안에는 특정 인물도, 어떤 신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파편들은 주체도 대상도, 이름도, 시간의 선형적 흐름도 없는 영원 속에서 오직 다시 돌아오는 계절만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