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17,820 19,800
제조사
부키
원산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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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표적 산업도시 울산에 관한 종합 보고서이자
제조업의 현실과 성장 동력을 잃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관한 날카로운 고찰!

‘대한민국의 산업 수도, 지역내총생산 전국 1위의 부자 도시, 중산층 노동자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도시. 지난 60여 년간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산업도시가 바로 울산이다.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는 제조업 위기론 속 울산이 직면한 딜레마에서 출발해 4차 산업혁명과 기후 위기라는 퍼펙트 스톰을 마주한 주식회사 대한민국호의 앞날을 논쟁적으로 살펴보는 대담한 기획이다.

2019년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로 ‘조선소 출신 산업사회학자’로 주목받으며 한국사회학회 학술상과 한국출판문화상 교양 부문을 수상한 양승훈의 5년 만의 신작. 화두는 울산-제조업-대한민국으로 확장되었고, 이로써 치열한 논쟁의 장이 열리길 희망한다.

목차

프롤로그: 산업도시 울산, 어디로 가는가
1부 울산은 어떻게 산업 수도가 되었나
1장 산업도시 울산, 기로에 서다
2장 미라클 울산, 울산 산업 60년 약사
2부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 박동이 꺼져 간다
3장 한국 경제의 특수성과 제조업
4장 제조업 발전의 중심에서 말단 생산기지로 추락하는 울산
5장 울산 노동자가 국민의 눈에서 사라진 이유
6장 정규직을 뽑지 않는 엔지니어의 공장
7장 생산성 동맹의 파열, 하청 구조로 연명하는 울산
3부 산업 가부장제의 그림자와 중산층의 꿈
8장 청년이 떠나는 생산도시
9장 생산 도시를 기피하는 여성
10장 노동자 중산층 사회의 꿈은 폐기해도 좋은가
4부 산업도시와 대한민국의 미래
11장 디트로이트와 피츠버그, 두 도시 이야기
12장 RE100과 굴뚝 산업의 미래
13장 메가시티론, 무엇이 문제인가
14장 생산도시와 대한민국의 미래
에필로그: 다시, 산업도시 울산의 꿈을 위하여
부록: 연구조사 방법론 및 연구 참여자
감사의 말

저자

양승훈 (지은이)

출판사리뷰

“이 도시를 보라”
대한민국호의 성장 엔진이 꺼져 가는 이유

울산, 한반도의 동남쪽 해안가에 위치한 이 공업도시에는 ‘대한민국의 산업 수도, 중산층 노동자 도시’라는 여러 수식어가 붙어 있다. 울산은 지난 60여 년간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산업도시다. 그런데 이 도시에 쇠락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구 115만의 울산은 여전히 외형적으로는 지역내총생산(GRDP) 전국 1위의 부자 도시이고, 수출액 기준으로 경기도와 충청남도에 이어 전국 3위의 광역시이지만, 도시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 오래다. 울산은 청년층 신규 고용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장년 노동자, 퇴직자 중심의 늙은 도시가 되었다. 지역 대학은 자동차, 조선, 중화학 등 울산 3대 산업을 뒷받침할 인재 공급처 역할을 못 하고 힘을 잃고 있으며, 기술 혁신의 주역인 연구소와 엔지니어링 센터는 일찌감치 천안 이북의 수도권으로 떠났다. 또 청년과 여성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인구 감소에 직면했다. 4차 산업혁명, 기후 위기, 그린뉴딜이라는 퍼펙트 스톰이 몰려오는데, 전통 제조업을 가진 울산이 어떤 대책과 해법을 찾아야 할지 지자체, 지역 주민, 대기업, 하청과 부품 업체의 이해관계가 저마다 다르다.

기후 위기가 울산 3대 산업에 기회가 됐지만 산업 고도화와 신사업 진출의 전망을 열어 주지 않고 있다. 친환경 전기차와 수소경제는 현대자동차에 기회를 주지만 울산의 자동차 부품 생태계는 이에 대응하기에 취약한 상태이고 개선책도 뚜렷하지 않다. 자동차 부품 업계가 고용하는 5만 개의 일자리는 곧 위기에 노출될 공산이 크다. 탈탄소 전환을 요구하는 IMO의 규제는 조선 업계에 선박 수주의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고착된 노동 시장 이중 구조로 인한 원하청 간 임금 격차와 불황기의 임금 하락 문제를 풀지 못하면서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친환경 자동차 생태계에 필요한 정밀화학의 전환 역시 정책 역량과 기존 석유화학 산업의 보수성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345쪽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는 ‘대한민국 산업 수도’ 울산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며 미래를 모색하는 책이다. 울산의 산업 구조와 노동 시장, 사회적 관계를 면밀하게 분석하는 목적은 제조업과 수출을 기둥으로 성장해 온 한국 경제에 닥친 위기의 본질을 살피고 종합하여 대안을 모색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울산이라는 대표적 산업도시에 관한 종합 보고서인 동시에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저물어 가는 산업’으로 치부되는 제조업의 현실과 성장 동력을 잃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관한 고찰이다. 저자 양승훈은 2019년 조선소에서 5년간 일하며 관찰했던 경험을 토대로 산업도시 거제와 조선 산업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내놓았다. 이 책으로 산업 현장의 경험을 겸비한 ‘조선소 출신 산업 사회학자’로 주목받았고, 이듬해 한국사회학회 학술상과 한국출판문화상 교양 부문을 수상했다. 5년 만에 출간하는 이번 책은 거제에서 울산으로, 울산에서 대한민국으로 논의를 확장했다. 이는 단순히 공간 지리적인 확장에 그치지 않는다. 제조업 국가 한국이 현재 직면한 곤혹스러운 질문을 에두르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다.

미라클 울산,
모두의 정성과 노력이 모인 ‘좋았던’ 시절

책의 1부는 울산이 그간 어떻게 산업 수도로 급부상했는지, 울산의 60년간 산업 역사를 돌아본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1962년 1월 13일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하고, 같은 달 27일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결정 공포했다. 2월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거행했다. 6월엔 울산군 울산읍,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청량면 두왕리, 범서면 무거리와 다운리, 농소면 송정리와 화봉리를 통합해 울산시 승격을 발표했다. 이후 뒤에서 다룰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진출하여 지금의 울산 3대 산업을 구성했다. 이러한 서사를 단순하게 이해하면 산업도시 울산의 형성이 박정희와 현대그룹이 이룬 성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근대적 산업도시 울산은 일제 강점기 혹은 그 이전부터 누적된 경로 의존과 다양한 우여곡절 속에서 탄생했다. 산업도시 울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케다 스케타다라는 인물과 제국주의 일본의 대단위 병참기지 건설 계획을 만나게 된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해 산업도시 울산을 구상하도록 했던 선구자는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라는 사람이다. 이케다는 부산 지역에서 1920~1930년대 개발 사업을 했던 인물이다. 헌병 중사 출신이라는 특별하지 않은 이력에도 동양척식회사와 정군관政軍官계와의 인연으로 빠르게 사업의 규모를 확장했다. (…) 1942년 12월, 울산개발계획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최종적으로 허가받았다. 1943년 5월 11일, 지금의 학성공원에서 기공식이 거행됐다. 이처럼 울산은 이케다에 의해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을 위한 공업 도시이자 석유 비축기지로서 설계됐다. 울산은 ‘공업항, 어항, 연락항, 무역항, 공항’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분류됐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엮으면 일본의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울산의 역할이 중시됐음을 알 수 있다. (…) 이케다 스케타다의 산업도시 계획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면서 70퍼센트 완공 단계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일제가 구상했던 석유 비축기지이자 정유 공장의 흔적은 결국 산업도시 울산의 경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 48쪽

1962년 대한석유공사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울산 정유 공장의 복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어 1970년대에는 현대중공업의 조선소 설립이 이루어지는데, 정주영 회장이 1970년 12월 그리스 리바노스사로부터 유조선 2척 선박 수주를 먼저 따내고, 부지 조성(1971년 4월), 조선소 기공식(1972년 3월)이 그 뒤에 진행된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현대자동차의 울산공장 준공은 이보다 뒤인 1975년의 일이다. 수출주도 산업인 울산의 3대 산업은 1990년대에 들어 큰 호황을 맞는다. 조선 산업은 10년 초호황기 슈퍼사이클에 들어섰고 현대자동차는 2000년대에 오면서 ‘생산량 기준 글로벌 Top 5’로 올라섰다. 이후 2017년 서울에 1위를 빼앗기기 전까지 울산은 근 20년 동안 한국에서 일인당 GRDP 1위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울산의 호시절이었다.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울산의 역사를 미라클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연과 필연, 기획자와 실행자 모두의 노력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석유 비축을 위한 기지로 출발해, 그 밑천으로 정유 공장을 짓기 위해 군사정부와 기업가들의 고려로 공업센터로 지정됐다. 눈이 밝은 정부의 기술관료가 중화학 요충지로 울산을 꼽았다. 그렇지만 그걸 실제로 실행했던 1970년대의 모험 자본가 정주영의 현대가 있었고, 잠을 설치면서 눈썰미를 가지고 도면과 기술을 베껴 오던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저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안전 요건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며 배를 짓고 자동차를 만들어 냈던 울산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만화 《드래곤볼》의 원기옥처럼 모두의 정성이 모여 노동자 도시이자 부자 동네 울산의 기적을 써낸 것이다. - 68쪽

지식 기반 경제 시대의 도래,
제조업 강국의 깃발은 내려도 좋은 것일까

울산의 위기가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호황의 한복판을 거치며 내부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석유화학 산업은 국제 수급 사이클이 바뀔 때마다 수익이 출렁였고, 자동차는 1998년의 대규모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 충돌을 비롯해 크고 작은 분규에 휩싸였으며, 호황기가 끝난 조선 산업은 2010년대에 들어서 구조조정에 직면했다. 이를 전후로 제조업 전반에 대한 위기감이 우리 사회에 퍼져 나갔다. 이 책의 2부는 울산과 한국 경제가 처한 제조업 위기론의 심층 분석이다. ‘제조업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으니 지식 기반 경제로 이행해야 한다’는 진단은 과연 적절하고 타당한가? 이제 한국은 제조업 강국의 깃발을 내려도 괜찮은 시점일까? 울산과 같은 산업도시의 쇠퇴를 방치하고서도 한국은 기후 위기와 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퍼펙트 스톰’을 뚫고 새로운 활로를 찾아 나아갈 수 있을까? 이런 무거운 질문에 대해 우선 저자는 한국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부터 다시 환기시킨다. 한국은 제조업으로 지탱되는 국가다. 제조업 세계 5대 강국일 뿐 아니라 국민총생산의 27.1퍼센트를 제조업을 통해 번다(2020년 기준). GDP 중 제조업 비중이 한국보다 높은 국가는 아일랜드밖에 없다. 고용 관점에서 보아도 한국은 총 고용에서 제조업의 비중이 25퍼센트로 OECD 국가 중 독일(27%)과 이탈리아(26%) 다음이다(2019년 기준).

서울이나 분당, 일산 같은 수도권 신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공장이 어디에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지천이 공업 지대다.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수원, 평택으로 시작하는 산업 벨트가 나온다. 수도권의 상습 정체 구간으로 악명 높은 서부간선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독산, 소하, 시흥, 안양 모두가 공단 지역이다. 4호선 도시철도를 타고 남쪽으로 평촌만 지나면 곧 군포산업단지나 안산의 반월국가산업단지까지 공단 지대가 펼쳐진다. 1호선 경인선을 탄다면? 서울만 빠져나가면 부천에 거대한 산단이 있고, 인천에 도착하면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길에 쏟아져 나오는 남동공단과 부평 GM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 74쪽

더 중요한 것은 기술 혁신이 산업 현장과 동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저자는 한국의 성장 동력이었던 제조업을 방치하고서 기술 혁신을 논하는 허망함을 경계한다. ‘제조업의 위기’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되풀이되는 ‘탈추격 혁신 담론’만 봐도 그렇다. 이 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산업화 초부터 당시의 제조 선진국인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 도면을 베끼거나 완제품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원리를 익히는 역설계 방식으로 기술을 따라잡으며 이 자리까지 왔다. 그런데 한국의 제조업이 기본설계 역량이나 원천 기술이 없다 보니 여전히 양산을 위한 사고나 소재·부품·장비(일명 소부장) 하도급 업체를 쥐어짜는 방식으로만 산업을 영위하여 혁신의 한계에 부딪힌다. 이대로라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제조 선진국의 원천 기술을 따라잡지 못하고 중국을 위시한 개발도상국의 저렴한 원가 경쟁에 쫓기는 샌드위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창의적인 ‘최초의 질문’을 갖고 기본설계를 해내면서 ‘빠른 추격자fast-follower’에서 ‘최초의 선도자first mover’로 변화해야 한다는 충고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변하라’는 일견 공자님 말씀처럼 지당해 보이는 이 담론 역시 생각보다 현실성이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요컨대 경제지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제조업 경쟁력이나 혁신 문제에서 생산 과정, 산업과 기업 간 연결망,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제조업의 중요성을 결합해서 사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포스코, 현대중공업 등의 제조 대기업은 ‘최초의 질문’과 함께 세계 시장에서 이미 ‘최초의 선도자’ 위치에 서 있다. 당연히 기본설계도 수행할 수 있다. 심지어 최초의 선도자 기업에 소부장을 제공하는 기업들 중 1차 협력 업체의 역량도 점차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연구개발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대한민국의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도 세계 1등이다. 제조 대기업이 주도하는 경제에서 그들의 경쟁력 자체는 문제없으므로 문제제기의 방향이 틀릴 때가 많다. - 80쪽

R&D 투자율 1위 국가인 한국이 20년이 다 가도록 앵무새처럼 혁신과 선도 담론만 되뇌며 여전히 위기론을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 문제를 내부 구조에서부터 파악해야 한다. 울산-제조업-대한민국은 세포-조직-인체처럼 상호 유기적 관계망 속에서 파악해야 비로소 총체적 진단이 가능하다. 이것이 울산을 제조업이나 한국 경제 전반과의 산업 연관관계 및 공간 지리적 분업 구조를 통해 살펴보는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울산의 딜레마,
공간 분업과 생산성 동맹의 와해

산업 현장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 관찰하면 울산과 한국 제조업이 위기에 빠진 여러 원인이 있지만 저자는 이를 크게 ‘노동의 공간 분업과 생산성 동맹의 와해’로 압축한다.

그런데 1990년대를 지나면서 두 가지 층위에서 구상과 실행의 지리적 분리를 추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선 제조 대기업은 적대적 노사관계 때문에 파업이나 다양한 쟁의에서도 생산량과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의 숙련에 의존하지 않는 체제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5장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1987년 이후 노사관계가 적대적으로 흐르면서 기업은 노동자와 엔지니어가 현장에서 협업하기보다, 엔지니어가 현장에서 노동자와 일상을 공유하지 않는 생산방식을 채택했다. (…) 현대자동차는 점차 IT 기반 공정 관리 기술과 NC가공 기계 도입을 극대화하여 자동화를 촉진시키고 로봇 도입을 진행했다. 노동자가 반복 작업을 덜 맡아 개개인은 편했지만 현장에서 노동자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른바 ‘숙련 절약형 혁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 101쪽

‘공간 분업’은 산업혁명 중심지였던 영국의 여러 도시에서 관찰된다. 일례로 근대 방직 산업과 기계 산업의 메카였던 영국 맨체스터 지역에는 원래 공장과 설계실이 함께 있었지만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본사와 설계실이 분리되어 금융과 정치의 중심인 런던으로 향했다. 1970~1980년대의 불황과 마거릿 대처 시절의 강경한 노조 정책을 거치며 맨체스터의 공장은 점차 쇠퇴했고 본사에서는 생산 거점을 인건비가 싼 아시아나 아프리카, 인도 등으로 옮겼다. 런던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는 전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오직 최적의 이윤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구상을 세웠으나 모공장인 맨체스터 공장은 그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와 유사한 일이 시차를 두고 울산에서도 재현되었다. 더구나 그 근저에는 노사의 뿌리 깊은 상호 불신이 자리 잡았다. 요컨대 미라클 울산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기업인, 관료, 엔지니어, 노동자, 지역민들 간 ‘생산성 동맹’이 와해된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자동차, 좀 더 넓게는 한국의 제조 업체는 II 유형으로 생산방식이 구성됐다. 노사 간 극도의 불신이 생산직을 배제한 채 엔지니어링에 기반을 둔 혁신을 강제한 것이다. 요컨대 모듈화, 자동화, 정보통신기술의 도입 등이 노동자를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됐다. 모듈화를 통해 싼 하청 업체의 노동력으로 인건비를 절감하고, 자동화를 통해 노동자의 숙련을 높이기보다는 단조로운 작업 커뮤니케이션만 높이는 방식으로 생산기술의 혁신이 주도된 것이다. - 161쪽

수 차례의 강도 높은 노사 대결은 양측에 커다란 트라우마를 안기며 결과적으로 담합적 노사관계를 형성했다. 이 담합으로 울산의 대기업 노조는 높은 임금과 복리후생, 고용 안정을 얻었지만 미래 자녀 세대의 신규 고용을 잃었고, 회사는 분규를 줄였지만 노동자를 생산성 향상 파트너에서 배제하는 기조를 본격화했다. 언제부터인가 대기업 노조가 국민의 신망을 잃기 시작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울산 노동자들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할 때나, 그 이후 1991년 골리앗 투쟁을 할 때만 해도 회사와 정부와 보수언론이 비난하더라도 노동자를 지지하는 우군이 사회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를 지나면서 현대자동차를 위시한 울산 대기업 노동자의 파업에 더 이상 연대의 시선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 126쪽

결과적으로 2000년대 들어 울산의 노사는 각자의 입장에서 분주히 살길을 찾았으나 그 결과로 남은 것은 생산성 동맹의 와해와 치열한 각자도생의 싸움뿐이다. 영국 맨체스터가 겪었던 쇠락의 길을 울산이 답습하고 있는 셈이다.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
기후 위기와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까지

그렇다면 울산과 한국 제조업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공간 분업과 생산성 동맹 와해, 인구 감소라는 삼중고 트릴레마 속에 영국의 맨체스터나 글래스고, 스웨덴 말뫼 등의 도시가 걸었던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저자는 해외의 여러 선발 사례들을 검토한다. 세계 최대 자동차 도시였던 디트로이트와 1970년대까지 철강 도시로 명성을 떨치던 도시 피츠버그의 사례는 흥미롭다.
GM(제너럴 모터스), 포드, 크라이슬러까지 3개 자동차 회사가 있었던 디트로이트는 1950년대에 인구 150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고, 1970년대부터 일본 자동차에 밀려 고전하다가 2009년 GM의 파산까지 겪으며 쇠락했다. 피츠버그는 철강 산업 패권을 일본(일본제철)과 한국(포스코)에게 차례로 넘겨주게 되자 1985년 기업, 시 정부, 대학 등이 함께 참여해 산업의 다각화를 위한 보고서 ‘전략 21’을 제출하고 기업의 본사와 금융, 보건 의료와 교육, 첨단 연구개발 중심지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을 채택했다. 덕택에 생산직 일자리 대신에 서비스 산업과 하이테크 부문의 일자리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도시 재활성화를 40년가량 진행한 지금 피츠버그의 인구는 감소했고, 도시 전체 관점에서 인종 분리와 소득 격차는 더욱 심해졌으며, ‘노동 계급 중산층’ 모델의 해체를 막지 못했다. 반면에 디트로이트는 지금도 생산직 비율이 20퍼센트를 넘길 정도로 노동자의 기존 일자리를 지켜냈다. 하지만 세수 감소로 도시 재개발과 적절한 재구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도심이 슬럼화됐다.

디트로이트와 피츠버그의 사례가 울산에 주는 함의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주력 제조업의 위기 상황을 전환의 관점에서 적극 대응하지 않을 경우 도시 자체가 쇠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생산기지로서의 입지가 약화되는 상황일 때 재정 문제를 겪으면서 적극적으로 도시 전환에 나서지 못하고 슬럼화와 인구 유출을 겪게 됐다. 다른 하나는 도시를 고도화하더라도 단단한 중산층을 육성할 수 있는 제조업 일자리는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이다. (…) 3대 산업이 여전히 건재한 울산에서는 울산의 현 위치에서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즉 세계 1위 조선소, 세계 최대 규모의 양산이 가능한 자동차 공장, 여전히 견고한 석유화학 콤비나트가 만들어 내는 역동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304쪽

저자는 해외 선발 산업도시의 과거 사례를 넘어 앞으로 다가올 RE100, 수소경제, 기후 위기 등 새로운 글로벌 환경 변화가 울산 3대 산업과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력을 폭넓게 검토한다. 국토 균형발전의 관점에서 부산, 울산, 경남의 3개 광역을 연결하고 통합하여 수도권 쏠림에 대응하자는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 역시 신중하게 필요성을 따져 본다. 이 책의 4부는 이처럼 한국의 산업도시들과 우리나라 제조업의 앞날, 대한민국호의 미래 비전까지 당면한 과제를 시공을 넘나들며 살펴본다.

맨체스터가 일방적 쇠락, 디트로이트와 피츠버그가 하나를 얻지만 다른 하나를 잃는 저진로 전략이라면 저자는 울산과 한국 산업도시들의 ‘고진로 전략high-road strategy’을 제안한다. 최근 진행되는 미국의 제조업 부활 정책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제조업 고용 비중이 1979년 22퍼센트에서 2019년 9퍼센트까지 하락한 미국은 정리해고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숙련 노동자가 현장을 떠나면서 생산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기업은 그럴수록 노동자를 훈련시키기보다는 자동화 설비 등 생산 기술에 대한 투자를 늘려 해결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었고 산업도시가 모인 중서부 러스트 벨트는 노동자 정리해고와 공장 철수로 황폐화되었다.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은 제조업을 부활시키며 첨단 산업의 성과를 연계시키는 전략으로 기조를 바꾸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오바마 정부와 민주당 및 학계는 ‘제조업 재활성화Remaking America, Revitalization of the US manufacturing’를 목표로 하는 다양한 정책을 진행했다. 해외로 나간 공장을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며 국내로 복귀시키는 리쇼어링reshoring도 시작했다. 제조업의 중요성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조업은 가장 많은 이들에게 고임금을 제공할 수 있는 산업이고, 소수 민족과 저소득층으로 하여금 사회적 계층 상승(이동성)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안정적 산업이다. (…) 더불어 첨단 산업에 기대하는 혁신 역시 제조업의 연구개발과 생산 과정을 제외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 - 373쪽

울산의 고진로 전략은 먼저 울산이 가진 현재의 산업, 기술적 역량을 면밀하게 재평가하여 지속 가능한 제조업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것이 바탕이다. 고진로 전략은 생산성 동맹의 복원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노동자는 높은 임금과 복리후생을 보장받고, 기업은 생산성과 혁신 역량을 보장받는 사회적 합의에 기반을 둔 산업 전략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본과 노동 차원을 넘는 지역과 정부의 역할도 요구된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 연구와 생산의 분리라는 공간 분업의 문제를 국토 균형 발전 및 제조업 부흥의 관점에서 정부와 지자체가 재검토하고 지원책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적 이해관계를 넘어 정부와 지자체, 대자본과 노동조합 등 모든 주체가 국가의 미래와 산업 전망을 함께 논의하는 정치적 거버넌스의 형성이 필수이다.

21세기 기후 위기·4차 산업혁명이라는 글로벌 수준의 전환과 저출생 고령화 및 지역 소멸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 미증유의 재생산 위기 속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제조업·에너지·국토계획의 전환에 대한 열린 토론의 장이 펼쳐지길 희망한다. - 417쪽

노동자 중산층의 꿈과 산업 가부장제의 그늘,
청년이 희망을 잃는 도시 혹은 나라에 대한 진단

워낙 방대한 주제와 첨예한 논쟁거리를 가득 담은 책이기에 보도자료에서는 주로 산업사회학, 노동사회학적 논의에 초점을 두고 소개했지만,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는 젠더, 계층 이동 사다리, 지방 소멸 등 정통 사회학 고유의 주제를 중심으로 읽어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시한다. 사회적 갈등은 구체적인 역사와 경로, 살아 숨쉬는 이해당사자들의 대립에서 발생하는데 이 구체성을 선명히 부각시킨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한 예로 책에서 울산 쇠퇴의 한 이유이자 지난 고도 성장 시대의 그늘로 지적하는 ‘산업 가부장제’의 문제를 살펴보자. 산업 가부장제는 특정 산업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의 불균등한 성별 분업 구조가 만들어 내는 가부장제를 의미한다. 울산은 생산직 노동자 외벌이로도 중산층 수준의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노동자 중산층’의 꿈을 실현한 도시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전 경로에서 울산은 산업 가부장인 아버지들의 일자리는 지켰지만 역설적으로 그 자녀들이 들어갈 일자리는 사라졌으며, 최근 10년간 여성 고용률은 전국 최저 수준을 맴돌았다. 일반적인 가부장제의 기준으로 볼 때 보수 정서가 강하다는 대구 경북보다 여성의 노동 시장 진입에 더 냉담했던 도시가 울산이다. 많은 공단을 주축으로 짧은 역사 속에 고도성장을 이루며 가정과 사회의 급속한 변화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산업 가부장제에 관한 저자의 논의는 젠더와 계급 계층 갈등에 대해 현실에 기반해 이해하도록 한다.

대학은 또 어떠한가. 세계적 수준의 3대 산업이 포진한 유리한 환경이지만, 산학연 협동의 모델이 될 수도 있었을 울산의 대학들은 정규직을 뽑지 않는 지역 노동 시장과 거의 대부분의 R&D 연구소가 천안 분계선 너머에 존재하는 현실에서 지방대학의 한계에 갇히고 만다. 대학을 바탕으로 주 정부의 지원과 벤처 캐피털이 결합해 첨단 산업의 성장을 선도한 실리콘밸리와 극명히 대조되는 사례이다. KTX로 두 시간이면 닿을 좁은 국토 안에서 지방 소멸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청년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여성이 떠나는 도시는 좀 더 의미를 확장해 보면 오늘의 한국에 대한 진단이기도 하다. 각자는 열심히 달려왔는데 결과적으로 모두가 힘든 현실을 우리는 언제까지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 아버지가 젊은 시절 울산 용접공이었고 자신도 대학 졸업 후 조선소에서 일했던 저자는 “평범한 노동자도 중산층이 될 수 있는 사회의 꿈을 포기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울산이라는 한 산업도시에서 출발해 각자도생의 늪에 빠진 대한민국의 현실과 과제를 묵직하게 파고드는 이 문제적 저작에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상품필수 정보

도서명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저자/출판사
양승훈 (지은이),부키
크기/전자책용량
147*219*20mm
쪽수
432쪽
제품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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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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