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금, 왜 ‘하녀’인가?
젠더화된 빈곤, 배제와 낙인의 문법
21세기에도 하녀의 삶은 계속된다
2003년 비평활동을 시작한 이래 여성과 노동자, 하위자에 대해 꾸준히 의미 있는 글을 써온 소영현이 이번에는 ‘하녀’에 주목한다. 신문기사부터 문학작품까지 심층 아카이빙을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존재해온 하녀를 다각도로 조망하고 그들의 면면을 연대기처럼 읽어낸다. 가부장제와 계층 문제뿐 아니라 섹슈얼리티, 근대화, 감정노동 및 그림자노동까지 꼼꼼히 살펴 그동안 배제되고 낙인 찍혀온 하녀의 존재를 제대로 마주보게 하고 21세기에도 또다른 이름으로 계속되는 ‘하녀’의 삶을 밝힌다.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하녀는 현존한다. 부와 가난은 대물림되고 자본의 힘이 계급 위계와 결합해 새로운 신분체계가 구축되어간다. 베이비시터, 요양보호사, 등하원도우미 등 가사노동과 돌봄노동, 간병노동을 도맡은 이들은 봉건적 신분제와 근대 계급사회의 최하층에 놓인 존재였던 하녀의 변주일 뿐이다. 케케묵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닌,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오늘도 “네네, 고객님”을 연발하고 직업적 웃음을 짓는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하녀일지도 모른다. 소영현은 비평가이자 사회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가늠해보려 ‘하녀’라는 주제를 파고들었다. 진지한 사유와 탄탄한 문장, 그리고 꼼꼼한 아카이빙을 통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하녀의 본모습을 보여준다.
하녀의 등장과 규정의 변화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하는 작업은 가능하며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변화를 들여다보는 일은 불가능하며 불필요하기도 하다. 식민지 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전후, 한국전쟁기, 1960~1970년대 한국사회에서도 특별한 소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여성이 잠정적으로 ‘하녀’였으며, ‘하녀’가 될 위험에 아니 그럴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녀는 신분 해방이 이루어진 시대의 현대판 노예에 다름아니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대개 ‘피할 수 없는 사회 환경’ 때문에 ‘인간 이하의 생활’로 내몰렸다는 점이다. _50~51쪽
목차
프롤로그. 하녀, 이름 없는 여자들의 삶
1부. 그녀들은 누구인가: 하녀들의 위상학
1장. 지금 왜 ‘하녀’인가
2장. ‘하녀’는 누구인가
3장. 가사노동에서 감정노동까지, 하녀의 일
4장. 젠더화된 빈곤: 그녀들은 어떻게 하녀가 되었나
2부. ‘직업부인’과 ‘오모니’: 여성, 노동 직업
1장. ‘직업부인’의 등장
2장. ‘행랑어멈’ ‘안잠자기’ ‘드난살이’: 직업으로서의 남의집살이
3장. ‘오모니’ 전성시대
4장. ‘직업부인’의 모성은 보호되어야 한다?
3부. 하녀학교부터 그림자노동까지: 자본, 노동, 젠더
1장. 하녀학교에서 식모폐지론까지
2장. 주부와 하녀의 위치
3장. 가정이냐 직장이냐
4장. 그림자노동과 행복한 하녀
4부. 하녀는 위험하다?: 범죄, 관리론, 욕망
1장. 하녀 범죄, 재조사가 필요하다
2장. 하녀 관리론과 감정통제 메커니즘
3장. 남편을 죽인 여자들
4장. 촌부, 욕망, 노동
5장. 하녀 살인 사건
5부. 하녀는 사라지지 않는다: 돌봄노동, 빈곤, 빈민
1장. 태금이는 왜 미친년이 되었나
2장. 반복되는 역사, 이촌향도
3장. 근대화의 시차, 심리적 도시화
4장. 빈곤과 빈민의 재배치
5장. 식모의 섹슈얼리티
에필로그. 변화하되 진화하지 못한 하녀사회
주
저자
소영현 (지은이)
출판사리뷰
유모, 식모, 행랑어멈, 오모니, 드난살이, 남의집살이
도시 빈민, 감정노동, 돌봄노동, 그림자노동
어디든 있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녀들을 위한 명명식
유모, 침모, 식모, 행랑어멈, 오모니, 드난살이…… 가정에서 가사일과 각종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 여성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법률적으로는 신분제가 해체됐지만 근대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서 하녀의 위상을 가진 여성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신분사회적 성격은 역설적으로 더 강화되고 있다.
잊을 만하면 ‘갑질 논란’이나 ‘특권 논란’이 불거진다. 은밀하게 공고해지는 ‘신분사회’의 위계구조 속에서 하녀처럼 살아가는 이들은 여전히 넘쳐난다. 하녀는 육체활동 외에 다른 것으로 손쉽게 대체될 수 없는 영역을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떠맡아왔다. 다양한 연구와 신문기사, 김동인·염상섭·공지영·황정은 등의 소설을 통해 소영현은 우리 사회가 가진 하녀에 대한 인식과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빈곤한 여성의 참혹한 삶은 반복적으로 목격된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나 밤 늦을 때까지 쉼없이 불려다니고. 때때로 음식보다 단잠을 더 그리워할 정도로 고단하게 살아간다. 계약을 맺고 고용되긴 하지만 주인 쪽에서 이런저런 누명을 씌워 헌신짝처럼 내보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기에 불합리한 명령에도 불복할 수가 없다.
가정에서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뿐 아니라 감정노동까지 도맡은 하녀의 노동을 단순히 하층계급이기에 겪는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되어온 과정뿐 아니라 근대와 탈근대 혹은 초근대 사회가 되어도 변할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노동’의 의미를 고민해본다.
“어멈노릇이란 말할 수 없이 고되답니다. 하루종일 한번 앉아보지도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게다가 산더미 같은 빨래나 종일 하고 나면 전신만신은 맥이 풀려 송장같이 되고 만답니다. 그런데다가 그 보수라고는 불과 3원 혹은 4원인데 그야말로 인심 좋은 집을 만나야 5원가량밖에 안된답니다.
얻어먹는다는 것이 보수 중에 일부분이지마는 먹는 것이라고는 대개 주인이나 손님이 먹다가 남은 것 그중에도 좀 웬만한 것은 다 치워버리고 거진 개돼지 밥에 들어갈 만한 것들이나 어멈들 차지가 되고 만답니다. 처음에는 어떤 고생이라도 참고 돈이나 모아가지고 다시 정든 고향으로 가서 잘 살아보리라 하였더니 사실상 7년을 지내고 보니 손에 처진 것은 쓰린 눈물밖에는 모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답니다.”(동아일보, 1928년 3월 3일자) _42쪽
살인, 절도, 불륜…… ‘잠재적 범죄자’
욕망하는 여자, 하녀는 위험하다?
하녀는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됐다. 일부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고, 일부는 소문, 일부는 과장이었는데 그 와중에 맥락은 삭제되고 낙인은 강화되기 일쑤였다. 하녀에게는 요부나 도둑 내지 ‘믿을 수 없는 것’ ‘꾀부리는 것’ ‘더러운 것’ 같은 꼬리표가 늘 붙어다녔다.
소영현은 옷가지나 푼돈을 훔치는 절도부터 신세를 비관한 자살, 심각한 범죄로 분류된 영아 살해 사건까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다양한 사건의 전모를 파고든다. 그 과정에서 하녀에게 붙은 낙인이 빈곤과 욕망이 뒤섞인 결과임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하녀의 임신중지와 영아 살해는 하녀 범죄의 대표적 죄목이었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을 조절하기 위해서, 혹은 가난이나 성폭력 등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살해를 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비정하고 표독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고 아이를 위하려는 모성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경우가 많았다.
정상 가족을 이루지 못한 미혼모가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불가능한 현실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가해자로서의 하녀’의 모습만 부각돼 ‘피해자로서의 하녀’의 모습이나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간과되었다.
『하녀』에서는 영화 [하녀]의 소재가 되었던 ‘식모 살인 사건’을 비롯해 [그때 변홍례]라는 연극으로 다뤄진 ‘부산 마리아 참살 사건’ 등을 통해 하녀 범죄를 변호한다. 그뿐만 아니라 당대 여성의 욕망을 읽어내고, 하위주체의 몸 특히 젠더화된 하위주체의 몸이 어떻게 산업화가 야기한 사회적 갈등과 충격의 완화장치로 활용되었는지를 두루 짚는다. 여성 범죄를 계급과 젠더 폭력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가해와 피해의 경계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다룸으로써 여전히 반복되는 여성을 향한 폭력의 구조까지 들여다본다.
사회적 문맥에서 ‘돌봄노동’을 담당하는 ‘하녀’는 전근대적이면서도 근대적이라는 복합적 위상을 가진 존재였다. 가정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존재였으며 대개 남성인 당대 작가들에게 가정을 파괴하거나 위협하는 존재로 재현되곤 했다.
물론 ‘하녀’ 중에 위험한 여성이 없지는 않았지만 범주로서의 하녀가 실질적인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는 감각은 사회 전체의 것이 아니라 특정 계층의 것이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1960년작 김기영의 영화 [하녀]가 보여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식민지기 ‘하녀’들이 가한 위협은 그녀들에게 가해진 폭력이나 인격모독의 크기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식민지기 ‘하녀’는 사회구조적 위계 구도 속에서 ‘비윤리적이고 무도덕적인’ 존재로 규정되고 재현되었다. 그들이 규정‘되고’ 재현‘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_137~138쪽
가사노동과 감정노동 사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신분제와 계약제 사이, 전근대와 근대 사이에서 끼인 존재였던 하녀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였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생산활동을 하는 주체로서는 인식되지 않았다. 방 한 칸만 남아 있으면 식모를 들였다고 할 정도로 값싼 노동력이었지만, 고향을 떠나 ‘배운 것 없이’ 직업 전선에 뛰어든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제한적이었다. 생계를 위해 임금노동자의 길로 내몰린 하녀들은 ‘가사’와 ‘노동’을 수행하는 존재라는 불안정한 위상 속에서 소비동력으로서 진동하였으나, 식민지 모순과 가부장제 모순이 중첩된 공간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오늘날 세계에는 타인을 위한 가사노동에 종사하면서 정작 자신의 가정과 아이는 돌볼 수 없는 수많은 유색인 여성 가사노동자들이 존재한다. 국내에서도 저출생과 여성노동자의 경력 단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기본적인 인권마저 위협받으며 일하는 ‘메이드’의 상황은 오늘날 가사노동은 제국주의, 자본주의, 인종주의가 연결되어 작동하는 모순의 장임을 보여준다.
『하녀』는 이름만 바뀐 채 이어져온 하위주체의 노동이라는 흐름을 읽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면서 불평등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한다. 하녀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통해 자본주의와 노동시장이 작동시키는 젠더적 차별화 논리를 검토하고 역사가 삭제한 하위주체의 삶을 복원한다.
근대 이후의 삶에 대해 우리가 하는 커다란 오해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삶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착각하는 일일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근대란 이전의 물질적 일상의 폐기가 아니라 삶의 가치와 의미가 재배치된 일상에 가깝다. 근대 이후로 이전에 존재했던 것들이 일거에 사라진 것이 아니다. 특정한 존재와 인식에 부여된 가치가 사라지거나 새롭게 마련되었다는 뜻인 것이다.
가령 전통적 삶에서 사상적 근간이었던 유교는 여전히 우리 삶을 지탱하는 지반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유교의 흔적이 전부 폐기되어야 할 과거의 것으로 치부될 수 없으며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 삶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긍/부정의 의미 맥락과는 별도로 검토되어야 할 영역들 즉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부분들이 있음을 환기해준다. 하녀에 대한 논의를 근대 이후 긴 시간에 걸쳐 돌이켜보는 작업은 근대 이후의 변화를 읽는 시선에 의해서는 포착되지 않는 비가시의 존재와 영역을 돌아보는 확장적 시선을 마련하는 일인 것이다. _243~2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