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난 2017년에 독일에서 출판된 그래픽노블 ‘길가메쉬’는 태초의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갈증을 제대로 풀어준다. 그렇지만 이 책이 아주 쉽게 설명한 것은 아니다. 저자인 옌스 하르더는 초등학생이 읽어도 이해될만한 책이 아니라 성인독자를 대상으로 쓰고 그린 것이다. 따라서 이 그래픽노블은 친절하지 않고 오히려 살짝 불편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우리가 그래픽노블에 대해 기대하는 일반적인 정서, 즉 스토리를 풀어서 설명하는 그런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지막 다섯째 토판에서 이미 처절하게 죽은 엔키두가 열두째 토판에서 갑자기 다시 나타난다. 엔키두를 저자는 살아있는 사람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오히려 부활한 인물로서 절반은 형상이 없는 영적 존재로, 또 절반은 저승에 갇힌 존재로 묘사했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세계관은 길가메쉬의 영혼을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어루만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이 태초의 이야기에 담긴 정치적 측면도 생각해볼 만하다. 이 서사시는 아주 옛날에 지어졌지만 종종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당대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지형은 현재까지도 이어지는데 길가메쉬와 엔키두가 향백나무 숲에서 훔바바를 꺾고 나무를 베어오는 장면을 보자. 저자는 메소포타미아의 나무가 모자라서 레바논에서 조직적으로 나무를 훔쳐오는 일로 해석하고 있다. 아마도 자원 부족의 위기를 극적으로 해결하는 최초의 기록이지 않을까. 그 시대의 사람들이 신의 명령으로 방주를 짓는 것은 ‘두 강 사이’에서 홍수의 위험에 두려움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나왔을 것이며, 안전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란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전한다. 요컨대 옛날 옛적 사람들도 우리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서 묘사된 수메르 왕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트럼프를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의 본성과 권력의 속성은 무엇인지에 대해 돌이켜보게 된다.
저자
옌스 하르더 (지은이), 주원준 (옮긴이)
출판사리뷰
저자의 글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하나의 이야기가 나를 따라다녔다. 모든 이야기의 어머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쓰여진 이야기, 점토판 12개에 영원히 새겨진 이야기인 “길가메쉬”는 내게 이국적 이름으로만 들렸다. 오래된 신화적 인물, 아마 지배자일 것이고, 유럽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닐 것임은 분명한데, 그 이상을 알 수는 없었다.
이 메소포타미아 왕의 영웅 서사시를 처음 접한 것은 1997년에 베를린-바이센제의 예술대학교(Kunsthochschule)에서 전공수업을 시작할 때였다. 우리는 그리스 예술사 수업 3학기째에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여 발표하고 과제를 제출해야 했는데 나는 헤라클레스를 택하였다. 그 영웅의 기원과 성장과정은 매우 흥미로운 지식을 안겨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 숙제는 너무 단편적인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최초의 영웅 이야기와 수퍼맨 등 20세기 미국 만화 산업에 이르는 현대적 영웅들을 연결시키기로 결정했다.
“헤라클레스와 수퍼 영웅들”이라는 숙제를 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면서 나는 헤라클레스의 원조가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는 모든 영웅들의 최고 조상(Urheld)인 우루크의 왕, 길가메쉬였다! 그렇다면 헤라클레스의 명예는 어디에 기초하는가? 헤라클레스 의례는 어디에 뿌리를 두는가? 수많은 그의 모험과 임무들, 그의 휘장, 일부 신성이 깃든 그의 출신, 그의 광채와 그의 매혹은 어디에서 왔는가? 대략 천 년 이상 오래된 길가메쉬 이야기들은 당시 인도 서부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고대근동세계에 다양한 사본과 번역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공부를 계속하면서 이 서사시는 후대의 많은 이야기에 영향을 끼쳤음도 알게 되었다. 구약성경도 홍수 이야기와 방주 이야기를 분리시켰다(성경의 많은 부분은 고대의 많은 이야기들을 이어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한 이야기는 이집트 여신 이시스가 동정으로 아들 호루스를 임신한 이야기를 깊이 참고한 것처럼).
이 서사시의 모티프들은 성경뿐 아니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천일야화, 오늘날의 많은 모험담과 (로드 무비와 수퍼히어로 영화 등) ‘반지의 제왕’ 같은 현대적 이야기에서도 줄곧 등장한다. 그리고 곧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내 책에서 종교적인 주제, 이를테면 믿음, 거룩한 장소, 신들, 창조 신화 등이 자주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처럼 극단주의와 자멸하는 시나리오도 있다. 나는 무신론자임에도 이런 주제를 자주 다룬다. 어쩌면 내가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설명할 수 있는 것만큼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나는 매료된다.
편집자의 말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인류 최초의 이야기라는 타이틀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태초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어려웠고 줄거리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여러 권의 책을 읽어봐도 길가메쉬 이야기는 얽히고 설킨 장미 덩굴 같았다. 그렇게 잊고 살다가 몇 년 전에 옌스 하르더의 그래픽노블을 운명처럼 만났다.
물론 이 책도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활자로만 이해할 때보다는 더 쉽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그랬듯이 이 책은 다른 분들에게도 고대근동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할 것이다. 그리고 길가메쉬는 그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길가메쉬에 대한 주원준 박사의 강의
https://www.youtube.com/watch?v=JJxj0ziaFgk&t=3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