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문의 기틀을 마련한 언어 천재
김수경은 10개 국어 이상을 구사한 언어 천재였다. 그는 경성제대 본과에 진학하면서 언어학에 뜻을 두었는데, 지은이는 “어학에 능통한 청년에게 여러 언어에 두루 걸쳐 있는 일반언어학의 세계가 출구 없는 식민지 상황에서 세계를 개척하는 것으로 비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마르크스 보이’가 동시에 ‘소쉬르 보이’로도 될 수 있었던 동인은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김수경은 ‘이론/리론, 논리/론리’ 등 이른바 두음법칙을 폐지하는 것이 훨씬 더 언어생활에 유익하다는 것을 형태주의 이론으로 명백히 뒷받침했다. ‘스탈린 언어학’의 수용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조사와 용언의 활용어미를 보조적 품사 ‘토’라 규정하여 자주적인 언어학을 시도했다. 여기에 일본어와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ㆍ독일어ㆍ러시아어로 쓰인 외국 문헌을 참조하는 등, 그의 어학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말년의 노작 《세나라시기 언어력사에 관한 남조선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세 나라의 언어는 어휘와 음운 체계에서 약간의 방언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공통되는 하나의 언어였음을 주장하는 등 조선어사 연구에서도 일가를 이뤘다.
‘비판적 코리아 연구’자 이타가키 류타 교수가 집필하다
저자 이타가키 류타 교수(일본 도시샤대학, 역사인류학)는 2015년 한국에 번역 소개된 〈한국 근대의 역사민족지: 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에서 경상북도 상주라는 지역사회를 사례로 식민지 조선 사회변화의 실태를 촘촘하게 살폈다. 근세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을 염두에 두면서 장기간의 현지조사와 방대한 자료를 통해 조선의 식민지 경험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획기적인 연구로 한국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주류 지식체계는 중앙, 국가, 제국이나 엘리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식민지화 과정에서의 근대 경험 연구에 치중되어 있었다. 반면 이타가키 류타 교수의 이 연구는 그러한 주류 지식체계를 역전시켜 마을, 개인, 지방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국가나 제국, 세계사적 규모에서 일어나는 일들과의 접속성 속에서 고찰한다. 이 같은 역사서술은 그가 견지해온 ‘비판적 코리아 연구’의 일환이었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그의 이러한 ‘비판적 코리아 연구’의 또 다른 실천이다. 북한으로 연구대상을 넓힌 그는 이 책에서 한 지식인의 경험을 통해 식민지기부터 냉전기로 이어지는 북한의 역사서술을 시도한다. 그는 거의 10년 동안 미국, 캐나다, 러시아, 중국, 한국, 북한 등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찾고 구술조사를 수행한다. 이를 토대로 개인을 가로질러 접속되고 연동되는 복수의 맥락들을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김수경 개인의 역사를 북한사, 한반도사, 세계사로 확장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식민지 지배나 냉전이 만들어낸 학문의 경계를 넘어 언어학, 정치학 사회학 등을 교차시키고 체제의 억압에 짓눌린 사람들의 행위자성이나 창조성을 드러낸다.
이타가키 교수는 ‘비판적 코리아 연구’를 단순한 학문 연구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기고 있기도 하다. 일본사회의 우경화에 저항하여 히노마루ㆍ기미가요 법제화나 언론 탄압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거나 교토의 조선학교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에 반대하여 재판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며 식민지 지배책임을 묻는 실천을 하고 있다.
일본 학계에서의 호평
저자의 이 같은 노력 덕분인지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일본 학계에서도 여러 저명한 학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미쓰이 다카시 교수(도쿄대)는 “이 책은 우선 한 지식인의 궤적을 통해 식민지기-해방-한국전쟁-북한의 학문사를 그려 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가족 이산의 비극을 낳은 전쟁이라는 요인을 실증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이산한 가족을 만남의 장으로 이끄는 네트워크의 역사적 규정성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제국대학의 사제관계나 김일성종합대학의 사제관계 등 다양한 연결망이 역동적으로 기능하면서 정보가 전달되는 구도는 독자를 흥분시킨다. 또한 언어학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사, 정치사로서 조선학의 학문사를 그려 낼 가능성을 제시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라고 말한다.
다나카 가쓰히코 명예교수(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이 책은 그(김수경)가 주장했던 한글의 풀어쓰기 방식을 도입하여, 조선어의 한자에 대한 의존을 근본적으로 끊어 내려 한 시도이다. 한글은 아무리 한자를 폐지했다고 하나, 그 문자의 원리는 사각의 단위 안에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여 하나의 글자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을 단위로 한다는 점에서는 한자의 원리로부터 궁극적으로 결별했다고는 할 수 없다. 풀어쓰기란, 그 사각의 단위 속에 억지로 집어 넣어진 문자를 풀어내어, 알파벳처럼 일률적으로 옆으로 쓰는 방식이다. 본서는 그러한 조선어 형태론의 표기에 관련되는 기본 문제도 설명하면서, 김수경의 전 생애를 상세히 그려 내려 한 귀중한 시도이다”라고 평한다.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도쿄대)는 “이 책은 지금도 베일에 싸인 나라로 남아 있는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살아남아 학자로서의 생애를 완수한 걸출한 지식인 김수경에 대해, 가족들만 가지고 있던 비공개 수기, 한국전쟁 종군기 등 참고할 수 있는 문서, 자료의 거의 대부분을 전 세계에서 수집하여 그 극적인 생애를 묘사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까지 쓰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쓰이지 않을 작품이다”라고 말하며 “일본에서도 세계적으로도 무엇보다 본국에서도 충실한 자료의 섭렵과 검증을 통한 본격적인 코리아 근현대사 연구 작품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수준 높은 업적이 탄생한 것은 실로 경하해 마지않을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고 높은 평가를 덧붙인다.
큰 울림을 자아내는 이산가족사
문화인류학자로 ‘비판적 코리아 연구’에 천착해온 이타가키 교수는 이 책을 ‘학문사’라 규정했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로서는 남북 분단을 몸으로 겪어낸 김수경과 그의 가족의 신산한 삶에 눈길이 갈 터이다. 한국전쟁에 종군한 김수경과 그를 찾아 월남한 가족의 엇갈림, 캐나다로 이민 간 딸과의 베이징에서의 해후, 띄엄띄엄 편지 왕래 끝에 아내 이남재와의 만남 그리고 2000년 임종하기까지 한 지식인의 삶을 통해 20세기 한반도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조선어학의 길에 들어섰고, 미군정하에서 지하 활동에 들어갔을 때는 ‘가시밭길’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때 당신과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가시밭길’을 걷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나보다도 당신과 아이들에게 ‘가시밭길’을 걷게 했다니……” 맏딸을 먼저 보낸 아내의 회한이 담긴 시를 읽고 김수경이 편지에 적은 감회로 6장 재회와 복권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은 학문사를 지향하는 평전이지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그 어떤 소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책의 구성은 독특하다. 김수경의 삶과 그의 학문 세계를 각각 1~6장과 Ⅰ~Ⅳ장으로 나눠 마치 대위법처럼 교차시켜 서술했다. 필요에 따라 혹은 취향에 따라 골라 읽을 수도, 따로 읽을 수도 있도록 한 구성이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다. 일본인 학자가 국적도 전공도 다른 이의 삶과 학문을 이토록 꼼꼼하게 그려낸 데 대한 감탄은 별도로 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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