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풍경
그 안의 부조리와 불협화음에 위트 섞인 메스를 대다
『도시논객』. 얼핏 제목을 보면 엄중하고 진지하다. 무거운 글이 질색인 사람들은 제목만 보고 책을 밀쳐 둘 것이다. 그러나 책장을 열고 들어가면 선입견은 온데간데없다.
정치로 읽는, 역사로 읽는, 선거를 읽는, 건축으로 읽는, 모두 묵직하다. 장마다 다가오는 진중한 주제는 초장부터 독자의 기를 죽인다. 그러나 인내심은 잠깐이다. 금세 흥미진진한 문장과 웃음기 가득한 문구로 ‘논객’이 쏟아내는 해학의 바다에 빠질 것이다.
눈뜨면 맞닥뜨리는 삶 속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물건들에서, 그 상황들에서 끄집어내는 논객의 관찰력과 탐사능력에 무릎을 치게 된다.
에어컨에 밀렸어도 에너지 절감 차원에서 그래도 존재하는 선풍기가 주거문화의 현주소를 상징한다. 아파트에도 온돌문화는 여전히 요지부동, 그러나 좌식생활은 먼발치로 사라졌다. 그런데 선풍기 스위치는 모양, 위치가 모두 그대로이니 이젠 발가락으로 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한 한국인들은 변치 않는 방바닥의 선풍기 스위치를 손가락이 아니라 발가락으로 누른다.”
이 또한 해학에 가까운 표현이다.
소파 이야기에선 한술 더 뜬다. 소파는 분명 좌식가구인데 이를 대하는 자세는 복잡하다 못해 아주 기이하다. 한국인 태반은 소파를 등받이로 사용한다. 방바닥에 내려앉아 정형외과 의사들이 혐오하는 다양한 자세를 취한다. 한국의 소파는 앉기보다는 눕는 가구에 훨씬 가깝다는 것이다. 입적을 앞둔 부처님 자세로 제자들 아닌 텔레비전을 보고 누워 열반을 꿈꾼다. 이 표현에선 포복절도(抱腹絶倒)를 넘어 포복졸도(抱腹卒倒)에 가깝다.
‘삼엽충의 도시 풍경’에서 등장하는 해삼 뭉치나 삼엽충이라는 단어의 위트도 퍽 이채롭다. 제주도에서 탄 비행기가 수도권에 이르면 저 아래 말린 해삼 뭉치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골프장이야 대거 산속에 숨어 있어 경관적 측면에서 비난거리도 안 된다는 것. 문제는 골프 연습장이 담고 있는 끔찍하게 무신경한 모습이다.
골프 연습장을 우리 시대의 삼엽충으로 본 것이다. 웃으면서 준엄히 꾸짖는 유머가 돋보인다. 이렇듯 논객은 진중한 주제도 미소지으며 맞이하는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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