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냉정해지자. 이제는 성장할 개발 도상국이 없다.
성장이 멈춘 글로벌은 2020년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팬데믹과 전쟁, 공급망 비상사태와 끝나지 않는 인플레이션까지. 2020년대의 초입은 위기로 가득했다. 세계은행은 2022년 10월, 극빈층은 더 이상 줄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세계은행의 말처럼 세계의 발전은 “위기에 내던져졌다.” 위기의 시작은 언제였을까. 2000년대 초반, 글로벌은 낙관에 가득 차 있었다. 낙관의 노랫말 속에서 가난한 국가들은 조용히, 더욱 가난해질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지는 폭력 단체와 전쟁의 위험, 가속화하는 기후위기와 불안정한 인구 통계는 지구의 발전을 미지의 영역에 밀어 넣는다. 현실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제안이 필요하다. 글로벌은 다시,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목차
프롤로그 ; 신자유주의 이후 정치경제와 국가의 귀환 · 7
1 _ 지구적 발전의 동력 · 17
낙관론을 뒤흔드는 2020년대
제조업의 경로
덩샤오핑의 세계
30년의 황금기
2 _ 잃어버린 20년 · 37
우리 뒤에 홍수가 오건 말건
탈산업화와 탈농업화
3 _ 발전 없는 국가의 초상 · 53
일할 수 없는 대중은 어디로 가는가
일꾼, 이민자, 군인
동아시아의 길을 밟을 수 있을까
4 _ 비현실적인 제안이 필요하다 · 73
메뚜기떼, 생태학적 위기
저출생과 인구 폭발의 공존
위기를 직면하기
주 · 89
북저널리즘 인사이드 ; 발전은 서사 위에서 부활한다 · 101
저자
데이비드 옥스, 헨리 윌리엄스 (지은이), 전리오 (옮긴이)
출판사리뷰
냉정해지자. 이제는 성장할 개발 도상국이 없다.
인플레이션과 전쟁, 공급망 위기와 끝없는 빈곤은 예견된 미래였다.
성장이 멈춘 글로벌은 2020년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 빌 게이츠의 승리의 서사
세계의 대부호 빌 게이츠(Bill Gates), 하버드대학교의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교수, 그리고 전직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였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까지. 이들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었다. 이들은 세계가 언제나,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다. 지구의 사람들은 더 건강해졌다. 사망률은 줄었고, 문해력이 확산했다. 극빈층은 사라지고 있었다. 가파르게 위로 상승하는 그래프를 보며 빌 게이츠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팬데믹과 함께 도래한 2020년대, 빌 게이츠가 믿었던 승리의 서사는 점차 희미해졌다. “예멘과 시리아에서의 전쟁, 미얀마의 잔학 행위, 미쳐가는 것 같은 대통령, 물질적 고통”은 끝이 없는 것처럼 지속됐고, 공급망은 비상사태를 맞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팔레스타인의 무장 단체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시민들을 납치해 갔다.
정치와 사회가 시끄럽게 흔들리는 와중에, 경제는 뿌리부터 조용히 썩어 가고 있었다. 2022년 10월, 세계은행은 극빈층이 줄어들던 진전이 멈췄으며, 향후 몇 년의 예후도 불확실하다고 발표했다. 세계은행의 총재는 지난 2020년부터 2022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발전이 위기에 내던져졌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지구의 발전은, 승리의 서사는 길고도 느리게 죽고 있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의 저자 데이비드 옥스와 헨리 윌리엄스는 일견 비현실적인, 그러나 현실을 바꾸기 위한 유일한 방법을 제기한다. 세계 발전의 서사를 위해 주변부와 중심부는 하루 빨리 움직여야 한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은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세계의 거시 경제. 한국과 중국의 발전이 가능했던 이유, 인도와 아프리카를 향한 낙관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미래를 분석한다.
■ 제조업 없는 성장은 환상이다
2020년의 위기는 갑작스러운 불청객이 아니었다. “사실 한창 호화롭던 시절에도 지구적 발전에 대한 승리의 서사는 이미 현실과는 다소 불확실한 관계를 맺고 있었”(20쪽)다. 중국이 이룬 급격한 경제 발전은 전 세계 빈곤 감소의 대부분을 떠받쳤고 통계에는 착시효과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 착시효과 아래에서 가난한 세계와 빈곤국은 미래를 위한 발전 궤도를 마련하지 못했다.
현재 신흥 시장으로 주목받는 인도, 아프리카가 대부분이다. 저자들이 지적하듯, 신흥 시장의 대부분은 제대로된 제조업과 산업화의 궤적을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은 지속적인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한 채 조기 탈산업화와 탈농업화를 경험했다. 그로 인해 이른바 ‘신흥 시장’의 도시에는 비공식 노동자가 가득하다. “이들은 무면허 택시 운전사들, 길가의 과일 행상들, 무소속 짐꾼들, 멈춰 선 차량의 유리를 닦아주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 잎담배를 말아 파는 사람들, 걸인들, 넝마주이들, 의류 재판매상들, 소액 사기꾼과 도둑들, 시장의 짐꾼들, 그리고 일반적인 비숙련 일용직들이다.”(55쪽) 이들은 도시의 과밀화를 부르고, 정치사회적 불안정으로 수렴한다.
왜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의 저자들은 제조업에서 성장 동력의 답을 찾을까? 제조업은 “저숙련 노동자와 고숙련 노동자를 적절한 임금 내에서 아주 많이 흡수하는, 특히나 저숙련 노동자를 많이 흡수하는”(54쪽) 유일한 산업군이기 때문이다. 서비스직도, IT 사업도 그를 가능케 하지 못한다. 한국, 중국과 같은 동아시아의 국가는 “튼튼한 사회 체제에 기반을 두고 (국가의) 폭력을 강력히 독점하고 있었고, 국내의 엘리트는 국가와 기업 사이를 효과적으로 조율했다. (…) 그리고 이들의 노동력은 성공적인 교육과 공중 보건 정책 덕분에 비교적 숙련돼 있었고 건강했으며, 제조업으로 흘러들 수 있는 저렴한 노동자도 풍부했다.”(63쪽) 그 덕에 한국과 중국의 기적과도 같은 성장, 성장 궤도에의 안착이 가능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는 개발 도상국들은 이러한 종류의 안정성을 누리지 못한다. 이들의 국가적 역량은 이미 사라졌다. 수십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 그곳은 모가디슈가 알-샤바브에게 함락되는 것을 막으려는 아프리카연합(AU)의 군대, 사헬(Sahel) 전력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병력,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전역에 개입하고 있는 러시아의 용병들인 와그너 그룹(Wagner Group) 등 외국의 군대들부터, 의도는 좋았다 하더라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힘든 서방의 수많은 인도주의 단체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외부 기관들이 모여 있다.”(69쪽)
현재의 개발 도상국들이 국가적 역량을 키우고, 발전을 위해 산업화와 같은 지속 가능한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지 못한다면 지구의 발전은 이제는 먼 과거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 기후 위기, 저출생과 인구 폭발이라는 위기
상황은 암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론은 넘쳐난다. IMF는 향후 5년간 인도가 세계 경제 성장에 16~18퍼센트 기여할 것이라 전망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떨까? 인도의 대중들은 대규모 불완전 고용 상태에 놓여 있다. “카타르 항공과 같은 기업의 채용 전형에는 일반적으로 수천 명의 지원자가 몰리는데, 면접 센터 밖에는 수많은 인파가 줄을 서지만 무더기의 사람들이 면접의 기회를 얻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곤 한다.”(56~57쪽) 아프리카 국가들이 활발히 받아들이고 있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은 (국가적) 기능 장애의 산물”(57쪽)이다. 챗GPT를 제작한 ‘오픈AI’의 CEO 샘 알트먼은 이 지점을 공략해 아프리카 국민들의 홍채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다.
위기에 위기를 더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미래의 위기는 닥쳐오고 있다. 생태학적 혼란은 개발 도상국들에게 더욱 가혹할 것이며 그들의 삶을 불안정의 끝으로 내몰 것이다. 이주는 늘어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도 증폭할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남쪽 사막에 방대한 양의 물이 축적되면서 이집트 땅메뚜기(desert locust)의 거대한 번식지가 형성”(74쪽)됐는데, 메뚜기 떼는 엄청난 양의 작물을 먹어 치우면서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예멘 등의 농업을 사정없이 파괴했다. 이 혼란으로 인한 뒷감당은 글로벌의 몫이다. 우리는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이, 하마스의 침공이 전 세계 경제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지를 경험하고 있다.
인구 통계학적 문제도 자리한다. 젊은 노동력의 증가는 일견 경제 발전의 동력처럼 느껴지지만,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궤적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의 젊은이들은 국가의 위험 요소다. “직업을 얻지 못하고 불만을 가진 하야틴(벽에 기댄 남자)은 제3세계 사회의 불안정을 부른다. (…) 문제가 극에 달하면 불만을 가진 젊은이들은 나라의 주권을 두고 국가와 경쟁하는, 다양한 형태의 범죄 집단이나 반군 단체의 병사가 됐다. 예를 들자면, 엘살바도르나 온두라스의 마라 살바트루차(MS-13), 멕시코나 콜롬비아의 마약 밀매 그룹, 아이티의 G-9을 비롯한 범죄 조직, 무슬림 세계의 보코하람(Boko Haram)이나 이슬람국가 IS 등이 있다. 소말리아의 알-샤바브(al-Shabaab)는 그 이름부터가 “청년”이라는 의미이다.”(59쪽)
■ 비현실적인 제안이 가장 현실적이다
탈산업화와 탈농업화, 대규모 불완전 고용 상태에 놓인 대중, 정치적 혼란과 넘쳐나는 젊은이, 농장을 덮치는 땅메뚜기로 인해 지구는 길고도 느리게 죽고 있다. 저자들은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제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인도주의 정책, 신자유주의적 정책, 정치적 개입에서 더 나아가서 국가의 역량을 재건하고 엘리트 연합을 다시 구성하는 등, 총체적인 근대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변부만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중심부가 변해야 한다.” 저자들은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침체와 산업적 쇠퇴를 역전시키기 위해 미국이 추진하는 내수 생산 혁명이나, 중국의 가계 소비를 늘리기 위한 노력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글로벌 경제 거버넌스의 대대적인 재편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86쪽)고 단언한다. 프롤로그를 작성한 이우창이 지적했듯, 이는 현대 미국 사회 담론의 변화와도 궤를 같이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일이 한국과도, 한 명의 시민에게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경제의 혼란은 정치의 혼란을 부른다. 정치의 혼란은 대규모의 사회적 혼란으로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글로벌이 가져다 준 과실 뒤에는 글로벌 모두의 책임이라는 쓴맛이 뒤따른다. 이 쓴맛을 외면할 때 정말로 지구적 발전은 길고도 느린 쇠락 끝에 죽음을 마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