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머리핀, 텀블러, 펜슬, 양말, 지갑, 스냅백, 스니커즈, 티셔츠 등 모든 것이 패션이 되었다. 패션은 주류 언론에 뉴스로 등장하지 않지만 점점 더 압도적인 영향력과 파급력을 드러내는 중이다. 세계의 가장 흥미롭고 새로운 사건과 그에 대한 반응, 유행과 트렌드, 그리고 거대한 자본의 움직임은 패션을 관통한다. 그야말로 ‘패션의 시대’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경계가 만들어지다
I부 패션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나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등장, 구찌
└ 패션의 변화
└ 티셔츠의 시대
└ 자기 복제와 자기 파괴의 패션
무너진 포멀웨어의 세상, 발렌시아가
└ 포스트 소비에트의 흔적
└ 웃기는 옷
└ 패션은 자신을 향한다
세상을 지배하게 된 스트리트 패션, 버질 아블로
└ 루이 비통을 맡게 된 미국의 흑인
└ 다양성은 사람을 바꾸는 데서 온다
└ 패션의 중심은 여전히 유럽이다
II부 패션과 함께 가는 것들
패션과 사회의 상호작용
└ 패션의 생산자와 소비자
└ 실수의 반복과 불매의 이유
└ 더 많은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
패션산업의 ‘지속가능성’은 지속이 가능한가
└ 패션이 안고 가야 할 지속가능성
└ 성공적인 불매 운동, 모피
─동물의 윤리적 사용
└ 지속가능성은 지속이 가능할까
스트리트 패션은 정말 다양한가
└ 하위문화와 다양성
└ 리세일과 순위표가 만들어내는 취향
└ 새로운 미감
─패션과 패션이 아닌 것
III부 패션의 영역 확장과 새로운 정착지
K 패션에 대한 이야기
└ 패션의 발전판
└ 지속가능한 패션
└ 새로운 시도
└ 하위문화, 로컬 중심
└ K 패션의 미래
자기 몸을 긍정한다
└ 자기 몸 긍정주의
└ 패션이 재생산하는 이미지
패션이 찾아가는 변화의 돌파구
└ 당겨진 미래
└ 수동적 믹스 앤 매치
└ 어디서 본 듯한 과거
에필로그: 패션은 다양성을 쥐고 나아간다
찾아보기
저자
박세진 (지은이)
출판사리뷰
바야흐로 패션의 시대
최근 갑자기 유명해져 ‘잘나가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어느 업계와 접속 중일까? 바로 패션 업계다. 거대 하이 패션 그룹들은, ‘힙한 모든 것’들을 빨아들인다. 예술, 문화, 스포츠 등등 장르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예컨대, K-팝스타들도 하이 패션 엠버서더로 활동하며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패션은 주류 언론에 뉴스로 등장하지 않지만 점점 더 압도적인 영향력과 파급력을 드러내는 중이다. 세계의 가장 흥미롭고 새로운 사건과 그에 대한 반응, 유행과 트렌드, 그리고 거대한 자본의 움직임은 패션을 관통한다. 그야말로 ‘패션의 시대’다.
모든 것이 패션이 되었다
패션은 이제 저 멀리 높은 곳에 있을 수 없게(혹은 있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세계적인 배우, 가수, 디자이너, 모델 등과 가깝게 연결돼 있고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억 대의 이브닝드레스나 전위적인 하이힐이 아니어도 머리핀, 텀블러, 펜슬, 양말, 지갑, 스냅백, 스니커즈, 티셔츠 등 모든 것이 패션이 되었다. 누구나 ‘셀럽’이 되고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에, 하이 패션 브랜드들은 소비자보다 더 빠르게, 예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이고 눈길을 끄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구찌, 발렌시아가, 루이 비통이 시작하다
2015년 1월, 패션계에 인지도가 거의 없는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구찌의 선봉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구찌의 고급 이미지를 무시하고 우악스러운 강렬함을 뒤집어쓴 위조품 패션을 선보이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 같은 해에 발렌시아가는 베트멍을 론칭한 81년생 조지아 출생의 뎀나 바잘리아를 디렉터로 발탁한다. 2014년 베트멍을 론칭한 바로 그 인물이다. 체형을 아랑곳하지 않고 성별을 구별 짓지 않는 베트멍의 창시자를 테일러드 패션의 최고봉 발렌시아가가 영입한 것이다. 이어 루이 비통도 변화에 합류했다. 유명 래퍼 카니예 웨스트와 절친이자 음악, 공연, 기획 등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활동하며 오프-화이트를 론칭한 건축 전공자이자 미국인이자 흑인인 버질 아블로를 남성복 수장으로 앉힌 것이다. 이들은 과감하고 빠르게 스트리트 패션으로 주류 패션을 덮었다. 나이키, 아이다스, 슈프림, 노스페이스 등 친숙하고 익숙한 브랜드들과의 협업은 물론이고, 문화, 예술, 영화 분야의 탁월한 아티스트들과 대형 스케일의 기획을 진행한다. 또 버질 아블로의 기획으로 〈아이템들, 패션은 현대적인가〉 〈반항하는 몸〉 〈피겨스 오브 스피치〉 같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들은 패션계를 넘어서 현대 예술 전반에서 걸쳐 주목할 만한 논의를 일으켰다.
패션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을 하다
이제 하이 패션이 옷을 만들어 파는 단선적인 방향이 아니라, 각종 이슈에 반응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다양성을 포용하는 정치적 제스처를 적극적으로 취하기 시작했다. LVMH와 케링이 함께 만들어 2019년 발표한 모델 지침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델의 몸 사이즈나 나이 등에 하한선을 설정했고 너무 마르거나 너무 어린 사람이 나오는 광고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또 2016년 디올의 디렉터가 된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1946년 디올 설립 이래 최초의 여성 디렉터다)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We Should All Be Feminists)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컬렉션을 선보이고 이 문구를 티셔츠에 프린트했다. 이런 예는 많다. 버버리의 디렉터였던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패션쇼에서 성소수자의 상징인 6색 무지개를 버버리를 대표하는 트렌치코트, 머플러, 가방 등의 제품에 담아 LGBTQ+에 대한 존중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는 이 컬렉션에 대해 “다양성이 창의력의 근본”이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싱가폴에서 태어나 네팔 카트만두에서 자란 디자이너 프라발 구룽도 빼놓을 수 없다. 이민자로 미국에서 성공한 그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후 이민자에 대한 압력이 커지자 “나는 이민자다”(I am an Immigrant)라고 적힌 티셔츠를 패션쇼에서 선보이며, 성 다양성, 페미니즘과 관련된 구호를 담은 옷들을 만들었다. 디자이너 레베카 밍코프는 2018년부터 매년 1월에 열리는 여성 행진을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RM 슈퍼 위민’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행진의 주최자들, 활동가들이 보내는 메시지를 전하는 캠페인도 열었다. 버질 아블로는 나이키와 협업해 파리의 이민자 축구단 멜팅 패시스의 유니폼을 제작하고 오프-화이트 패션쇼에 팀 멤버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이 팀은 적법한 거주 요건을 갖추지 못해 어떤 공식적인 팀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구찌는 2018년 3월 말에 총기 규제 강화를 촉구하기 위해 열린 시위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에 50만 달러를 기부하고 지지 성명을 냈다.
패션이 끊어낸 것과 이어갈 것
그러던 22년 연말, 수년 만에 리얼퍼를 쇼에 등장시킨 미우미우가 최고의 브랜드에 오르고 입생로랑이 마돈나의 사진집 『섹스』를 재발행한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탄생 이래 처음으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던 패션의 변화가 어떤 ‘구간’으로 끝나가고 있음을 저자는 직감한다. 그렇다면 15년부터 22년까지의 일들은 영영 사라져버릴까? 하얗고 깡마른 모델이 힘없이 휘청거리던 과거의 캣워크로 빠르게 돌아가 버릴까?
저자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 단절이 ‘구간’으로 한정된다 하더라도, 어떤 변화들은 비가역적이라고 말하며 ‘다양성’은 이미 사라질 수 없는 패션의 핵심 가치가 되어버렸다고 단언한다. 가장 큰 이유는 지구온난화다.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6퍼센트, 산업수질 오염의 20퍼센트, 전 세계 살충제 사용량의 20퍼센트를 차지하며 지구온난화의 주역으로 떠오른 패션 산업은 딜레마에 처했다. 해마다 열리는 글로벌패션서밋은 2018년에 제조부터 재사용, 재활용에 이르는 순환 패션 시스템을 완성하자는 목표를 설정했고, 구찌, 발렌시아가, 샤넬, 에르메스, 프라다, 랄프 로렌 등 럭셔리 브랜드 이외에 H&M, 자라 같은 패스트패션 브랜드, 나이키, 아이다스 같은 스포츠 브랜드, 매치스패션이나 노드스트롬 같은 리테일 체인까지 폭넓게 동참하면서 32개 글로벌 기업의 150여 브랜드가 2019년 파리 협약을 주도하며 제품 갱신 주기와 친환경 소재 개발과 재활용 시스템 등 가시적인 활동을 약속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종주의, 성차별, 무자비한 동물 사육 등 과거의 생산 방식들을 더 이상 유지할 수는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의 패션계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한국 디자이너들의 가시적인 성과도 두드러진다. 자동차 에어백과 버려진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등을 사용한 강혁 브랜드는 2019년 LVMH 프라이즈에서 준결승까지 올랐고, 업사이클링 브랜드 래코드(Re;Code)는 출시한 지 3년 이상이 지나 소각장으로 보내지는 재고 의류를 해체하고 재가공해 전시와 협업을 이어가며 주목받고 있다. 2015년 양윤아 디자이너가 론칭한 비건타이거는 동물 유래 소재를 사용하지 않으며 ‘크루얼티프리’(Cruelty Free)를 슬로건으로 모피 사용에 반대한다. 낫아워스, 에끌라토, 오픈플랜 등 환경, 비건 패션을 주창하는 브랜드들은 점점 사세를 확장 중이다. 또 넷플릭스 오디션 ‘넥스트 인 패션’에서 최종 우승을 차지하며 국내 인지도를 높인 민주킴, 1988년 첫 론칭부터 지금까지 영역을 확장해오고 있는 우영미를 비롯해, 크리에이티브 집단 다다, 테크웨어를 미학적, 구조적으로 재해석한 컬렉션을 선보이는 포스트아카이브 팩션(파프), 해체주의와 미니멀리즘에 기반한 아더에러 등 한국에서도 스텔라 매카트니처럼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럭셔리 브랜드로 명성을 쌓아가는 브랜드들의 카테고리가 확대되고 있다. 스투시는 미국 서부 해안의 서핑 가게였고, 파타고니아는 동료 클라이머들에게 클라이밍 도구와 티셔츠를 만들어 팔면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K-패션의 미래는 이미 시작된 것 아닐까.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는 유니섹스
지금 이 순간 패션계의 가장 첨예한 이슈는 유니섹스다. 남성복, 여성복의 경계가 언급한 ‘단절의 구간’에서 확실하게 ‘흐려져버렸다.’ 엄격한 성별 구분으로 확장되고 성립되던 패션의 세계가 이 구분을 무너뜨리자 대혼란에 빠졌다. 기성복 탄생 이래 확고했던 구별, ‘남성, 여성, 여자어린이, 남자어린이’로 나뉜 진열과 피팅룸이 어쩐지 어색해졌다는 뜻이다. 한편, 유니섹스의 영역이 전통적으로 남성복을 표준으로 삼는다는 비판도 강하다. 어떻게 서로의 코드를 어떻게 연계시킬지, 여성복의 복잡다단한 하위 체계와 분류를 삭제하지 않으면서, 남성복의 실용적인 디테일을 살려낼 방법은 무엇일까? 이 주제가 패션을 즐길 가장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