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목천건축아카이브 한국현대건축 시리즈 아홉 번째 책. 그간의 구술채록이 1930년대에 태어나 1960-90년대에 걸쳐 우리나라 고도 경제성장기의 건축을 견인했던 전후 현대건축 첫 세대의 증언을 담았다면, 『유걸 구술집』의 유걸은 1940년대 출생으로 한국이 고도 압축 성장을 겪던 70-80년대에 미국에서 건축 활동을 활발히 한 남다른 이력이 있다.
목차
살아 있는 역사, 현대건축가 구술집 시리즈를 시작하며
『유걸 구술집』을 펴내며
1 가족과 성장기의 경험들
출생과 가족 / 한국전쟁의 경험 / 경기 중고등학교 시절/ 취미와 여행 경험 / 서울공대 진학
2 대학과 건축 초년 시절
공대 건축과 시절 / 무애건축 시절
3 1960년대 작업과 도미
김수근 연구소 시기의 작품들 / 〈정릉주택〉(1969) / 〈정릉교회〉 현상설계(1970) /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 『공간』과 김수근 / 60년대 말 / 결혼 / 도미 / 가족 / 덴버. 정착기 / RNL 디자인 시절
4 1970~1980년대 초 미국에서의 활동과 교훈
도미 전의 작업들 추가 / RNL에서의 초기 작업 / 한국과의 차이 / 〈성 제임스 천주교회〉 설계 과정(1972~1973) / 〈덴버시 경찰서〉(1974~1975) / 〈제너럴 인슈어런스 빌딩〉 / 주택 사업 / 김수근의 방문 / 미국에서 얻은 교훈
5 1980년대 중반 귀국과 초기 작업들
〈서세옥 주택〉(1986) / 주택 3제(1991) / 80-90년대 개인 작업 시기 / 열린 공간
6 1990년대 대형 프로젝트의 시작
고속철도 / 〈요코하마 터미널〉과 〈국립중앙박물관〉(1995) 현상 / 〈명동 대성당 건축 설계경기〉(1996) /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개괄 / 〈밀알학교〉(1995~1997) / 〈밀알학교 2차〉(2002) / 밀알학교 3차〉(2007~2008)
7 2000년대 전반기의 작업들
학교 강의 / 2000년대 프로젝트의 시작 / 〈벧엘교회(밀레니엄 커뮤니티 센터)〉(1999~2005) / 〈배재대학교 프로젝트〉(2002~2010) / 아이아크 파트너십 / 〈계산교회〉(2005~2007)
8 2000년대 후반기의 작업들
〈DDP〉 현상(2007) / 비정형 건축물 / 〈아산정책연구원〉(2008~2009) / 〈서울시청〉(2005~2012) / 주거 프로젝트 3건 / 〈아시아문화전당(ACC)〉 현상(2005)
9 2010년 이후의 작업들
〈다음 스페이스 닷 투〉(2012~2013) / 〈제주 동문시장-플라잉 마켓〉 / 〈드래곤플라이 DMC 타워〉(2009~2013) / 〈카이스트 시설〉(2012~2013) / 〈RMT〉(2015) / 〈서울대학교 예술계 복합교육연구동〉(2012~2015) / 〈페블 앤 버블〉(2014) / 건축계 이야기와 건축관 / 마무리
저자
목천건축아카이브, 전봉희, 최원준, 조항만 (지은이)
출판사리뷰
『유걸 구술집』을 펴내며 중에서
목천건축아카이브 한국현대건축 구술채록 시리즈의 신간으로, 김정식 선생, 안영배 선생, 윤승중 선생, 4.3그룹, 원정수 선생과 지순 선생, 김태수 선생, 김종성 선생, 서상우 선생의 구술집에 이은 아홉 번째 출간이다. 예외적으로 1990년대 초의 그룹활동을 조명했던 네 번째 구술집을 제외한다면, 그간의 구술채록은 1930년대에 태어나 1960-90년대에 걸쳐 우리나라 고도 경제성장기의 건축을 견인했던 전후 현대건축 첫 세대의 증언을 담았다. 반면 유걸 선생은 1940년 생으로 출생이 조금 늦을 뿐 아니라 건축가로서 인생의 궤적이 꽤나 남달랐다. 대학졸업 후 사회초년생 시절은 앞선 구술자들과 어느 정도 활동영역이 유사하나 (특히 김수근 선생 문하의 시기는 윤승중 선생과 겹쳐 당대의 진술에 또 하나의 층을 더한다), 1970년 도미 이후의 행보는 확연히 다르다.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격변기인 1970-80년대를, 그리고 건축가로서 가장 활동적일 30-40대 시절을, 선생은 미국 콜로라도주의 주도인 덴버에 정착하여 지역 사무소인 RNL에서 프로젝트디자이너로 활동했으며 직접 작은 주택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서세옥 주택〉 등 몇몇 프로젝트를 맡기 시작하여 90년대에는 한국에도 작은 조직을 두고 두 나라를 오가며 활동하다가, 본격적인 상주는 2002년 경희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의 전임교수로 임용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가 선생이 아이아크 조직을 기반으로 우리 건축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던 시기이다. 50대만 돼도 설계가 아닌 경영으로 물러나곤 하는 우리 건축계의 일반 경향과 달리, 선생은 70대까지 현역건축가로서의 위치를 유지했다. 〈밀알학교〉, 〈밀레니엄 커뮤니티 센터〉, 〈서울시청〉, 〈트라이볼〉 등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배출되어, 1960년대에 독자적인 설계를 시작한 선생이지만 21세기 건축가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선생의 많은 작품들은 기존의 틀을 깨는 공간적 개방성과 조형성을 띠었으며, 과감한 구조적 표현 역시 우리 건축계에서는 낯선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서울시청〉은 독특한 조형적·공간적 제안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김수근의 부여박물관,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더불어 건축계의 범위를 넘은 세간의 주목과 비평을 가장 광범위하게 이끌어낸 사례이다. ‘종로에 다시 담을 쳐본다. 북악에 고층건물을 세워본다’ 등 자연과 전통에 대한 급진적인 생각들 또한, 이에 대한 찬반의 문제를 떠나, 우리 사회의 문화적 기류 속에서 으레 받아들여지던 가치들에 대해 재고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차별화된 개인사와 활동시기, 작품 성향과 건축철학으로 유걸 선생의 구술은 지금까지 진행된 구술채록과는 다른 영역의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 역시 선생의 건축을 이끈 동력으로, 종심의 나이에 여전히 새로운 시도에 대한 호기심과 추진력을 잃지 않는 예는 세계 건축사에서도 매우 드문 것이다. (참고로 미스는 “나에게 새로움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건축의 구조와 공간, 시공법을 완전하게 새롭게 정의하고자 한 〈RMT〉와 같은 근작은 젊은이들의 작품과 비교해 봐도 그 도전적 실험성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급진적 상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는, 일찍이 학창시절부터 공터에 벽돌집을 쌓아만들 정도로 실제의 짓기에 관심이 있어왔고, 미국에서 주택을 서너 채 직접 시공하며 현장의 현실을 터득한 경력이 든든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유걸 선생에게 자유는 건축의 주제인 동시에 실천 형식이었다. 선생은 자신이 건축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바를 외적 제약이나 경직된 조직의 속박 없이 최소한의 인원과 협업체계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탐구한 건축가였다. 프리랜서, 대형사무소 혹은 건축가와의 일시적 협업, 프로젝트의 유무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유동적인 직원 조직, 셰어오피스 형식의 연합, 개별성을 인정해주는 파트너십 체제 등 선생의 다양한 실무적 시도들은 오늘날 변화하는 시장 상황 속에서 대안적인 설계업무방식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