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에서부터 현대 미디어 창작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공주 캐릭터는 변화하고 확장되어왔다. 지금도 각종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통해 공주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로 변용되고 있으며, 시대적인 흐름을 적극 수용하면서 복합적인 주제들까지 녹이고 있다. 『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 어떤 공주 이야기』 또한 그동안 친숙했던 공주 이야기를, 한국 여성 작가들의 시선에서 재창작하는 장을 마련해보고자 기획된 앤솔로지다.
SF 어워드 중단편상 우수상을 수상한 연여름 작가, 다양한 프로젝트의 앤솔로지에 참여하고 여러 장르 소설을 번역하며 한국 장르 문학계에 발자국을 남겨온 이지연 작가, 『제1회 폴라리스 선정작품집』으로 인상적인 데뷔작을 선보인 모래 작가, 공포소설로 각종 공모전을 휩쓸어온 배명은 작가, 마치 다가올 미래처럼 빚어낸 사변소설을 발표해온 문녹주 작가, 코믹하지만 동시에 뼈아픈 풍자가 담긴 소설을 쓰는데 두각을 드러낸 류조이 작가가 참여했다.
신데렐라, 엄지공주, 라푼젤, 백설공주, 바드돌바우어…
바쁜 직장인들의 사무실에서 옛날 옛적 설화의 세계까지,
작은 방에서부터 머나먼 미래의 우주까지 뻗어나가는 현대의 공주들.
이 책에 참여한 작가들은 동화 속 세계에서 머물렀던 공주 이야기를 현실로 끌어오거나 독창적인 SF 세계관 속으로 재구축해놓는다. 이를테면 연여름 작가는 동화 ‘엄지공주’에 묘사된 작은 동물들의 세계를「스왈로우 탐정 사무소 사건 보고서」에서 독창적인 스페이스 오페라 세계관으로 바꿔놓았다. 먼 미래의 어느 소행성대, 사람들은 인디콜, 헤소, 파이로프 등으로 불리는 각종 소행성에 거주하고 있다. 새의 유전자를 가진 탐정인 ‘나’는 ‘마야’라는 실종된 클론의 행적을 밟아가며 다양한 모험을 겪는다. 「스왈로우 탐정 사무소 사건 보고서」는 엄지공주의 험난한 모험을, 클론과 변종 인류가 공존하는 소행성대에서의 여정으로 재해석하는 동시에, 현대사회의 불합리한 요소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신데렐라를 외계 존재로 재해석한 소설도 있다. 모래 작가의 「변신」에서 신데렐라는 ‘신디’라는 이름의 재투성이 행성 출신 외계인으로 등장한다. 신디는 우주적인 배경의 왕위 계승전에 휘말렸다가 어느 왕자한테 중성자 기관총을 얻어맞은 뒤, 환생 인큐베이터를 통해 인간 여성의 몸으로 되살아나 지구로 오게 됐다. 그런데 이 인간 여성의 몸에서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과연 신디는 지구살이에 적응할 수 있을까? 말만 들어도 어질어질해지는 아득한 배경을 가진「변신」은, 마치 더글라스 애덤스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관료 사회를 우주적 상상력과 농담으로 확장시켰듯, 익숙한 동화들을 농담 가득한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한다.
공주 이야기를 모티프로 새로운 설화를 써 내려간 소설도 있다. 이지연 작가의「산맥공주」는 설화상의 몽골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은 엄지공주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주 이야기의 안티테제로 설정된 공주 설화이자 영웅 설화이기도 하다.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문체와 몽골 문화와 관련된 디테일한 사물과 계급에 대한 묘사는 마치 정말로 어디선가 존재하는 신화 속 이야기에 빨려들어가는 경험을 안겨준다.
류조이 작가의 「고들빼기 공주와 전설의 김칫독」은 직장인들이라면 친숙할 사무실을 무대로 한 코미디다. 이 소설은 디즈니 영화 〈알라딘〉 속 자스민 공주의 모티프인 바드돌바우어 공주를 전면에 내세워 ‘장수민’이라는 캐릭터로 재탄생시키고 알라딘 속 요술램프 대신 ‘전설의 김칫독’을 그 자리에 놓는다. 김치 회사에서 벌어지는 직장 상사와의 다툼, 사무실 동료와의 공모, 그 끝에 존재하는 ‘전설의 김칫독’을 둘러싼 쟁탈전을 보며 독자들은 때로는 공감하기도, 때로는 박장대소하기도 할 것이다.
동화 속 비극을 현대의 비극으로 재해석하다.
새로운 의제와 마주한 공주들
문녹주의 「백설의 기고」는 어머니와 딸이 가진 관계성에 더해, 혼혈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맞부딪치는 한국 사회의 현안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다. 동화 속 백설공주에서 친모는 백설에게 마치 헌신적인 것처럼 묘사되고 계모는 나쁘게 그려진다. 「백설의 기고」속 어머니인 ‘백선희’는 자신의 딸에게 평생 제대로된 ‘어머니 노릇’을 하지 못한다. 또한 백선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머니가 어머니라는 고정된 정체성으로만 호명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민자 문제라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자식에 대한 비틀린 태도가 만나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그린 소설이기도 하다.
배명은 작가의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역시 자식에 대한 뒤틀린 태도를 가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 사회의 성소수자들이 어떤 위협을 당하고 있는지, 우리 사회의 문화가 또 얼마나 경직되었는지를 폭로하는 소설이다. 동시에 라푼젤의 머리카락 모티프를 귀신의 머리카락이라는 기담 소재와 결부시켜, 호러 소설 매니아들이 열광할만한 근사한 이야기로 재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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