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낭만주의의 기수 슐레겔이 전하는 시문학의 정수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시문학에 관한 대화』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20년에 국내에 초역된, 독일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장편소설 『루친데』의 저자이자, 함께 출간되는 『그리스 시문학 연구에 관하여』의 저자이기도 한 슐레겔이 독일 낭만주의 문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스스로 실천하고자 실행한 빼어난 결과물이다. 이 책에서 슐레겔은 ‘대화’라는 형식으로 통해 고대 그리스 시대의 호메로스부터 영국의 셰익스피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동시대의 요한 볼프강 괴테까지 아우르며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나간다. 그 드넓은 시야 속에서 시문학, 문학이론, 문학사 및 비평에 관한 강렬한 사유의 편린들이 서로 교차되면서, 마침내 ‘시문학’이라는 거대한 바다까지 다다른다.
책에서 주로 ‘시문학’으로 번역된 ‘포에지Poesie’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대개 서사시, 서정시, 드라마 장르의 시문학 텍스트를 지칭한다. 그렇지만 『시문학에 관한 대화』의 서두에 등장하는 일인칭 서술자에게 포에지는 단지 시인의 문학작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포에지의 어원은 그리스어 포이에시스poiesis로, 이는 현실의 모방을 의미하는 미메시스mim?sis와는 달리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형성하고 창조하는 행위 혹은 역량을 의미한다. 슐레겔에게서 포에지는 “식물 속에서 약동하고 빛 속에서 반짝이며 아이 속에서 미소 짓고 활짝 핀 젊음 속에서 빛나며 여인들의 사랑하는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형식 없고 의식 없는 시문학”의 세계로까지 확장되어 정의된다.
목차
시문학의 시대들
신화에 관한 연설
소설에 관한 편지
괴테의 초기 및 후기 작품에서의상이한 양식에 관한 시론
해설: 이영기-낭만적 시문학의 향연
프리드리히 슐레겔 연보
저자
프리드리히 슐레겔 (지은이), 이영기 (옮긴이)
출판사리뷰
호메로스부터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괴테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시문학의 향연
모든 예술은 학문이 되어야 하고,
모든 학문은 예술이 되어야 한다!
시문학의 향연
『시문학에 관한 대화』는 문학이론서지만, 살롱에 모인 친구들의 대화와 발표라는 허구적 이야기 형식을 통해 낭만주의 시문학에 대해 설명한다. 플라톤의 『향연』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방식은 18세기 말에 피어난 낭만주의 이론을 다채롭게 드러내기에 매우 적합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우선 일인칭서술자와 전지적 서술자의 글을 시작으로 네 편의 발표문, 즉 ‘시문학의 시대들’(안드레아), ‘신화에 관한 연설’(루도비코), ‘소설에 관한 편지’(안토니오), ‘괴테의 초기 및 후기 작품에서의 상이한 양식들에 관한 시론’(마르쿠스)과 이후 이어지는 네 차례의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위의 네 발표자들뿐만 아니라, 아말리아, 카밀라, 로타리오까지 총 일곱 명의 친구들이 함께 참여한다. 이를 통해 전체 텍스트는 발표의 문자성과 대화의 구술성을 동시에 담보하고 있다.
이는 1799년 가을부터 예나에서 슐레겔이 친교를 나누었던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문학 살롱을 떠오르게 하는데, 이 정신적 공동체에는 슐레겔과 그의 연인 도로테아를 비롯해 슐레겔의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과 그의 아내 카롤리네, 슐라이어마허, 셸링, 노발리스, 티크, 브렌타노 등이 이름을 올렸다. 『시문학에 관한 대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나눈 대화는 물론 허구지만, 서두에서 일인칭 서술자가 자신이 이 모임의 일원임을 밝히면서 시인을 “사교적인 존재”라고 규정하는 점에서 볼 때, 이 텍스트는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낭만적 사교’의 문학적 판본으로도 읽어낼 수 있다.
모든 예술은 학문이 되어야 하고, 모든 학문은 예술이 되어야 한다
첫번째 발표자인 안드레아의 ‘시문학의 시대들’은 유럽 시문학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개괄이다. 슐레겔은 안드레아의 목소리를 빌려 “시문학은 하나의 예술”이고 “예술은 지식을 토대로 하며, 예술의 학문은 예술의 역사”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이 첫 발표문은 “잘못된 시문학의 체계”에서 벗어나 시문학을 학문으로서 정립하기 위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 발표자 루도비코의 연설은 ‘옛’ 신화가 감각적 세계와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새로운’ 신화는 정신의 가장 심오한 심연에서 산출된 예술작품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하는 까닭에 모든 예술작품 중에서 가장 인위적인” 예술작품이다. 또한 새로운 신화는 “무한한 시를 위한 새로운 온상이자 그릇”이어야 한다. ‘낭만적 포에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 “무한한 시”라는 메타포는 시문학의 모든 개별적 형태가 그 안에서 생각될 수 있고 가능할 수 있다는 함의를 갖는다. 이러한 무한한 잠재적 형성 가능성과 관련하여 ‘카오스’ 개념이 포에지와 신화의 속성으로 부여되는데, “최고의 아름다움, 최고의 질서는 오직 카오스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결국 “무한한 시”는 모든 실재하는 것의 카오스적 다양성을 보다 높은 시적 원칙하에서 구현하여 담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번째 발표자 안토니오는 그가 아말리아에게 보냈던 편지를 낭독한다. 루도비코가 간략하게 언급한 “인위적으로 정돈된 혼돈”이나 “모순들의 매혹적 대칭”과 같은 낭만적 포에지의 특성이 이 편지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되면서 구체적인 시학적 의미를 획득한다.
네번째 발표자 마르쿠스의 괴테에 관한 시론은 당시 여전히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었던 괴테의 창작 과정을 짚어보고자 한 슐레겔의 과감한 비평적 시도다. 마르쿠스에게 괴테는 “청년기적 열광의 모든 격렬함”과 “완성된 교양의 원숙함”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는 작가다. 이에 기반하여 마르쿠스는 괴테의 발전 과정을 독일문학사에서 흔히 일컬어지는 세 시기, 즉 질풍노도, 초기 고전주의, 고전주의로 나누어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에 대한 논평을 제시한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때때로 괴테의 작품들에 대한 확정적 판단을 유보한다. “예술적 판단이란, 즉 어떤 작품에 관해 형성된 완결된 견해”란 항상 “위험한 사실”이기도 하다는 점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문학이란 무엇인가
『시문학에 관한 대화』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남긴 가장 까다로운 텍스트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1800년 전후 ‘정신적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눈부시게 전개된 독일 지식담론의 맥락에서 이 텍스트에 켜켜이 담긴 쟁점과 논쟁을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정밀한 독해를 통해서 적어도 슐레겔이 의미하는 바의 ‘낭만’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낭만주의’라는 용어를 특정한 역사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만 규정하는 잘못된 관습에서 벗어나 ‘(시)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성찰과 숙고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낭만주의가 태동하던 18세기로 돌아가 살롱에 모인 친구들과 열띤 논의를 함께하는 멋진 경험에 참여해보기를 권한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모더니즘의 물결과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수많은 다원주의적 미학 이론과 논의에 보다 친숙한 독자들에게는 슐레겔의 낭만적 문학/예술 강령이 이상주의적이고 고답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예술이 삶이고, 삶이 예술이다”라는 플럭서스 운동의 모토가 흡사 지배적인 현대 예술의 생태적 환경에서 ‘낭만적’ 의미에서의 ‘포에지’가 요구되는 지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_‘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