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다시 한번 소설이라는 마법을 믿고 의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몰입감
세계의 단면을 포착하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들
“작은 흠이나 실수가 보이지 않”(신춘문예 심사평)도록 세밀하게 서사를 축조한다는 찬사를 받으며 한국문단에 등장한 ‘대형신인’ 명학수가 첫 소설집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을 펴냈다. 사실과 허구를 섬세하게 조합해 놀라운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특유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번 소설집에는, ‘외형적으로 비슷한 작품만 창작되는 시기에 문장과 이야기 면에서 모두 독보적인 스타일과 완성도를 보여주었다’는 호평을 받은 화제의 등단작 「폴이라 불리는 명준」을 비롯한 여덟편의 이야기가 실렸다.
특히 놀라운 것은 각 작품에 들어간 작가의 공력이 페이지를 넘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여실하다는 점이다. 명학수는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듯, 마치 세밀화처럼 정교한 짜임새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첫 소설집이 나오기까지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기간 새로운 시도와 자기갱신을 게을리하지 않은 노력 덕분에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은 읽는 내내 단조로울 틈 없이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책으로 탄생했다. 이번 소설집을 통해 독자들은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는 것은 물론,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거나 세상을 향한 또다른 시선이 추가되는 놀라운 경험이 가능할 것이다.
“문학의 오래된 (…) 힘을 아는 작가의 출현이 반갑다.”(추천사, 이기호)
목차
폴이라 불리는 명준
미친개의 처분에 관한 보고서
dmswl
은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호수
쓰러질 듯 말 듯 도도하게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해설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저자
명학수 (지은이)
출판사리뷰
독자를 결말까지 단숨에 데려가는 흡인력
간단하지 않은 생각거리 끝에 깨닫는 이야기의 매력
「폴이라 불리는 명준」은 이민 가정에서 자란 한국계 미국인 ‘이명준’과 세계적인 미술가 앤디 워홀의 삶이 교차하는 이야기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앤디 워홀은 ‘최후의 만찬’ 미니어처를 사는데, 이 일은 나비효과처럼 이명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배우가 된 이명준은 이름있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으나 중년이 되며 서서히 잊혀간다. 그러던 중 브로드웨이 극단의 앤디 워홀 역 모집 소식을 들은 이명준은 오디션에 지원하고, 외형적 차이를 극복하며 배역을 따낸다. 자신의 캐릭터에 사로잡히고 만 이명준의 삶은 달라지게 되는데…… 운명같이 이어지는 우연의 연쇄가 긴장감을 증폭시키며 읽는 이를 결말까지 단숨에 데려간다.
「미친개의 처분에 관한 보고서」는 ‘햇빛로 32단지’라는 가상의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거주민들은 미친개를 처분하라는 ‘국가관리국’의 통지문을 전달받는다. 그 통지문의 내용은 무척 기이한데, 미친개를 식별할 수 있는 건 십대 청소년들뿐이며 그들도 다른 집의 개만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자신의 개가 미쳤는지를 확인하고, 미친개로 판명되면 자신의 손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주민들의 일상은 서서히 파괴된다. 흡인력 높은 가상의 이야기가 현실의 상황을 순간순간 환기시키는 수준 높은 정치적 우화라 할 만하다.
「dmswl」는 연극처럼 이어지는 기이한 연출이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현우’와 ‘윤희’의 고등학생 딸 ‘은지’의 자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자친구 ‘민수’와의 관계에서 생긴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은 그 죽음 이후 밝혀진다. 딸을 잃은 둘은 ‘dmswl’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출산에 이르는 여고생의 임신 일기를 사진과 함께 올린다. 학교에는 그 사진이 은지의 모습이라는 소문이 돌고 민수가 찾아와 계정을 삭제할 것을 부탁하지만 둘은 아랑곳 않는다. 이 기이한 계정의 전말이 서서히 밝혀지며 독자들은 기억과 재현에 관한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은하」에 등장하는 ‘나’와 ‘미영’은 소설에 푹 빠진 대학생 커플이다. 취향은 극명하게 달랐지만, 그 다름에서조차 강한 끌림을 느끼며 둘은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그 둘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은하』라는 한권의 장편소설이다. 고등학생 부모의 실제 이야기를 각색한 이 소설을 놓고 둘은 언쟁을 벌이는데, 『은하』가 SNS의 사연과 문장을 도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일은 더 복잡해진다. ‘나’가 군대를 간 사이에 둘은 서서히 이별하고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 ‘나’는 미영이 『은하』라는 소설집을 쓴 것을 발견하고 미영이 나타나는 장소를 찾아 뒤따라다니기에 이른다. 소설과 현실, 현실과 소설 사이의 인과관계를 교묘하게 비틀어가며 아슬하게 이어지는 감정선이 일품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언어와 소통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모임 끝에 만취한 ‘수진’은 ‘기훈’의 집에서 일어난다. 마지막 술자리인 기훈의 집에 수진을 남겨놓고 친구들은 하나둘 각기 다른 이유로 귀가한다. 그 이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기훈과 수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두고 미묘하고 불쾌한 대화가 교차된다. 수진은 전화나 SNS로 자기가 잠들었던 순간에 대해 확인해가지만, 이는 수진의 불안과 서로의 의심을 키워나갈 뿐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지, 그리고 진실은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아닐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호수」에도 소문이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 다만 여기서 소문은 일상의 무료함을 뒤흔드는 역할을 한다. 중견작가인 ‘나’는 정부가 주최하는 문학 세미나에 참석하지만 행사에 금방 흥미를 잃고 자리를 뜬다.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고, 우산 없이 서 있는 여성을 발견한 ‘나’는 우산을 함께 쓰기를 권한다. 대화 끝에 ‘나’는 이 지역에 있다는 호수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지만, 둘의 여정은 이내 사라져버린 것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로 뒤바뀐다. 호수는 의문스러운 살인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며, 세계관의 차이를 확인시켜주는 장치가 되기도 하며 반복해 등장한다. 결말에 이르러 ‘나’는 또다른 호수 이야기를 창작하기에 이르는데,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쓰러질 듯 말 듯 도도하게」의 ‘나’는 어느 영화의 조감독인데, 우연히 본 고양이 이야기를 감독에게 꺼냈다가 곤경에 처한다. 주택가에서 한쪽 다리를 다쳐서 절룩거리는 고양이를 도와 동물병원까지 데려다준 이야기를 듣고 감독은 여주인공의 캐릭터를 위해 그 고양이를 데려오라고 한 것이다. ‘나’는 딱 한번 만났을 뿐인 고양이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니지만 헛수고에 그친다. 그런 반면 시나리오에서 고양이의 비중은 점점 커져만 간다. 결국 후보로 선택된 고양이는 다리를 절지 않았고, 배역을 위해서는 다리를 다쳐야만 한다. 이 잔인한 상황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독자들은 이야기의 끝에서 ‘연출되고 꾸며지는 삶’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은 어느 커플의 즉흥적인 결정으로 시작한다. 빠듯한 경제 사정으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대학생 커플 ‘나’와 ‘영주’는 휴일 데이트를 위해 서울랜드로 향하다가 갑자기 경마공원으로 목적지를 바꾼다. 난생처음 와보는 경마공원, 그런데 기적이라 할 만큼 ‘영주’가 베팅하는 말은 매번 우승을 차지하고 둘은 큰돈을 거머쥔다. 이 기묘한 행운은 매주 이어지다가 ‘나’가 형의 결혼식 때문에 경마장을 가지 못하게 되며 돌연 끝나게 된다. 동시에 둘의 관계도 끝을 맺는다. 몇년 뒤 우연히 만난 ‘나’에게 영주는 한가지 비밀을 털어놓는데…… 사람에게 관계란 어떤 의미인지를 곱씹게 하는 작품이다.
이렇듯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은 각기 다른 일상에서 출발하며 모두의 경험을 조금씩 간지럽히지만, 어느 순간 일상을 아득히 초월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우연과 운명, 소통과 관계, 과거와 미래 등 간단하지 않은 생각거리를 제공받지만 이 과정은 이야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오기에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다. 서사가 파생시키는 갖가지 상념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독서경험 끝에 읽는 이는 자신의 자리와 자기를 주변에서 구성하는 ‘사회’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독자로 하여금 “잠시 다른 각도로 세상을 볼 수 있게”(해설, 김요섭)해주는 동시에 읽는 시간을 재미로 채워주는 이야기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소설의 본령이 아닐까.
작가의 말
해경(海卿)이 눈을 떴다. 그를 깨운 건 어쩌면 어떤 향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것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생김새를 관찰하고 향을 음미하던 해경은 그것이 한자로 레몬 영(?)과 레몬 몽(?)을 사용하는 영몽의 껍질임을 깨닫는다. 입맛을 다시며 영몽의 물기 없는 노란 껍질만 바라보던 해경은 금홍(錦紅)이 그것의 과육을 모두 먹어치우고 껍질만 남긴 것이라 단정한다. 해경은 영몽을 찾아 거리로 나선다. 하지만 1930년대의 경성에서 영몽은 귀한 과일이었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백화점과 과일가게와 시장, 심지어 식당과 주점과 찻집까지, 과일이 있을 만한 곳은 모두 찾아가 물었지만 영몽은 어디에도 없었다. 해경은 온종일 거리를 헤매다 실의에 잠겨 친구의 화실에 들른다. 그곳에서 해경은 마침내 친구의 정물화 속에 그려진 영몽과 조우한다. 허탈한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보던 해경은 탄식한다. 저건 영몽(??)이 아니라 영몽(靈夢)이로구나.
해경은 우리에게 이상(李箱)이라고 알려진 작가의 본명이며 실존 인물이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다. 이상이 정말 영몽을 찾아 경성의 거리를 헤맸는지, 심지어 당시 경성에 영몽이라는 과일이 있기는 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니까, 저건 거짓말이다. 내가 오직 상상에 의존해서 지어낸 어설픈 픽션이며, 대략 십년 전, 종일 소설만 생각하며 습작에 몰두하던 시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머릿속에 던져진 작은 씨앗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이야기는 여전히 씨앗이다. 지금까지 대략 십년이 흘렀으니 저 씨앗이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으려면 앞으로 십년, 아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지난 십년 동안 다행히 나는 저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저것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저것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지 수시로 확인한다. 저것이 있어서 든든하고 마음이 놓인다. 저것을 만지작거리며 꿈을 꾸는 시간이 나는 좋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나의 여생이 되기를 바란다. 저것이 레몬 나무가 되지 않아도 좋다. 이대로 영원히 씨앗으로 남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어느새 나는 깨닫는다. 어쩌면 저 씨앗이 나의 영몽(靈夢)일지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