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마음 한구석에 사직서 한 장씩은 품고 있는
직장인들 앞에 펼쳐진 외롭고 웃긴 치즈의 세계
지금까지 37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며 플란데런 문학의 필독서로 꼽히는 작품. 한 직장에서 30년 넘게 일한 주인공은 “먹는장사는 망할 일이 없어”라는 위험한 부추김과 “회사원에게는 거룩한 뭔가가 없지. 그저 맨몸으로 이 세상에 서 있는 인생들인걸”이라는 자조적인 성찰에 빠져 난데없이 치즈 사업을 시작한다. 유머러스한 문장으로 빠르게 전개되는 서사는, 그러나 “누가 내 발을 밟아도 발끈하지” 못하는 평범한 직장인들에게는 눅진하게 가닿는다. 네덜란드어 전문 번역자인 금경숙 번역가의 직역.
목차
등장인물 _009
작품 요소 _011
치즈 _013
해설 | 내 인생 최고의 시절 _145
저자
빌렘 엘스호트 (지은이), 금경숙 (옮긴이)
출판사리뷰
플란데런 문학사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작가
빌럼 엘스호트의 대표작
플란데런 문학사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작가로 손꼽히는 빌럼 엘스호트는 은행과 조선 회사, 광고 회사 등에서 일했고, 밥벌이를 이어가면서도 열한 편의 소설과 한 권의 시집을 펴냈다. 오랫동안 성실한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이력은 그의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첫 소설인 『장미 빌라』를 시작으로 『환멸』, 『구원』, 그리고 광고업계의 기만적 행태를 다룬 『설득』까지 사업이나 직장 생활에 연관한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그러나 이후로 한동안 글쓰기를 중단하고 생업에만 전념하는데, 오랜 침묵을 깨고 10년 만에 발표한 소설이 바로 『치즈』다. 엘스호트는 이 소설을 단 십사 일 만에 써내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마음속에서 적어 내린 이야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것이다. 30년 차 직장인인 ‘라르만스’를 내세워 회사에만 가면 주눅이 들게 되는 샐러리맨의 심리를 코믹하고 생생하게 그린 『치즈』는, 다분히 작가의 개인적인 삶이 반영된 작품이다. 라르만스는 엘스호트의 또 다른 자아라고 인식되고, 소설 속 딸과 아내의 이름 역시 실제 딸과 아내의 이름과 같다. 엘스호트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치즈』를 가장 흡족한 작품이라고 언급했는데, 아마도 보통의 직장인이자 가장인 자신의 모습과 가장 맞닿아 있는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을 묘사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내 삶의 단면이고, 광고와 상업에 대한 나의 혐오감을 표현한 것입니다. 광고라는 주제는 모사하기엔 너무 추상적이어서 치즈를 택했습니다. 치즈는 모양도 있고 색깔도 있고 냄새도 나고 때로는 악취도 나지요. 생선을 택할 수도 있었겠죠. 게다가 『치즈』는 내가 로테르담에서 일하던 때,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을 묘사한 것이거든요.(‘해설’에서)
라르만스는 한 조선소에서 30년을 근속했지만, 사장이 그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라르만스는 그럴싸한 모임에 나가면 어쩐지 자꾸 어깨가 옴츠러지고, 의사인 형에게도, 아내와 두 아이에게도 조금은 부족한 동생이자 가장으로 대우받는다. 그러던 중 우연히 형의 친구인 ‘판스혼베커’로부터 “큰돈을 벌 수 있고, 당신은 그에 걸맞은 사람”이라는 부추김과 함께 치즈 사업을 제안받는다. 근사한 상호와 명함, 사무실, 그리고 치즈가 가져다줄 장밋빛 미래에 들뜬 라르만스는 덥석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치즈에 대한 아무런 애정도, 사업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없이 일을 벌이면서 모든 게 꼬여만 가는데…….
결국 돈을 제일 많이 버는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법. 미래는 내 앞에 열려 있고, 나는 치즈에 일심전력을 다하기로 굳게 결심했네.(47쪽)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사직서 한 장씩은 품고 있을 것이다. 30년을 근속한 라르만스에게도 조선소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터. 그러나 그때마다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니” “30년 동안 종살이”에 가까운 회사 생활을 버텨낸다. 치즈가 열어줄 찬란한 앞날을 그리며 사업을 시작한 후에도 의사인 형에게 가짜 진단서를 발급받아 회사로부터 병가를 얻는다. 어수룩하고 엉성해 보이는 그가 이러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둔 것은 “사회적 열등감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는 배출구”라고 생각했던 아내의 조언 덕분이다. 사업가로서의 허황된 꿈에 부풀어 치즈 공급 계약서조차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라르만스를 대신해 그 계약서가 언제든 ‘뻥 차일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짚어준 것도 아내였다. 작가는 아내를 소설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라르만스가 인간성의 균형을 잃거나 서사의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긴다. 치밀하지도 영리하지도 못한 채 허세와 속물근성에만 물들어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낡은 권위 의식에 빠져 은근히 아내를 무시하는 라르만스를 소설적으로 비판하고 견제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생애 대부분을 고단한 샐러리맨으로서 보낸 라르만스의 삶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라르만스는 늘 굶주려 있었다. 아이들의 숙제를 봐줄 시간도, 아내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항상 부족했다. 게다가 임금 피크제에서 정점을 찍은 급여가 내리막길로 향한 뒤로는 경제적으로도 풍요롭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라르만스가 굶주리고 목말라 했던 것은 건실한 직장인이자 가장으로서 회사와 사회, 가족들로부터 인정받는 일이었다. 소설은 내내 라르만스의 엉망진창 사업기를 우스꽝스럽게 그려가지만, 그가 끝내 주저앉으려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라르만스를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시킨다. 등장인물을 끝내 절망하게 하거나 결말을 뭉뚱그림으로써 소설적인 물음이나 여운을 주는 작품이 있다면, 이 소설은 실패를 통해 꿈꾸었던 자리에 이르게 하는 독특한 아이러니를 택한다.
“쓰지 않아도 되는 단어는 없고,
과한 몸짓도 없으며, 불필요한 언급도 없다.”
문장에서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일을 네덜란드어로 ‘엘스호트 검토’라고 부를 정도로 엘스호트의 문장은 간결하고 정확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네덜란드의 작가이자 비평가인 메노 테르브라크는 그의 문체를 “쓰지 않아도 되는 단어는 없고, 과한 몸짓도 없으며, 불필요한 언급도 없다”라며 높이 평가했다. 엘스호트는 1934년에 『치즈』로, 1942년에 『연금』으로 플란데런 문학상을 2회 수상했고, 1948년 『도깨비불』로 3년제 국가 산문상을 받았다. 1951년에는 네덜란드어 문학에 탁월한 업적을 이룬 작가에게 수여하는 콘스탄테인 하위헌스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위대한 벨기에인’의 플란데런 부문에서 마흔아홉 번째 인물로 선정되는 등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사랑받는 작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