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잡동산이』는 조선 후기 안정복이 지은 잡기로, 당대의 전적들과 다양한 지식을 정리한 백과사전적인 유서다. 이후 ‘잡동산이’는 ‘쓸모없는 잡다한 여러 가지 물건’이란 의미로 쓰였는데, 이것이 ‘잡동사니’라는 말의 유래다. 전우용의 『잡동산이 현대사』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하고 사소한 물건들이 언제 이 땅에 들어와 어떻게 우리 삶을 바꿔놓았는지 이야기한다. 원고지 5,000매가 넘는 분량을 1권 ‘일상·생활’, 2권 ‘사회·문화’, 3권 ‘정치·경제’로 나눠 묶었다. 매일 먹는 음식이나 평범한 물건 등 사소한 것부터 건물과 시설, 문서에 이르기까지 281개의 항목을 통해 근현대 한국사를 읽는다.
이 책은 물건의 유입사와 내력을 설명하고 그로 인해 달라진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그려낸다. 다양한 물건들을 통해 한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뿐 아니라, 물건들의 역사와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인의 행태, 습성, 정신 등을 조망하고 생활상과 그 변천사를 살필 수 있다.
목차
책머리에
1장. 배우고 향유하다
1. 현대 한국인을 통합한 문자│한글
2. 현대인의 생활지침서│달력
3. 현대인의 몸에 규율을 새기다│호루라기
4. 시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생활계획표
5. 현대 세계의 크기│사전
6. 모든 사람의 보물│문화재
7. 현대인의 사회화가 시작된 곳│유치원
8. 제국의 국민과 식민지 원주민을 만든 곳│박물관
9. 현대성現代性의 탄생지│서점
10. 옳고 그름의 준거│교과서
11. 인류 보편의 가치를 가르치다│동화책
12. 인간의 시대를 선언하다│위인전
13. 현대인이 가장 좋아하는 초상화│지폐
14. 상상을 구체화하다│만화책
15. 모두가 글씨 쓸 줄 아는 시대│연필
16. 쓰는 글자에서 치는 글자로│타자기
17. 색감의 표준│크레파스
18. 현대 한국인의 인생을 좌우하는 물건│수능시험지
19. 학교생활을 감시하기│내신성적표
20. 진상과 진실 사이│카메라
21.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다│풍금
22. 음악을 들으며 살다│축음기
23. 대중가요 반주 악기│기타
24. 실상으로 환상을 만들다│영사기
25. 현대 한국의 종교지형│십자가
26. 사생관死生觀을 바꾸다│화장장
2장. 어울리고 소통하다
27. 정보의 시대를 열다│신문
28. 능력 제일주의 사회의 신분증│졸업장
29. 표정 없는 대화를 매개하다│전화기
30. 혈연보다 강한 전연電緣│전화번호부
31. 기다림을 제거하다│휴대전화기
32. 경쟁과 협동의 이율배반│축구공
33. 군중과 개인의 관계를 가르치다│극장
34. 열광의 체험장│경기장
35. 돈이 신분인 시대를 열다│티켓
36. ‘돈신’이 깃든 놀이 도구│화투
37. 현대의 귀족 놀음│골프채
38. 한국적 접대 문화의 탄생지│요정
39. 성을 거래하는 업소│유곽
40. 무시해도 되는 소리│라디오
41. 한 사람의 목소리를 수만 명에게│확성기
42. 사람을 통제하는 기계│신호등
43. 인간과 노는 기계│전자오락기
44. 인간과 거래하는 기계│자동판매기
45. 하늘을 감시하는 기계│레이더
46. 인간을 닮은 기계│로봇
3장. 조성하고 개조하다
47. ‘하늘의 뜻’을 미리 알다│기상 관측 기기
48. 체감을 기계적 수치로 바꾸다│온도계
49. 전기 시대의 표상│전봇대
50. 현대인이 가장 많이 생산하는 물질│쓰레기
51. 현대인의 생활 공간을 채운 물질│플라스틱
52. 자연을 가두는 감옥│댐
53. 자연에 뚫은 구멍│터널
54. 정밀한 권력 분포도│지적도
55. 공유하는 미래상│청사진
56. 세계를 덮은 물질│시멘트
57. 자연이 소거된 강변│강모래
58. 땅과 바다의 경계│테트라포드
59. 현대 건축물의 색채│페인트
60. 개발지상주의의 표상│불도저
61. 공중公衆과 여론이 형성되는 곳│광장
62. 공동체의 기억│기념탑
63. 현대의 신상│동상
64. 자본의 바벨탑│마천루
65. 도시에 길들여진 자연│공원
66. 가축과 비슷해진 나무│가로수
4장. 타고 오가다
67. 현대인이 가장 자주 타는 것│승강기
68. 바퀴에 익숙한 인간을 만들다│자전거
69. 현대를 연 물건│자동차
70. 가장 비효율적인 공간│주차장
71. 현대의 도로를 뒤덮은 물질│아스팔트
72. 도시경관을 지배하는 메시지│간판
73. 천지분간 능력을 감퇴시키다│도로표지판
74.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리다│공중변소
75. 가만히 앉아 있어도 세상이 움직인다는 환각│기차
76. 원치 않는 밀착을 강요하다│시내버스
77. 시간을 압축하다│고속도로
78. 불끄기도 남의 일로 만들다│소방차
79. 현대 도시 생활의 숨은 공로자│손수레
80. 산에 오르려는 욕망│케이블카
81. 지상에 펼쳐진 밤하늘│네온사인
82. 인간에게 정복된 지하 세계│지하철
83. 하늘을 나는 인간│비행기
84. 하늘에서 일하는 신의 사자│헬리콥터
85. 새의 눈인가, 신의 눈인가?│드론
참고문헌
책에서 다룬 물건들
저자
전우용 (지은이)
출판사리뷰
■ 작은 물건 하나에 온축된 한국인의 삶과 한국 근현대사
『잡동산이 현대사』는 현대 한국인의 삶과 의식을 형성한 ‘물건’의 역사를 다루지만, 내용과 서술이 미시사적 소재주의로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사회에 유입된 물건들이 한국인들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여 삶의 양식과 가치관을 만들어냈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서구화, 식민주의, 산업혁명이 추동한 대량생산과 대중소비, 기술혁신이라는 시대 조건에서 우리 삶에 들어온 물건들은 한국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저자의 말처럼 전등이 없는 시대에서 있는 시대, 냉장고가 없는 시대에서 있는 시대로의 이행은 그 어떠한 역사적 분기점 못지않게 중요하다.
물건이라는 물질적 조건은 현대인의 습관과 정신을 주조했을 뿐 아니라 제도와 관습을 결정하고 정착시켰다. 물건의 근현대사라는 이 책의 주제를 통과하면 현대 한국인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사회 제도와 풍습은 어째서 그러한지가 보인다. 『잡동산이 현대사』는 ‘물건’이 언제, 근현대사의 어느 국면에서 들어와 한국인의 생활과 의식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이 물건들이 한국 역사와 어떻게 조응했는지를 살핀다. 따라서 ‘물건의 근현대사’는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 저자 고유의 방법이자 관점이다. 저자는 작은 물건 하나에 온축된 한국인의 삶과 한국 근현대사를 꺼내어 펼쳐 보여준다.
■■ 『잡동산이 현대사』 2권―현대 한국인의 교육·문화·사회관계·공간·환경 분야를 조망하다
2권(사회·문화)은 총 4개의 장 85개의 항목으로 구성하여 한국 현대인의 교육·문화·사회관계·공간·환경 등을 조망한다.
1장 「배우고 향유하다」에서는 교육과 문화를 다룬다. ‘유치원’은 오늘날 사실상 의무교육처럼 되어 현대인의 사회화가 시작된 곳이라 부를 수 있으나, 처음에는 부잣집 자제들의 조기 교육기관으로 출발했다. ‘동화책’은 현대인에게 인류가 함께 지향하는 보편 가치를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한 물건이다. ‘연필’의 등장으로 모두가 글씨 쓸 줄 아는 시대가 열렸으며, ‘타자기’가 들어오며 글씨 쓰는 행위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호루라기’는 교육 현장에서 널리 쓰이며 현대인의 몸에 규율을 새기는 데에 큰 역할을 했으며, ‘생활계획표’는 타율을 자율로 인식하고 시간 규율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으로 변화한 데에 상당한 구실을 했다.
2장 「어울리고 소통하다」에서는 현대 한국인이 어떤 방법으로 소통하고 서로 어울렸는지, 즉 사회관계 형성에 영향을 끼친 물건들을 살핀다. ‘전화기’는 들여놓으려는 사람은 많은데 설치할 수 있는 전화기는 적은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1970년대 말까지 웃돈을 주고 매매해야 할 만큼 귀했다. 전화 보급률이 낮던 시기에 ‘전화번호부’는 부자 인명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축구공’은 아이들의 신체 조절 능력을 향상시켰으며, 경쟁과 협동이라는 이율배반적 가치를 함께 수용할 수 있도록 했고, 더 좋은 결과를 위해 기회를 양보하는 태도를 가르쳤다.
3장 「조성하고 개조하다」에서는 ‘전봇대’, ‘광장’, ‘댐’, ‘터널’, ‘마천루’, ‘시멘트’, ‘페인트’, ‘불도저’와 같은 항목들을 살펴보며 통해 현대 한국인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을 조성하기 위하여 자연환경을 어떻게 개조하였는지 돌아본다. 그리고 4장 「타고 오가다」에서 우리가 가장 자주 이용하는 이동수단인 ‘승강기’서부터 ‘자동차’, ‘기차’ 등 여러 가지 교통수단과 ‘드론’의 등장까지 살펴보며, 위 공간들을 어떤 수단으로 자유롭게 왕래하며 향유했는지 알아본다. 한국 현대사와 조응하여 해방 이후 압축 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한국인의 행태와 습성의 변화 양상 조망한다.
■ 한국인의 월요병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월요팅하세요!” 요즘 Z세대들은 ‘월요팅’이라는 신조어로 ‘월요병을 이기고 힘내’라는 말을 표현한다. 영미권에서도 ‘Monday blues’, ‘Sunday syndrome’ 등 ‘월요병’을 일컫는 표현이 있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월요병은 만국공통의 현상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주말에 쉬고’, ‘월요일부터 다시 일하는’ 요일제에 적응하여 살았을까?
1894년 음력 4월 13일, 고종은 동지사로 중국에 갔다 온 신하들을 궁으로 불러 보고를 듣고 노고를 치하했다. 500년 넘게 매년 되풀이된 의례인 동지사 소견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동지사의 기본 임무는 중국 황제에게 책력을 얻어오는 일이었다. 책력은 하늘의 대리자인 천자만이 저작권을 갖는 특별한 책으로, 천체 운행의 규칙성을 찾아내 인간의 생활리듬에 맞게 시간 개념을 정리한 것이었다. 조공과 하사라는 물질적 관계보다 책력의 수수라는 정신적 관계야말로 중세 동아시아 중화체제의 핵심이고, 중국 연호 사용과 동지사 파견은 조선이 중화체제를 인정한다는 뜻을 밝히는 의례였다.
한 달 뒤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다음 달에는 갑오개혁이 시작됐으며, 그해 말에는 국왕이 직접 독립 서고문을 낭독하여 중화체제에서 이탈하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기해 조선은 역제를 양력으로 바꾸고 연호를 건양으로 정했다. 건양이란 문자 그대로 ‘태양력을 세운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요일제와 각 요일의 명칭이 공식화했다. 1895년 4월 1일자 관보에 일곱 요일의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1898년 대한제국 정부는 황제가 고위 관료들과 만나는 날을 요일에 따라 정했다. 그전까지는 5일마다 한 차례씩 차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황제와 고위 관료의 일정은 하급 관료들의 일정을 규제하기 마련이다. 이제 요일을 모르고서는 공직 생활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역제 개정 이후 책력이라는 말 대신 ‘달력’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한국인에게 월요병이 생긴 것은 아마 ‘달력’이 들어온 그쯤부터 아닐까? 단, 당시 달력은 종이 한 면에 한 달치 날짜가 요일 단위로 배치된 오늘날의 달력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1년 365일의 날짜가 종이 한 면에 기재되어 있었다. 종이 한 면에 한 달치 날짜를 기재한 표지 포함 13장짜리 달력은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민간에 유포되었다.
오늘날 벽에 거는 달력은 거의 쓸모없는 물건처럼 되어 사라지고 있지만, 스마트폰 안에 있는 달력은 여전히 현대인의 생활을 강력히 규제한다. 달력은 7일 단위 생활 주기를 갖는 현대인에게 가장 기초적인 생활지침서이다.
■ 수능시험 잘 치기 위해 유소년기를 보내고, 제 자식 수능시험에 속 끓이며 중장년기를 보내는 현대 한국인
‘수능시험지’는 어떻게 현대 한국인의 인생을 좌우하는 물건이 되었을까? 해방 후 대학을 설립하고 대학 졸업자들을 하루속히 늘리는 것이 사회 일반의 요구였다. 상아탑이라는 이상과는 달리, 한국의 대학은 애초부터 국가기관에 가까웠다. 한국전쟁 이후 신분제의 잔재가 완전히 소멸하고 대학 교육의 효용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하자, 땅을 팔고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 하나는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회 전반을 뒤덮었다. 저자는 대학이 세속과 소통하며 스스로의 효용성을 어떻게 입증해냈으며 근대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국가기관의 감독을 받는 기구로 편제되었는지 일반론을 살핀다. 그리고 한국 역사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변화하였는지 돌아보고, 수능시험 잘 치기 위해 유소년기를 보내고 제 자식 수능시험에 속 끓이며 중장년기를 보내는 현대 한국인의 특징을 반추한다.
‘내신성적표’의 유래에도 눈길이 간다. 본래 내신(內申)이란 ‘외부에 공개해서는 안 되는 비밀한 상신’이라는 의미의 일본식 한자어이다. 극비 문서까지는 아니지만, 지휘-보고 계통 밖에 있는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문서라는 뜻이다. 일본인들은 하급학교에서 상급학교에 학생 관련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내신이라고 했는데, 특히 ‘내신성적’이라는 단어는 해당 학생 성적에 관한 내밀한 정보를 뜻했다. 1920년경 심각한 입시난 때문에 일본 교육 당국은 입시에 내신성적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입학시험 경쟁률이 높아져 1~2점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 데 대한 불만이 고조되자, 채점자들의 부담 일부를 하급학교 교사들에게 떠넘긴 것이다. 하지만 이는 광범위한 ‘입시 부정’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이 불온한 학생이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지식인’이 되는 길을 차단하기에 ‘내신성적’ 제도는 유용했다. 해방 이후 학교 내신제도는 폐지되었으나, 1981년 대학 입시 때 입시 부담을 줄인다는 명분하에 부활했다. 하지만 내신제도의 문제점과 이를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 ‘물건’이 만들어온 인간과 시대, 앞으로는 어떤 물건이 어떤 시대를 만들까?
이 책은 물건을 사용하며 변화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시대를 읽으려 한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수십 개의 전화번호와 수백 개의 대중가요 가사를 외웠다. 지도책 하나만 있으면 운전해서 가지 못하는 길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휴대전화에 전화번호부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고, 노래방에 가면 노래 가사가 나오기 때문에 가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내비게이션 없이는 초행길 가는 데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물건’이 기억하거나 이해하려는 의지를 감퇴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 중 대부분을 물건과 상호작용하면서 보내기 때문에, 물건의 특성이 달라지면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과 시대의 특성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닷새에 한 번 시장 생활을 경험하던 사람과 스마트폰에 시장을 담고 사는 사람의 감각이 같을 수는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장주의형 인간’이 늘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건의 유입사와 내력을 살피는 것은 그 자체가 흥미롭고 호기심이 생기는 일이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쓸모없는 잡다한 물건’인 잡동사니들의 역사는 우리 자신을 알고 다가올 시대를 가늠하는 데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