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십자가十字街…몽수蒙首…녹전거祿轉車…추포?布
미처 몰랐던 900년 전 개경의 고려 사람들
외국인 눈에 비친 고려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
『고려도경』은 꼭 900년 전인 1123년 송 휘종이 보낸 사절단의 일원으로 약 한 달간 고려에 머물렀던 서긍이 기록한 여행기이다. 단순히 여행기라 하기 힘든 것이, 학문과 그림에 뛰어났던 서긍이 꼼꼼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개경을 비롯한 당시 고려의 풍광과 고려인들의 풍속을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조선 시대에 비해 문헌자료가 부족한 고려사를 연구하려면 『고려도경』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라면 지은이는 12세기 고려가 처했던 상황과 오늘을 견주어 실리외교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고려도경』 읽기를 권한다. 한국사에서 외침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고려가 싸울 때와 강화 맺을 때를 잘 구분했던 지혜를 짚어보는 계기로, 『고려도경』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설명이다.
목차
들어가면서
1장 서긍 길을 떠나다
봄날에 떠난 사행길|신선이 점지해 준 아이|현명하고 청렴한 관직 생활|황제도 반한 글씨와 문장
2장 12세기 초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연운 16주를 차지한 거란제국|탕구트족의 나라 서하|새롭게 부상한 북방의 강자 여진|고집 센 천재 개혁가 왕안석|집권당에 따라 달라진 송의 대외 정책|풍류천자의 방만한 재정 운영
3장 송의 사신선 신주와 객주
신주라는 말에 담긴 의미|신주와 객주의 규모와 형태
4장 신주의 고려 항로
신주가 있는 사명으로|바다로 나간 신주와 객주|두려움의 바다 흑수양
5장 고려의 바다에 들어선 송의 사신단
봉화가 시작되는 흑산도|서긍이 만난 첫 고려인|김부식과 만난 서긍|다양하게 생긴 고려의 선박들|군산도에서 마도로|두 번째 상륙지 안흥정|자연도라고 불렸던 영종도|고려 최대의 무역항 벽란도
6장 예성강에서 개경으로
엄숙한 고려 의장대|송의 사신 행렬|산으로 둘러싸인 고려의 도성|서긍의 눈에 비친 개경의 풍경|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하지 못한 서긍|생각보다 엉성한 고려의 성곽
7장 서긍이 본 고려의 궁궐과 도성
장식이 빼어난 신봉문|궁궐 꾸미기를 좋아하는 고려인들|왕의 생일잔치를 열었던 장경전|학술기구 청연각과 보문각|크고 작은 9개의 전각들|도성 안의 여러 관청들|쌀을 오랫동안 보관하는 창고|빈약한 시장과 허울뿐인 화폐
8장 서긍이 만난 고려 사람들
어진 왕의 기질을 갖춘 고려왕|고려 최고의 훈척 이자겸|문장이 뛰어난 윤관의 아들 윤언식|소동파와 비견할 만한 김부식|수염이 아름다운 김인규|중화의 풍모를 가진 이지미|연회에서 만난 사람들|학구열이 높은 고려인들|송의 태학에 입학한 고려인들
9장 고려인들의 복식과 의장
관등에 따라 장식과 색깔이 다른 관복|갑옷을 입은 말과 여러 종류의 수레|행진할 때 세우는 여러 종류의 기치旗幟|신분에 따라 조금씩 다른 고려인들의 옷차림|고려식 히잡, 몽수를 쓴 고려의 귀부인들|고려 여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한쪽 머리 묶기|물건을 이고 지고 아이까지 업은 고려 여인들|예의 바르고 부지런한 하급 관리들|사신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재주가 좋은 고려의 수공업자들
10장 고려의 풍속
부처를 숭상하는 나라|불을 밝히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단술과 떡이 빠지지 않는 잔칫상|관리들의 일 처리|관리가 관리를 만났을 때|관리가 행차할 때|말을 타는 고려의 부인들|깨끗한 고려인, 잘 씻지 않는 중국인|산지에 만들어진 고려의 다락논|고기보다는 생선을 많이 먹는 고려인들|도살과 고기 요리에는 서툰 요리사|고려의 나무꾼|나무에 칼로 새겨서 셈하는 서리들|공덕을 쌓는 고려인들|고려의 특산물
11장 사신관과 주변의 건물
사신들의 숙소 순천관|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방|순천관 뒤편의 사신 숙소|여러 사신의 거처와 아름다운 정자들|사우와 도교사원|개경에서 가장 화려한 정국안화사|큰 종이 걸려있는 광통보제사|왕실 사찰 흥국사와 국청사
12장 고려에서 본 그릇과 도구
은으로 만든 그릇|백동과 구리로 만든 그릇|물총새 깃을 닮은 고려의 비색 청자|차 마신 후에는 탕을 마시는 고려문화|투박하지만 실용적인 도기 술독|등나무를 엮어서 만든 광주리|죽솥과 물항아리|칼과 붓이 들어있는 만능 필통
13장 돌아오는 길
신주에 다시 오른 사절단|위험한 항해, 연속되는 위기|자나깨나 나라 걱정
나가면서
『고려도경』은 어떤 책인가|기적처럼 전해진 『고려도경』|21세기에 본 12세기의 동아시아 상황|다시 『고려도경』에 주목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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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문경호 (지은이)
출판사리뷰
글 읽는 마부, 재혼이 자유로운 과부
『고려도경』은 9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 읽는 맛이 넘친다. 당초 사절단의 목적은 연려제요聯麗制遼(고려와 연대해 요나 금을 제압한다)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위해 고려 내정을 탐색한 서긍의 기록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고려의 속살을 보여주어서다. 개경에 ‘십자가十字街’로 불리는 대로가 있었다든가(137쪽) 궁궐의 승평문 안쪽에 왕과 왕족이, 신하들이 격구를 즐기던 너른 구장毬場이 있었다는(151쪽) 대목은 당시 고려의 성세를 짐작케 하는 풍광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는 선비를 가장 귀하게 여겨 사신들의 말을 끄는 마부도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192쪽) 이복형제나 사촌 간에도 혼인을 하고 배우자와 사별했을 경우 재혼이 자유로웠고 그 자식들도 본처 자식과 차별하지 않았다는(238쪽) 둥 조선 시대와도 사뭇 다른 풍속은 『고려도경』에서만 만날 수 있는 기록이다.
새롭게 다듬고 알차게 보탠 ‘타임머신’
원래 총 40권으로 구성된 『고려도경』은 고려의 역사, 도읍과 궁궐의 구조, 군사들의 종류와 장비는 물론 서민과 여인, 기술자들의 모습, 풍속 등을 29개 항목으로 나눠 촘촘히 기술하면서 그림을 덧붙였다(그러기에 ‘도경圖經’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은이는 『고려도경』의 역주, 해제 수준을 넘어 완전히 새롭게 썼다. 역사로 시작해서 해로로 끝나는 원저의 구성을, 송나라 출발 장면으로 시작해서 서긍이 휘종에게 『고려도경』을 바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식으로 뒤집었다. 여기에 서긍의 면모, 거란과 여진의 부상 등 당대 동아시아의 긴박한 정세에 대한 설명을 더해 독자들이 시간을 거슬러 고려인들의 진면목을 그려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 옛 지도와 사진, 연구 성과 등을 참조해서 화가 김영주 선생의 미려한 그림을 삽화 형태로 곳곳에 넣어 『고려도경』이라는 ‘타임머신’의 효용을 더했다.
역사소설 같은 유려함, 인문서다운 깊이
독자 입장에서 더욱 반가운 점은 역사소설을 방불케 하는 유려한 서술이다.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급수문(손돌목)에 이르러 “급수문은 산골짜기에 묶여 놀란 파도가 해안을 치고 구르는 돌이 벼랑을 뚫는데 천둥처럼 요란하고, 쇠뇌가 날아가는 소리나 말이 바람을 헤치고 달려가는 소리라고 해도 그 급한 물살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란 서긍의 감상을 인용하는 대목(118쪽) 등은 역사서가 아닌 문학작품의 향기를 전하는 예다. 여기에 이백, 두보, 소동파 등의 당송 대 시인의 작품이나 『설문해자』 등 고전을 적절히 인용해 읽는 맛과 인문학적 지식을 더하는가 하면 사절단의 배를 보여주기 위해 18세기 일본의 그림 〈당선지도〉를 보여주는 관련 자료를 풍성하게 보태는 노력이 더해져 그저 그런 역주본이나 역사 교양서 수준을 뛰어넘는다.
사족: 고려 예종은 ‘벌곡조伐谷鳥(고려 말로 뻐꾹새)’라는 노래를 지었단다(163쪽). 신하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간언을 당부했으나 이를 꺼리자 신하들의 비판을 아름다운 뻐꾹새 노래처럼 듣겠다는 뜻이었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