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철학’의 이미지에 갇힌 철학을 탈환하려는 야심 찬 시도
철학자의 이름과 철학사를 몰라도 철학에 입문할 수 있을까? 아감벤, 푸코, 데리다 등 현대 철학자들의 저작을 일본어로 번역해온 철학자 다카쿠와 가즈미가 철학의 문에 들어서는 색다른 길을 제시한다. 저자는 철학사를 익히고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는 것과 철학 그 자체를 신중하게 구분하며, 모든 철학의 뿌리에 있는 ‘저항’을 중심으로 철학을 다시 정의한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이란 개념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다. 즉 생활이나 경험 속에서 건져 올린 어떤 개념을 통해 세계를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고 그 세계를 지배하는 우월한 힘에 맞서는 것이 철학이다. 그러한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면 ‘바다의 물고기’도, ‘주식主食’이라는 흔한 단어도 철학 개념이 될 수 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좁은 의미의 철학자’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저자는 그 대신 영화 〈흔들리는 대지〉와 〈스파르타쿠스〉, 소설 『캉디드』와 『제5도살장』, 역사적 인물인 가야노 시게루와 마틴 루서 킹의 이야기를 통해 철학이 탄생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전태일 같은 이를 철학자로 보지 않는다면 나는 철학을 떠나겠다’라고 마음먹었던 철학자 고병권은 다카쿠와 가즈미가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가 철학을 탈환하고 싶다고 말한다. 저항의 계기가 차곡차곡 쌓여도 냉소와 환멸만이 가득한 시대에 이렇게 되찾은 철학이 변화의 동력이 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야심이 깃든 이색 철학 입문서이다.
목차
들어가며
철학의 이미지에 겁먹지 마라 | 모든 것이 철학으로 보이는 경험 | 철학은 철학사가 아니다 | 철학자는 세습되지 않는다 | 철학은 고매한 이념을 논하는 행위만은 아니다 | 철학은 고민이 아닐뿐더러 고민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1장 철학을 정의하다
철학의 정의 | 개념 - 일관성 있는 단어 혹은 표현 | 당장 개념을 정의할 필요는 없다 | 개념이라고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다 | 개념을 운운하는 것 - 창조·폐기·왜곡·전용 등에 관하여 | 개념의 긴장감이 미치는 곳, 세계 | ‘엘리먼트’에 관하여 - 와인과 물고기 | 시간은 금이다 | 인식 - 머리로 세계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 | 관점의 갱신 - 전승이 아닌 행위 | 지성 -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머리가 좋다 | 저항 - 말을 듣지 않거나 들을 수 없는 것 | 저항에는 ‘좋고 나쁨’이 존재하지 않는다
2장 예속된 자의 저항
〈흔들리는 대지〉와 〈스파르타쿠스〉 | 〈흔들리는 대지〉 | 〈흔들리는 대지〉의 줄거리 | 토니의 연애 | “바다의 물고기는 먹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 시칠리아 속담 | 철학자의 탄생 | 속담의 전용 | 저항이 실패하더라도 | 푸코와 〈흔들리는 대지〉 | 봉기는 쓸모없는가 | 〈스파르타쿠스〉 | 〈스파르타쿠스〉의 줄거리 | 인텔리 노예 안토니누스 | 시칠리아 출신 |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 커크 더글러스의 의도 | 안토니누스의 기지 | 원형 연판장이 발명되는 순간
3장 주식主食을 빼앗긴다는 것
가야노 시게루 | 소년 시게루의 경험 | 동정에 관하여 | 여성이라는 소수자 | 다수자와 소수자 | 감정 이입의 중요성 | 연어는 아이누의 주식 | 주식론 | 서서히 정립된 ‘주식’이라는 개념 | 시에페 | 소수민족과의 교류 | 댐 건설 반대 운동 | 감정 이입의 강요 | 주식론의 계승
4장 운명론에 저항하다
『캉디드』와 『제5도살장』 | 계몽사상가 볼테르 | 『캉디드』 | 낙관론 | 신의론 | 충족 이유율 | 팡글로스에 의한 최선설 | 신의론을 깎아내리다 | 리스본대지진 | 대지진 이전의 볼테르 | 「리스본의 재앙에 관한 시」 | 철학 개념의 폐기 | 커트 보니것과 볼테르 | 커트 보니것의 경험 | 드레스덴 폭격 | SF소설 『제5도살장』 | “그런 것이다” | 서두의 몇 가지 예 | 끝부분의 몇 가지 예 | 불편한 농담 | 최선설과 운명론을 부정하다 | 그런 것일 리가 없다 | 20세기의 볼테르?
5장 지금이 그 시간
마틴 루서 킹과 커트 보니것 | 흑인 민권 운동의 시작 | 「버밍햄 교도소에서 온 편지」 | 편지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 시의적절하지 않은 운동 | 신화적 시간 개념 | 「편지」 전체를 지배하는 시간론 | 워싱턴대행진 연설과 비교하면 | 신중하게 고려된 속도 | 토크니즘 | 토큰(대용화폐) | 워싱턴대행진 연설 - 수표에 관하여 | 반드시 지켜지는 약속? | 바울을 대신하는 킹 목사 | 바울에 대한 명시적 언급 | 1957년의 설명 | 바울의 설명 | 킹 목사의 해명과 고통 | 구제되어야 하는 현재 | 지금이 바로 그 시간 | 종말은 왔는가
마치며
주요 참고자료 일람
옮긴이의 말
저자
다카쿠와 가즈미 (지은이), 노수경 (옮긴이)
출판사리뷰
“사람은 봉기한다. 이는 하나의 사실이다”
저항을 전면에 내세운 철학 입문서
철학 입문서라고 하면 대개 고대부터 현대까지 철학자들의 사상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책을 떠올린다. 저자는 철학사를 따라가며 공부하는 것, 철학자들의 저작을 정독하는 것은 모두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자체가 곧 철학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 철학은 무엇이 아닐까. 철학은 세습되거나 계승되는 것이 아니며, 진·선·미 같은 고매한 이념을 논하는 행위만도 아니다. 최근에는 ‘위로’나 ‘처방’ 같은 말과도 곧잘 짝을 이루지만 철학은 고민이 아닐뿐더러 고민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저자는 ‘철학이 아닌 것’을 하나씩 배제한 뒤 “어떤 경로를 거쳐서든 철학하는 마음이라는 불꽃이 날아오기만 한다면 누구든 철학을 할 수 있습니다. (…) 철학이란 일부의 지적 엘리트가 독점하고 있는 행위가 아니라, 말하자면 지극히 민주적인 행위, 지식의 서민에게도 열려 있는 자유로운 행위입니다”(13쪽)라며 전형적인 철학 입문서와는 다른 길을 갈 것임을 예고한다.
저자는 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철학이란 개념을 운운하는 것으로 세계에 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다.”(23쪽) 그런 다음 이 정의에 등장하는 ‘개념’, ‘운운’, ‘세계’, ‘갱신’, ‘인식’, ‘지성’, ‘저항’ 등의 어휘를 차례로 설명한다. 요약하자면 하나의 세계 안에서 일관성 있게 쓰이고 그 세계에 일순간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인식을 통째로 바꾸는 것, 그 달라진 눈과 머리로 권력의 통제나 개입, 폭압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 철학이다. 이때의 개념은 물고기나 와인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빈자리나 식당 앞에서 맞닥뜨린 문턱, 폐관된 공공 도서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저항은 시위나 집회, 파업 같은 강력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움직이지 않거나 병에 걸리는 것일 수도 있다.
저항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봉기한다. 이는 하나의 사실이다”(71쪽)라는 미셸 푸코의 말처럼 “사람은 그냥 저항”(67쪽)한다. 이기든 지든, 쓸모가 있든 없든 그 저항에 의해 세계를 보는 방식이 이미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책은 저항하는 이들에게 튄 철학의 불꽃을 전하는 방식으로 철학의 문을 연다. 그 불을 받아 스스로 키우는 사람은 누구라도 철학자가 될 수 있다.
‘바다의 물고기’도 철학 개념이 될 수 있을까
철학사와 철학자의 이름 없이 철학을 말하기
1장에서 자신의 언어로 철학을 새롭게 정의한 저자는 2장부터 영화와 소설, 인물 이야기에서 그 정의에 어울리는 철학자와 철학 개념을 건져 올린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흔들리는 대지〉에서 잡은 물고기를 매번 헐값에 중간 상인에게 빼앗기던 토니는 어느 날 문득 그물에 잡힌 물고기의 운명이 중간 상인이 짜놓은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성을 사냥감 취급하듯 쓰이던 농담인 “바다의 물고기는 먹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말 속의 ‘물고기’가 불현듯 자기 자신으로 보이는 인식의 전환이 찾아온 것이다. 그물을 찢지 않으면 평생 먹이 취급을 당할 뿐임을 간파한 토니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사업을 시작한다. 자본가, 무산 계급, 착취 같은 잘 다듬어진 용어 없이도 ‘물고기’를 개념으로 삼아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뒤흔드는 것,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철학이다.
저자는 또한 볼테르의 『캉디드』와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연결하여 운명론에 저항하는 철학의 힘을 보여준다. ‘신이 창조한 세계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악에도 선을 실현하려는 신의 뜻이 깃들어 있다, 세계는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최선의 상태로 존재한다’라고 답하는 신의론 혹은 최선설이 지배하던 시기에 볼테르는 이를 우스꽝스럽게 비트는 소설 『캉디드』를 발표한다. 리스본대지진 같은 재앙을 ‘최선’이나 ‘필연’ 같은 말로 설명하는 철학이라면 차라리 폐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철학 개념의 유해성을 끈질기게 반어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행동은 철학자의 이름을 참칭한 타락한 자들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철학을 탈환하려는 행위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입니다. - 152쪽
리스본대지진에 버금가는 재앙인 드레스덴 폭격을 겪은 커트 보니것은 그 체험을 기초로 쓴 소설 『제5도살장』에서 마치 운명론에 굴복하는 듯한 “그런 것이다So it goes”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지만, 타임 슬립이라는 SF적 장치를 도입해 이를 ‘그런 것일 리가 없다’라는 메시지로 뒤집는다. 위기의 시대마다 인간을 사로잡는 운명론에 저항한 볼테르와 커트 보니것은 철학자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미국에서 흑인 민권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마틴 루서 킹은 “기다려라. 인종 통합은 신중하게 고려된 속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언젠가 적절한 시점이 되면 차별은 시정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문제 해결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이와 같은 ‘신화적 시간 개념’에 맞서 킹 목사는 바울의 종말론을 참조하여 맹렬한 긴급성을 지닌 ‘지금’이라는 시간 개념을 세운다. ‘시간이 문제가 되는 현장에서는 시간이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 종말을 설정하여 기다리는 시간을 폐기하자, 우리에게는 창조적으로 사용해야 할 지금이라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라는 킹 목사의 시간론은 ‘언젠가’에 저항하는 철학이었다. 이 밖에도 저자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스파르타쿠스〉, 아이누 문화 연구자 가야노 시게루의 삶과 글에서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이 문득 개념 하나를 집어 들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맞서는 순간, 즉 철학이 탄생하는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냉소주의에 맞서는 철학자의 실천
저항과 연대라는 일상의 윤리 감각을 회복하기 위한 철학적 훈련의 장
이 책의 저자 다카쿠와 가즈미는 ‘번역 기계’라는 별명으로도 불릴 만큼 현대 프랑스·이탈리아 철학자들의 수많은 저작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학술 논문을 쓰거나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전문 연구자로 활동해왔다. 그런 그가 왜 이런 독특한 형식의 철학 입문서를 썼을까. 책을 마치며 쓴 글에서 저자의 생각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저항을 전면에 내세운 데는 당연하게도 시대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 코로나든 원전 재가동이든 문제는 자연에서 비롯한 재난 그 자체보다는 이를 기회로 삼아 무질서를 만들어 자리보전을 획책하는 체제입니다. 그 체제는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특별히 계기가 되는 재난 없이도 사람이 해서는 안 될 다양한 일을 종횡무진 전개했습니다. […] 최근 몇 년간, 차근차근 논의를 만들어가는 것보다 거짓말이나 궤변, 변명으로 상황을 넘기는 것을 현실주의적이라 평가하는 냉소주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경향에 끈질기게 “아니오!”라고 말하며 기본적인 윤리 감각에 숨을 불어 넣는 일입니다. - 213~216쪽
재난 상황을 틈타 이익을 취하고, 힘을 키우고, 약자를 억압하는 정치권력의 전횡에 냉소와 환멸, 무력감을 보일 뿐인 사람들에게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저자의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단순하지만 정교하게 구상된 실천적 철학 입문서이다. 저자는 모든 철학의 뿌리에 있는 저항의 면모를 드러내는 한편으로, 연대를 우직하게 긍정하는 일에도 비중을 두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어부, 반란 노예 등의 ‘철학자’들에게 ‘철학의 불꽃’이 튄 순간은 모두 억압당하고 차별받는 자들이 함께 있는 때였다. 억압당하고 차별받는 사람이 저항하는 존재로 거듭날 때 그 옆에는 반드시 함께 서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저항자와 연대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는 것. 저자는 이런 일상의 윤리 감각을 회복하는 일에 철학이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철학 입문자에게 저자가 마지막으로 전하는 말은 냉소를 걷어내고 저항하고 연대하자는 것이다.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충분합니다. 내가 맞았다면 “아프다”라고 말하고, “아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옆에 서는 것. 실제로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만, 적어도 원칙은 이것뿐입니다. 이 책이 그 원칙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역할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2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