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대륙에서의 삶과도 다르지 않은
남극의 기쁨과 슬픔
이 책은 남극에 서식하는 펭귄인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의 발달 단계에 따라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늦봄부터 시작해 여름철 번식기를 맞이한 펭귄이 알을 낳고(1부. 봄: 알을 낳기 시작하다), 그 알에서 새끼가 태어나고(2부. 여름: 알을 깨고 나오다), 어느 정도 자란 새끼가 부모의 도움 없이 저희들끼리 무리를 짓고(3부. 늦여름: 무리 짓기에 들어가다), 어엿하게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성체가 되기까지의(4부. 가을: 바다로 나가다)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펭귄 외에도 남극물개, 도둑갈매기, 얼룩무늬물범 등 다른 생물들의 삶도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저자는 매일을 산중턱에 위치한 수십 개의 둥지를 살피며 펭귄의 생태를 조사·기록한다. 알을 낳을 둥지를 만들고자 부모 펭귄이 세심하고 진지하게 돌멩이를 고르는 표정과 지극정성으로 알을 품는 모습을 마주하고, 알에서 갓 나온 새끼 펭귄을 처음 본 날엔 “모든 것에 경의를 느끼는 한 마리 포유동물이 되어”(150쪽)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또 생애 첫 겨울을 대양에서 나려고 용감하게 나서는 ‘청소년 펭귄’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곤 “아이를 처음 대학에 보낸 부모”(305쪽)와 비슷한 심정으로 대견함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여느 대륙에서의 삶과 다르지 않게, 남극에도 웃음과 즐거움이 넘치는 날이 있는 한편 압도될 만큼 슬픈 날도 있다. 부모 펭귄이 애지중지 돌본 알들이 도둑갈매기 내외의 먹이가 되는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할 때, 얼룩무늬물범에게 새끼를 잃은 어미 물개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시레프곶 전체에 울려 귓가를 맴돌 때와 같은 날들이 그랬다. 생물학자로서 먹이사슬의 법칙과 같은 추상적인 지식을 이해하고 있어도 이런 일들을 겪어낸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일견 ‘아름다움과 조화로운 공생의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런 포식 활동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펭귄의 알과 굶주린 새, 새끼 물개와 얼룩무늬물범 중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116쪽)며, 자신도 모르게 견지해왔던 주관적인 관점이 깨어졌던 순간에 대해 고백한다.
모니터링 연구의 한 시즌이 저물 무렵, 그는 처음 남극에 도착한 날을 떠올린다. 젠투펭귄 무리를 보고 전부 똑같아 보여 그저 “펭귄이에요!” 하고 놀라워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이제는 펭귄이 한 무리로 모여 있어도 저마다 특징과 성격이 다른 개체로 알아보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모든 동물 중 인간만이 서로 구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저자는 펭귄의 일거수일투족을 사려 깊게 관찰하면서 인간만큼이나 다양한 펭귄의 개성에 비로소 눈뜬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할수록 인간의 특징이라고 여겼던 많은 것들이 실은 지구상 생물이 유기적으로 조직되는 공통의 법칙일 뿐, 서로를 구분 짓는 경계 같은 건 없다고.
“몇 달간 매일 펭귄을 들여다본 지금은 홀로서기를 위해 바다에 나갈 때가 된 새끼도 구분할 수 있고, 체형이 마른 펭귄과 건강한 펭귄, 털갈이하러 군집에 돌아온 성체와 털갈이 중인 성체, 털갈이를 다 마치고 바다로 돌아가는 성체, 아직 번식할 나이가 안 된 청소년기에 군집으로 돌아와 어슬렁거리는 펭귄, 암컷과 수컷, 짝짓기쌍, 내가 지나갈 때마다 다가와서 때리는 펭귄을 전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시즌이 끝날 무렵이 되자 펭귄이 한 무리로 모여 있어도 저마다 특징과 성격이 미세하게 다른 집단으로 보였다. 펭귄 보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326~327쪽)
“펭귄들의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이다.”
‘미지의 대륙’, ‘두려움의 땅’이던 남극이
우리가 끝끝내 지켜야 할 소중한 삶터로 자리매김해가는 여정
펭귄은 귀여운 외모와 특유의 뒤뚱거리는 움직임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동물이다. 뿐만 아니라 남극 생태계의 상위 포식자로서 남극 생태계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동물이기도 하다. 이는 물개, 수염고래와 더불어 펭귄의 주된 먹이가 크릴이라는 점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갓 부화한 크릴은 각종 조류가 풍부한 빙하 아래에서 포식자를 피해 안전하게 살다가 점차 자라면 바다로 나가 무리 생활을 시작한다. 크릴이 성체로 거뜬히 성장하는 데 있어 빙하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터전인 셈이다. 그러므로 크릴을 먹고 사는 펭귄의 식생활을 조사하여 크릴의 몸길이(크릴은 죽을 때까지 몸집이 계속 커지므로 몸길이를 재면 나이를 알 수 있다)나 어린 크릴이 포함되는 비율(어린 크릴이 포함되는 비율이 클수록 그해 크릴의 번식이 얼마나 왕성했는지 알 수 있다)을 파악하면 남극 빙하의 변화 양상을 유추해볼 수 있다. 저자가 남극에 발을 디딘 목적도 바로 남극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똑똑히 확인하고 더 큰 위기를 막을 정책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최대한 수집하기 위해서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펭귄의 식생활 표본을 얻으려면 일단 펭귄을 토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포획한 펭귄의 식도에 호스를 밀어 넣어 물을 흘려 넣은 다음 거꾸로 뒤집어 위에 있던 모든 걸 게워내게 하는 일을 동료 연구자인 맷과 짝을 이뤄 여러 번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펭귄 개체군을 보호하고 기후 변화의 영향을 직시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과 함께, 깊은 애정을 품은 존재를 제 손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아파한다.
“패기만만하게 생존하는 펭귄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일을 겪어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동물을 내 손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표본 채취가 대부분 별 탈 없이 무사히 끝나더라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206쪽)
이밖에도 또 다른 지표 생물인 물개를 사로잡기 위해 캠프의 모든 연구자가 흡사 각개 전투를 연상시키듯 착착 역할을 나눠 포획에 힘쓴 일, 이미 10여 년 전 남극에 온 연구자들이 부착한 식별 태그를 달고 있는 펭귄과 기적처럼 조우한 일 등 현장 연구 에피소드들과 작은 오두막에서 여러 연구자들과 부대끼며 동고동락하는 캠프 생활의 면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마이크(마이크 괴벨), 더그(더글러스 크라우제)처럼 오랜 기간 현장 연구에 몸담으며 남극 연구팀을 이끌어온 선임 연구자들의 감탄스러운 일화들 사이사이로 더글러스 모슨, 로알 아문센, 인류 최초로 남극에 닿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마오리족 등 저자가 발 딛고 있는 땅을 앞서 밟았던 사람들의 모험담이 흥미진진하게 얽힌다.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는 이 매력적인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가 자기 자신이나 기껏해야 자기 가족, 가까운 사람들만 챙기며 사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전 지구적 위기 상황을 막고자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그 노력으로 지금까지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 알게 돼 마음 한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저자는 “펭귄들의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이다”(371쪽)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탐험의 대상이던 머나먼 미지의 대륙, 19~20세기 소설에서 음산한 배경으로 왕왕 활용되기도 했던 두려움의 땅 혹은 “각종 표와 지도에서 기후 변화의 영향을 보여주는”(260쪽) 객관적 지표로 인식되던 남극이 우리가 끝끝내 지켜야 할 소중한 삶터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순간이다.
펭귄들의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이다. 저자의 여정에 동행한 우리에게도 가슴 찌릿하게 다가올 이 말은 책장을 덮고도 두고두고 떠오를 것이다.
지구 끝에서 자기 세계를 넓힌
젊은 과학자의 찬란한 성장기
이 책은 인간의 생애에서 가장 혼란스럽지만 그만큼이나 무수한 가능성을 지닌 청년 시절을 관통하고 있는 한 젊은 과학자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고요한 자연 속에서 조사 외엔 별게 없는 단순한 루틴을 유지하면서 오롯하게 사색할 수 있는 현장 연구를 사랑하면서 현장 연구 일이 삶의 최종 목적지라고 여기진 않을 만큼 새로운 도전을 향한 갈망이 가슴속에 가득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펭귄에 비유하자면, 태어나 처음 바다로 나가 사냥하는 법을 배우며 당당히 성체가 되어가는 펭귄들과 비슷하다. 아직 능숙하지도 않고 변수에 침착하게 대응하는 연륜도 부족하지만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열의나 추동력만은 남다르다.
비슷한 또래 동료 연구자들의 꿈을 엿보고, 같은 길을 먼저 걸어간 선임 연구자들이 남긴 자취를 더듬으며 미래를 고민하는 저자의 모습에 마음이 자꾸 쓰이는 이유는, 아마 우리도 그와 같은 시절을 지나고 있거나 지난 적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구 시즌이 막바지에 이르러, 저자는 그간 막연히 ‘연구자’로 한정 지었던 미래의 모습을 열어둔다. “그래프와 P값으로 생태계를 이해하는 기술”(313쪽)에는 도통 관심 없어도, 계속 과학의 영역에 머무르며 “철학적 사색을 즐기고 생태학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려는”(254쪽)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기로 한다.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어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깨닫고 앞날에 대한 통찰이 생기는 날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어린 펭귄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세상의 가장자리로 나와서 불확실한 바다를 향해 뛰어들 듯, 저자도 그렇게 남극에서의 한 시즌을 마무리하고 자신을 싣고 왔던 배에 다시 오르기로 한다. 그간 알고 있던 세계보다 한층 더 넓어진 세계를 품은 채.
[추천사]
젊은 시절 10여 년을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열대 정글을 헤집고 다녔다. 《펭귄들의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이다》를 읽으며 비록 열대와 극지라는 극과 극으로 다른 환경이지만, 얼마나 자주 무릎을 쳤는지 모른다. 펭귄 부리에 물리고 날개로 두들겨 맞아 멍투성이가 되어도, 쏟아붓는 장대비에 속옷까지 다 젖고 수백 마리의 진드기가 온몸을 물어뜯어도 남극과 정글이 내 집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믿기지 않겠지만 즐겁기 때문이다. 생명이 날 것으로 퍼덕이는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언젠가 남극에 갈 용기가 난다면, 내 여행 가방에 이 책을 반드시 넣어 갈 것이다. 과학자가 생생히 보여주는 남극의 삶이 매 순간 짜릿하고 놀라운 이 책을 독자들에게 자신 있게 권한다.
-최재천(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
기후 변화 시대의 펭귄에 관한 이 책은, 데 그라시아의 손에서 삶을 이해하는 방법과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가슴 저미는 탐험으로 변모한다.
-세라 스튜어트 존슨(행성학자, 《푸른 석양이 지는 별에서》 저자)
회고록, 환경 저술, 과학적 탐구가 매력적으로 엮인, 자기 성찰적이면서 흥미로운 이야기
-《커커스리뷰》
독자들을 남극의 여름, 생명의 세계로 완전히 끌어들인다.
-《라이브러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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