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일본 열도의 끝에서 끝까지,
미생물과 인간, 자연과 문화가 길러낸
로컬 발효문화의 깊은 맛을 찾아서!
“나무들이 잎을 떨구고 흙과 물속 생명체가 숨을 죽이는 계절, 변두리 양조장에서 ‘푸, 푸’ 하고 앙증맞은 소리가 들려온다. 나무통 안에서 미생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소리다”.
누룩의 움직임을 이토록 섬세하게 묘사한 이는 바로, 올해로 마흔이 된 디자이너 오구라 히라쿠다. 그는 자신을 ‘발효 디자이너’라고 소개한다. 어쩌다 그는 발효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된 걸까?
“건강이 좋지 않아 발효식품을 먹기 시작했죠”. 누구나 겪어봄 직한 일을 계기로 발효에 눈뜨기 시작한 그는, 소멸 위기에 몰린 지역 문화를 살릴 방안을 고심하던 중 ‘발효’에서 해법을 찾았다. 그리고 열도 곳곳의 숨은 양조장을 찾아 특색있는 발효음식을 발굴하고 알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발효 전도사’가 된 것이다. 지금 그는 ‘로컬리티는 발효문화에도 있다’라는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며 발효 전문 샵과 브랜드를 론칭하고 강연과 집필에 나서는 등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 책은 저자가 2018년 여름 끝자락부터 약 8개월간 떠난 발효 기행을 담고 있다. 도카이(東海), 긴키(近畿), 세토우치(瀨戶內) 일대, 호쿠리쿠(北陸) 및 도호쿠(東北)와 홋카이도에 이르는 북쪽 지방, 간토(關東), 큐슈(九州), 오키나와 등 남부 지방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이며 특징적인 일본의 발효음식이 9장에 걸쳐 소개돼 있다. 된장, 간장, 식초, 술(니혼슈) 등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지역 특산물은 물론, 그 지역 사람조차 모르는 로컬 음식도 더러 등장한다. 여기서 저자는 맛을 묘사하고, 레시피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누룩이 보내는 신호와 양조 장인과 미생물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곁에서 묵묵히 써 내려간다. 양조장 한 켠에서 여행의 의미와, 인간과 미생물의 존재를 사유한다.
저자는 여행을 통해 무엇보다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 발효문화의 앞날을 고심한다. 발효 디자이너다운 생각이다. 그는 더 나아가 로컬리티의 핵심 코드로 발효를 꼽는다. 책에 담긴 재료도, 만드는 법도, 신비스러운 로컬 발효식품에 깃든 지역민들의 생활양식과 자연환경에 관한 이야기는 발효를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안목을 제시한다.
발효 디자이너 이전 ‘정보 설계 디자인’을 했던 저자의 이력은 군데군데 실린 칼럼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발효 덕후’ 그 이상의 애정을 담아 한땀 한땀 써 내려간 발효음식에 관한 모든 지식이 여기 담겨 있다. 발효의 원리와 그 쓰임새, 지역별 발효음식의 차이점, 발효와 연관된 경관(景觀)과 신앙까지, 잘 정리된 발효 지식은 간결하고 짜임새 있다. 특히 일본 해운의 중흥기를 이끈 범선, 기타마에부네(北前船) 이야기를 통해 발효음식 발달사의 궤적을 살피는 시도는 놀라움을 선사한다.
목차
들어가며 … 6
제1장 뿌리 깊은 미각의 원조―도카이東海 지방 18
Column 1 다채로운 발효기술과 그 쓰임새
제2장 시·공간을 벗어난 듯한 에어포켓―긴키近畿 지방 42
Column 2 바다, 산, 거리(도시), 섬의 발효문화
제3장 물고기와 식초가 지나가는 길―세토우치 일대 66
Column 3 스시의 진화사
제4장 미생물이 유혹하는 소리―도쿄도 외딴 섬 94
Column 4 일본인, 그들은 무엇을 먹어 왔나?
제5장 북국으로 향하는 은빛 여정―호쿠리쿠, 도호쿠에서 북쪽으로 112
Column 5 기타마에부네, 재패니즈 드림의 무대
제6장 지역의 명물이 된 발효 간식―간토關東 지방 152
Column 6 발효가 멋진 경관을 만든다
제7장 발효가 산업화를 이끌다―일본 근대화 여행 166
Column 7 발효하는 곳에 신앙이 있다
제8장 바닷가 사람들의 지혜―큐슈 지방 210
제9장 기억의 방주 240
특별 에피소드 두 편 252
꽁꽁 숨겨둔 발효음식 261
옮긴이의 말 266
발효식품 업체 홈페이지 270
저자
오구라 히라쿠 (지은이), 송승호 (옮긴이)
출판사리뷰
발효는 생존 의지가 낳은 창조의 산물
지혜가 즐거움이 되면 문화로 남는다
척박한 환경, 제한된 세계를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력한다. 저자가 찾아간 많은 곳이 환경적으로 ‘닫혀 있는 장소’인 바, 그는 어떤 것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창조성을 낳았다. ‘없는 상태’가 ‘있게 한다’는 의지를 낳으며, 이 의지의 표출이 삶에 이른 것이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면 미생물이 곧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몸속에 흐르는 ‘인간 이외의 시간’, 미생물이 만들어가는 시간의 참모습이야말로 발효 여정을 따라가며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다.
그는 일본 문화 형성의 핵심 요소를 발효 탐방을 통해 파악한다. “지금껏 체험하며 눈여겨본 것은 어떤 상황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강인한 의지와 회복 탄력성 및 다양성”이라는 그의 말은 이 점을 집약한 것이다. 결국, 발효의 역사는 ‘지혜’가 더 잘 살기 위한 ‘즐거움’이 되고 그 즐거움을 공유하기 위해 ‘커뮤니티’가 되어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소멸 위기의 지역 문화의 해법은 무엇일까? 저자의 말은 잠시 빌려본다. “전통의 본질은 ‘양식’이 아니라 ‘발상’이고 ‘스타일’이 아니라 ‘콘셉트’이며, 그것이 새 시대를 이루어갈 문화의 핵심이다.” 즉 로컬 문화의 미래를 좌우하는 게 ‘개인의 창조성’이며, 전통문화는 다가올 시대에 맞춰 새로이 콘셉트를 짜면 되면 그만이라는 말일까. 저자는 세상이 달라지면서 ‘없는 상태를 있게 하는 의지’야말로 살아있는 디자인의 원천이며 문화는 위기에 의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위기이므로 살아남는 것’이라 한다. 발효문화를 다각도로 심도 있게 바라보며 써 내려간 그의 통찰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깊숙이 일본」 시리즈를 내면서
같은 한자 문화권이면서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유독 두드러진 한국과 일본.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동안 주춤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두 나라를 오가는가 하면, 거대 담론에서 소소한 일상의 단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많은 사안이 숙제로 남아 있고, 해묵은 현안들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세인들의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깊숙이 일본」은 지금껏 알려져 있거나 잘 모르는 일본의 이모저모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며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심화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획한 인문·예술 시리즈입니다. 번역서와 국내 필자의 저작물을 망라하며, 균형 잡힌 시각과 접근을 토대로 가교(架橋)역할을 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