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마음과 정신의 궤적으로서의 문학사,
그 흐름과 맥을 짚다
이 책의 저자인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고전문학 분야의 손에 꼽히는 학자이고, 40년 가까이 대학에서 한국고전문학을 가르쳤다. 사실, 학생들에게 한국고전문학은 대체로 따분하고 재미없는, 그래서 기피해야 할 과목이다. 학생들은 한국고전문학을 왜 이렇게 인식하는 것일까? 아마도 중고등학교 내내 그리고 대학에서도 지식과 사실 위주로 한국고전문학을 가르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한국고전문학에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감동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고전문학은 그런 학문이 아니다. 한국고전문학은 심오하고 치열하며, 의미 있고 감동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문제는 이것을 읽어 내는 안목과 방법이다. 안목이 없고 읽어 낼 방법이 없으니 무미건조한 지식 전달 위주의 방식에 매달리게 된다. 그 결과 한국고전문학에 내포된 사유와 정신은 방기된다.
한국고전문학사는 한국고전문학의 역사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한국고전문학도 어렵고 재미없는데 한국고전문학사는 오죽할까 싶을 수 있다. 물론 한국고전문학사를 지식과 사실 위주로 풀면 따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접근법을 버리고 문학사 속 인간들의 희로애락과 고뇌, 그들의 이상과 꿈과 좌절, 그들이 지녔던 열망, 그들이 힘든 삶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가치들에 눈을 돌리면, 문학사는 우리에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문학사 속 인간들의 삶에 눈을 돌린다면, 한국고전문학사는 지금의 내 삶과 연관을 갖게 되며, 현재적 의미를 획득한다.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그 굴곡에 대한 공부가 자신의 삶을 응시하고 자신의 삶을 풍부히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문학사를 목표로 집필되었다.
목차
1권
제1강 문학사란 무엇인가
제2강 건국신화와 광개토왕 비문
제3강 향가, 그 서정의 깊이
제4강 신라의 문호 최치원
제5강 나말여초 소설의 성립
제6강 고려 전기의 토풍과 화풍
제7강 무신란 이후의 문학과 신진사류의 의식 지향
제8강 고려의 문호 이규보
제9강 삼국 다시 읽기와 토풍의 소환―『삼국유사』
제10강 우리말 사랑의 노래들
제11강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형성과 그 문학
2권
제12강 조선 전기 문학을 보는 시각―훈구파와 사림파
제13강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문학적 대응들
제14강 국문시가와 우리말 표현의 경계―정철, 박인로, 윤선도의 시조와 가사
제15강 해동도가와 새로운 질서의 모색
제16강 다른 목소리들―여성 작가의 출현
제17강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
제18강 국문소설 및 장편소설의 형성과 전개
제19강 17세기 전반의 문제적 문인들―신흠, 장유, 이수광, 허균
제20강 중인문학
제21강 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들
제22강 ‘사라진’ 도와 단호그룹
3권
제23강 탈중화주의와 새로운 세계관의 정초―『의산문답』
제24강 조선의 문호 박지원
제25강 담연그룹의 문학과 학문
제26강 생사를 건 인정투쟁―이언진의 등장과 『호동거실』
제27강 추방된 자의 글쓰기-정약용과 이학규
제28강 야담의 성행과 『청구야담』
제29강 탈놀이와 민중 의식
제30강 김려와 이옥, 근대의 선취
제31강 여성 주체의 새로운 모습들
제32강 근대와 고전문학의 행방
저자
박희병 (지은이)
출판사리뷰
생생한 현장의 강의를 고스란히 책에 옮기다
- 박희병 교수가 40년 공력을 쏟아부은 특별강의
이 책은 저자의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부 강의인 2021년 1학기 한국고전문학사 강의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 61명의 학부 수강생과 16명의 청강생이, ‘줌’이라는, 저자에게는 퍽 낯선 시스템으로 이 강의를 들었다. 보통 30명 정도가 수강하는 과목인데, 저자의 마지막 강의를 듣기 위해 국문과를 비롯해 언어학과, 경영학과, 인류학과, 디자인학과 등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여들었다. 코로나 시국이라 학생들을 직접 대면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뜻밖에도 줌 강의를 통해 학부생은 물론이고 타 대학의 박사, 교수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학자도 이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강의 수강생 및 청강생 명단은 3권 499쪽에 별도 수록).
강의는 총 32강으로 이루어졌고, 매주 2회 75분간 진행되었으며, 번번이 시간을 넘겨 열띤 토론과 질문, 그리고 답변이 이어졌다. 저자에게는 그간 대학에서 가르친 모든 노하우를 다 쏟아붓는 장이었다. 총 32회의 강의 때마다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만 보아도 이 수업의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책에는 32회의 〈질문과 답변〉을 매 강의 뒤에 수록하였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룬 한국고전문학 작품 중 31편의 주요 작품을 뽑아 저자의 정확하면서도 깊이 있는 번역을 거쳐 〈작품 읽기〉로 매 강의 뒤에 수록하였다.
단군신화부터 진달래꽃까지, 인간을 탐구하는 문학사
- 박희병 교수의 〈한국문학통사〉의 특징
문학사는 저자의 집필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의 문학사가 가능하다. 가령, 촘촘한 지식을 강조하는 문학사, 민족을 강조하는 문학사, 체계를 강조하는 문학사, 시대 구분을 강조하는 문학사 등 다양한 문학사가 있을 수 있다.
박희병 교수의 문학사는 ‘인간’을 강조하는, 인간을 탐구하는 문학사라는 점에서 기존의 문학사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박희병 교수는 한국고전문학사를 통해 문학의 역사 속에 구현된 인간의 다양한 마음 그리고 정신과 대면함으로써 삶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인식을 확장하고자 한다. 박희병 교수가 집필한 한국고전문학 ‘통사’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책은 저자가 평생 수행해온 한국고전문학 및 통합인문학 연구의 학문적 온축이 그 바탕이 되고 있다. 책의 저자 소개란에 나열된 수많은 저술들만 보아도 저자가 얼마나 많은, 그리고 깊이 있는 연구를 해온 학자인지 알 수 있다. 단순히 기존에 출판된 저자의 다른 책과 연결지어 보아도 그 점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제5강 나말여초 소설의 성립〉은 저자의 책 『한국 전기소설의 미학』(1997)과 연결되어 있으며, 〈제22강 ‘사라진’ 도와 단호그룹〉은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2018), 『능호집』(2016) 등의 연구와 연결되어 있다. 〈제23강 탈중화주의와 새로운 세계관의 정초―『의산문답』〉은 『범애와 평등』(2013)이, 〈제24강 조선의 문호 박지원〉은 『연암을 읽는다』, 『연암산문 정독 1, 2』 등의 연구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제26강 생사를 건 인정투쟁―이언진의 등장과 『호동거실』〉은 『저항과 아만』(2009)과 연결되어 있다. 이외에도 저자가 발표해온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강의 주제가 그의 연구와 번역을 통해 이룬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둘째, 기존의 문학사를 보는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좌에서 한국고전문학사를 보고 있다. 가령, 토풍(土風)과 화풍(華風) 개념을 통해 한국고전문학사의 전개를 주체적 관점에서 새롭게 읽어내고 있는 것은 이 책의 한 특징이다. 토풍, 화풍이라는 말은 『고려사』에 많이 등장하는데, 토풍은 고유한 풍속이라는 뜻으로, 화풍은 우리나라에 수용된 중화의 풍속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문학 방면에서 토풍은 우리말 노래에 대한 애호와 결부됩니다. 화풍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말 노래에 대한 애호는 약해지고, 한시문에 대한 애호가 커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한시문을 무조건 화풍으로 규정할 일은 아닙니다. 텍스트에 담지된 의식, 정신, 사상을 잘 헤아려 봐야 할 것입니다. 한시문 중에는 토풍이 반영된 것도 있습니다. 후대의 악부시 같은 것이 그러합니다. …… 형식은 화풍이지만 내용은 토풍일 수 있다는 거죠. _〈제6강 고려 전기의 토풍과 화풍〉 중에서
〈제9강 삼국 다시 읽기와 토풍의 소환―『삼국유사』〉 또한 토풍과 화풍의 길항작용 속에서 우리 고전문학의 향방을 서술하고 있다. 토풍과 화풍이라는 프레임에서 봤을 때, 눈여겨볼 시기는 조선 후기이다. 이 시기에 주목할 점은 하층 문학 혹은 하층의 현실이 한문학에 수용되거나 반영되어 한문학을 내부적으로 변화시켜간 현상이다. 민요풍의 한시가 창작된다든가, 악부시가 창작된 것을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설시조나 판소리, 탈놀이(탈춤)에서 보듯, 하층의 목소리나 사고방식이 보다 적극적으로 표출된 점도 주목해야 한다. 국문소설이 대거 창작되어 큰 인기를 끈 것, 야담이 성행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는 이전과 문학장이 완전히 달라졌으며, 한문학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상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국어 문학의 성장이 이런 변화를 야기했다. 이 때문에 고려 전기와는 또 다른 맥락에서 토풍과 화풍의 관계가 문제시된다. 고려 전기가 시간이 흐를수록 화풍이 강해지고 토풍이 위축되는 양상을 보여 줬다면, 조선 후기는 갈수록 토풍이 강해져 급기야 토풍이 화풍보다 우세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제12강 조선 전기 문학을 보는 시각―훈구파와 사림파〉 또한 기존의 관점과 다르게 훈구파와 사림파 문학의 특징과 성취를 새롭게 읽어내고 있다. 우리는 흔히 훈구파는 보수적이고 사림파는 진보적이라는 통념을 갖고 있다. 일종의 이분법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 책에서는 훈구파의 진보적인 면과 사림파의 보수적인 면을 고루 보여준다. 영남 사림파는 훈구파의 대립자로서 15세기 후반 역사에 등장했다. 이들은 훈구파와 경제적 기반이 달랐고 체질이 달랐으며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충돌하며 각축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문학적·이념적 대립 역시 야기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훈구파와 사림파는 서로 이어져 있는 면도 있다. 이들은 사대부 지배계급에 속한다는 점, 민(民)을 통치의 대상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므로 훈구파와 사림파의 문학적 대립은 크게 보아 지배계급 내부의 주도권 싸움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양쪽의 문학을 지나치게 선악 구도나 진보/보수 프레임으로 재단하는 것은 실상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훈구파 문학에도 훌륭한 점과 한계가 있고, 사림파 문학에도 훌륭한 점과 한계가 있다. 훌륭한 점을 평가하는 데 인색할 이유는 없지만, 한계는 한계대로 냉철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논점이다.
이 외에도 여성 영웅소설에 내재된 ‘젠더’ 문제를 다각도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특히 ‘여성 동맹’, ‘인정 투쟁’과 관련지은 논의(제18강 국문소설 및 장편소설의 형성과 전개), 담연그룹의 문학과 학문 세계를, 방대한 텍스트 읽기와 정밀한 작가 연구를 토대로 균형 잡힌 시각에서 새롭게 읽어내고 있는 점(제25강 담연그룹의 문학과 학문) 등은 박희병 교수만이 갖고 있는 독특하면서도 새로운 시좌이다.
셋째, ‘민’(民), ‘여성’, ‘경계인’, ‘비판적 지식인’, ‘중하층 계급’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고, ‘유교 중심주의’에 갇히지 않고자 유의하는 저자의 시좌는 단연 압권이다. 중인 신분의 역관 시인 이언진(1740~1766)은 이십대에 단명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삶은 온통 신분 차별에 대한 항의와 자신의 정체성을 담보하기 위한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저자는 이언진의 시집 『호동거실』을 소개하며, 이언진에 대해 ‘우리 문학사에 처음 보는 괴물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콧구멍 치들고 주인 뒤를 졸졸 따르니
종이라 불리고 하인이라 불리지.
천한 이름 뒤집어쓰고도 고치려 않으니
정말 노예군 정말 노예야. (『호동거실』 중에서)
서산에 뉘엿뉘엿 해 넘어갈 때
나는 늘 이때면 울고 싶어요.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서 저녁밥 먹자고 재촉하지만. (『호동거실』 중에서)
이 외에도 〈제10강 우리말 사랑의 노래들〉, 〈제15강 해동도가와 새로운 질서의 모색〉, 〈제16강 다른 목소리들―여성 작가의 출현〉, 〈제20강 중인문학〉, 〈제21강 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들〉, 〈제28강 야담의 성행과 『청구야담』〉, 〈제29강 탈놀이와 민중 의식〉, 〈제31강 여성 주체의 새로운 모습들〉을 통해, 한국고전문학사에 등장한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준다.
넷째, 한국 고전문학 작품의 아름다움과 감동이 생생히 느껴지는 강의이다. 이 책은 거시적 관점에서 한국고전문학사 전체를 통관하고 있지만 지루하지 않으며, 지적 자극과 문예적 감흥이 넘쳐난다. 특히 박희병 교수의 깊이 있고 예리하며 생생한 작품 해석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미처 몰랐던 한국 고전문학 작품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저자는 향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제망매가」와 「찬기파랑가」를 번역하고 해설하여 향가가 가진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우리나라 향가와 동시대에 창작된 일본 단카, 중국 당시와 비교해 수준 높은 향가의 문학 세계를 보여준다.
이렇게 비슷한 시기 동아시아에서 지어진 작품을 음미하며 향가 작품을 들여다보면, 향가에 독자적인 미학이 있고 우리대로의 시학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거보다 이게 낫다, 혹은 이거보다 저게 낫다, 이런 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 독자성이 있습니다. 중국 당시는 당시대로, 일본 단카는 단카대로 그 미적 독자성이 있습니다만, 우리 향가 역시 독특한 미적 지향과 세계가 있다, 이런 걸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_〈제3강 향가, 그 서정의 깊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