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해방과 전쟁 후, 급격한 산업 발전이 부른 변화 속에서 이십세기가 저물 무렵이었다. 시대의 큰 흐름이 용납하지 않았던 우리 전통음악의 예맥은 하염없이 시들어 갔으나, 그 끝자락을 장려하게 수놓았던 마지막 예인들이 있었다.
가야금산조 김난초(金蘭草, 1911-1989), 대금정악 김성진(金星振, 1916-1996), 승무 한영숙(韓英淑, 1920-1989), 판소리 김소희(金素姬, 1917-1995), 가곡 홍원기(洪元基, 1922-1997), 가사 정경태(鄭坰兌, 1916-2003), 서도소리 오복녀(吳福女, 1913-2001), 선소리산타령 정득만(鄭得晩, 1907-1992), 범패 박송암(朴松巖, 1915-2000), 강령탈춤 박동신(朴東信, 1909-1992),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창희(李昌熙, 1913-1996), 통영오광대 이기숙(李基淑, 1922-2008), 고성농요 유영례(柳英禮, 1923-2007), 임실필봉농악 양순용(梁順龍, 1941-1995),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안사인(安仕仁, 1928-1990). 이렇게 열다섯 장르에서 소위 ‘인간문화재’라 불린 국가무형문화재 기예능보유자들이 그 주인공이다. 삼십여 년 전 이들과 소설가 유익서(劉翼?)가 나눈 인터뷰 기록들이 『소리와 춤을 살았더라: 유익서가 만난 십오 인의 우리 명인명창』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산문 형식으로 된 이 글들은, 예인들과 작가가 인터뷰한 시점, 그리고 예인들이 자신의 먼 과거를 다시 회고하는 시점이 겹겹이 교차되어 있어, 한결 다채로운 음률을 만들어낸다.
목차
가야금산조 김난초
대금정악 김성진
승무 한영숙
판소리 김소희
가곡 홍원기
가사 정경태
서도소리 오복녀
선소리산타령 정득만
범패 박송암
강령탈춤 박동신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창희
통영오광대 이기숙
고성농요 유영례
임실필봉농악 양순용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안사인
끝맺으며
명인명창 소개
사진 설명
저자
유익서 (지은이)
출판사리뷰
전통음악을 향한 한 작가의 집념
무릇 전통음악이란 그것이 뿌리 내린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생성과 소멸의 역사를 거듭해 온 수목(樹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백여 년 동안 우리가 겪어 온 격심한 변화들로 전통음악은 우리에게서 너무나 동떨어진 존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국가 통치 제도 및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화에 의해 생활 환경과 인식을 전환하도록 재촉받았고, 이로써 가치관은 물론 지향하는 삶의 방편마저 달라졌다. 육이오전쟁 후에는 산업 중심의 서양 문화를 중심으로 삶을 도모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
전통음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음악과 접목시키는 반가운 사례들도 늘고 있지만, 그럼에도 정작 그 근본인 ‘정통’에 대한 우선적인 이해나 관심은 아쉬운 편이다. 1988년 케이비에스(KBS)와 월간 『음악동아』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음악 선호도 조사에서 서양음악이 99퍼센트, 한국음악이 1퍼센트를 기록한 결과는 이러한 무심함이 오늘날의 일만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이어져 온 것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판소리를 처음 접했던 일화를 들어 “노래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박자나 선율을 갖추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며, 그것이 젊은 시절 자신에게도 낯선 경험이었음을 고백한다. 그 후 전통음악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발품을 팔아 공연을 섭렵하던 중, 우연한 기회로 1980년대 중반 월간 『음악동아』 ‘명인명창을 찾아서’ 연재 기사의 필진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사 년간 전국의 ‘인간문화재’들과 직접 마주하며 전통음악에 관한 관심과 지식을 넓혀 간 저자는, 지금까지 판소리, 대금, 전통 미학 등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을 집필해 오고 있다.
한결같지 않은 삶과 그 성음(聲音)들
이 예인들이 행한 소리와 춤은 구슬프고 애절했고, 은은하고 안온했으며, 때로는 흥겹고 박진감 넘쳤다. 그 처지와 상황도 장르적 특성만큼이나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이는 뱃놀이가 성행한 서빙고에서 나고 자라 자연스럽게 손에 소고를 쥐었고, 어떤 이는 전쟁의 참화로 자식들을 셋이나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열다섯에 탈춤 하나를 바라보고 집을 등진 이도, 생계를 위해 야채전이며 정미소를 꾸린 이도 있었다. 이들이 활발히 활동을 펼쳤던 시기는 크게 192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로, 노년에 든 시기에 진행한 인터뷰에는 한평생 그 흐름에 따라 살고 난 후에야 말할 수 있었던 여러 감회와 감정 들이 배어 있다.
‘죽파(竹坡)’라는 호로 잘 알려진 김난초는 가야금산조의 중시조인 김창조(金昌祖)의 손녀로, “갓난아이 때부터 귀동냥해 온 가락이 그녀의 몸속에 흐르고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정식 수업을 받기 전부터 그 두각을 나타냈다. ‘손재주로는 음은 곱게 낼 수 있다 해도 마음을 흔드는 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기예뿐 아니라 인생살이며 예인의 정신 등을 두루 익힐 수 있었다. 비록 연주 활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아녀자’의 길을 걷기 원하는 주변 사람들의 압박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결국 무대로 돌아가 그 기예를 펼치고 제자를 양성했다. 한편 김소희는 어릴 적 명창 이화중선(李花仲仙)의 노래를 듣고 소리 공부를 시작한 경우로, 일찍이 한성준(韓成俊)을 비롯한 당대 명인명창들의 눈에 띄어 활약할 수 있었다. 평생을 인생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다는 판소리에 매달려 살아온 그는, 순탄하지만은 않은 세월을 보냈음에도 도리어 보람과 긍지로 충만한 생애였음을 이야기한다.
그 시작에 꼭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김성진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관비가 지급되는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에 입학하면서 대금과 인연을 맺은 경우로, 평생 대금 연주에 전념하며 ‘몸을 잔뜩 뒤로 젖힌 채 바람을 견뎌 온 소나무처럼’ 비스듬히 굳어진 자세를 갖게 되었다. 그의 발자취를 증명하는 임명장이며 훈장, 상장들과 내로라하는 제자들이 여럿임에도 불구하고 인생과 예술을 향한 그의 깊은 회한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기숙은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 고향이 아닌 통영에 정착해 우연히 오광대놀이에 참여한 경우로, 독학으로 「춘향전」과 「흥보전」을 떼고 명창 대우를 받았을 뿐 소리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었다.
사람 사는 방편은 여러 갈래라 해도 이들에게는 모두 보통을 능가하는 열성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저자에게 “가진 재능과 정성을 다 쏟아야만 가까스로 그 인사의 세상살이가 하늘의 뜻에 합당하게 영위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겨난 것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에게 남은 음악적 자산
상층 사회에서 정서적 중용을 중요시하며 행했던 ‘바른 음악’인 정악(正樂), 서민 사회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여실히 나타낸 민속악만 비교해도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아리랑 한 가지만 해도 이백오십여 곡에 이를 만큼, 지방마다의 향토색 짙은 노래가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비롯한 춤, 연희 등의 예술이 “생활의 긴장을 풀어 주고 휴식과 함께 재도약할 수 있는 활력소를 제공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졌음을 언급한다. 그리고 “인간이 나고 죽는 세상 어느 곳이나 음률 없는 곳은 없다. 인간의 생득적인 음률 욕구는 노래를 지어 널리 부르도록 충동했다”며, 그것이 일정한 체계를 갖춘 음악으로 자리하기까지의 긴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예인들의 노력과 그 결실도 각 장르에서 주요한 발자취를 남겼는데, 그중 박동신은 황해도 강령 지방에서 연희되어 오던 강령탈춤을 피란 시절 동향인들과 함께 복원한 주역이다. 양순용은 법칙이 엄격한 마을 공동체 농악을 이끌어 간 상쇠답게 지도자적 면모가 엿보인다. 그는 정통 호남좌도농악(임실필봉농악이 속한 농악)을 전승시킨 인물로, 임실필봉농악을 대외로 널리 알리는 데 공헌했다. 이 인터뷰는 임실필봉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로 되기 일 년 전의 일로, “요새 서울에서 유행하고 있는 유사 농악을 저는 ‘포장 농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설장구놀이는 농악과는 실로 거리가 먼 것으로 그냥 ‘놀이’에 불과합니다. 농악기로 서양 음악 연주하는 것처럼 흉내내는 것은 농악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죽이는 행위라 생각합니다”라는 말에서 그가 짊어진 무게가 생생히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예술을 이론화 학술화하려는 노력들도 눈에 띈다. 정경태는 전국을 순유하는 풍류객으로서 ‘정삿갓’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높은 학구열로 각종 연구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지방마다 달리 유포된 시조 가락의 체계를 통일한 시조창법인 ‘석암제(石菴制)’를 만들어 풍류객과 유림 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그밖에도 1948년 『조선창악보』를 비롯한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십여 년 동안 채보한 율음보를 정리한 『국악보』는 열여덟 가지 악기의 율음을 나름 연구 끝에 부호로 만들어 그 율명(律名)으로 곡보(曲譜)를 만든 독특한 성과였다. 한편, 손에 신칼과 요령을 들고 굿을 하는 심방 안사인이 민속학자 현용준(玄容駿)과 약 팔 년간 연구에 몰두했던 이야기도 인상 깊다. 그는 민간에 전승된 무속에 지나지 않았던 영등굿을 학문적 대상으로서 체계화하고 정립해 나갔고, 심방이 물려받은 대로 진행되던 굿이 일정한 체계를 갖추어 나가자 그 바탕에 깔려 있던 신앙의 틀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인터뷰 기록들은 월간 『음악동아』의 ‘명인명창을 찾아서’ 연재 기사 중 장르별로 엄선한 열네 편(1984, 1986-1988)과 월간 『케이블TV』 ‘인물 다큐멘터리’ 연재 기사 중 필자로 참여한 ‘김소희’ 편(1994)에 해당한다. 글은 각 예인들의 장르와 글의 성격 등을 고려해 배치했으며, 인터뷰가 이루어진 시점을 기준으로 서술되어 있다. 연재 당시 지면과 시간의 한계로 부족했던 부분들은 다시 취재하고, 대화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이론적 내용들은 연구 자료를 찾아 보완했다. 더불어 전통예술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원각사(圓覺社)에서부터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국악사양성소 및 그의 전신인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등 음악사적으로 주요한 갈래들이 등장해 이해를 돕는다. 명인명창들의 농익은 모습을 가까이에서 포착했던 사진가 김수남, 이의택 등의 초상사진들도 함께 실려 있다.
무엇보다 모두 세상을 떠나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예인들이기에 그들의 생활과 성품, 인간적 면모를 중점에 두고자 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한편, 생생한 묘사에서 느껴지는 현장감은 그 순간순간들이 소설가로서 마주한 문학적 경험이기도 했음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