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타이완 퀴어 문학 최고의 고전
40년 만에 한국 땅을 밟다
드라마, 연극, 영화, 가극, 무용극으로 각색된 명저
1970년대 타이베이시 신공원에서 형성된 남성 동성애자 그룹의 서브컬처를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동성애자 소년들의 절박한 상황과 심정, 그들과 부모 간의 절절한 감정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 있다.
『서자』는 장편소설로 스스로 동성애자이기도 한 작가가 타이베이 동성애 젊은이들의 삶을 제재로 해서 써내려간 큰 분량의 작품이다. 스스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홀로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하여 이 글을 쓴다”라고 밝혔듯이 가정과 학교로부터 버려진 타이베이의 젊은이들에 관해 묘사한다.
아칭, 샤오위, 쥐, 우민, 아슝 등은 타이베이의 신공원에서 양 사부를 중심으로 불법적인 지하 동성애 왕국을 조직하여 매춘을 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대부분 비정상적인 가정환경과 동성애 성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와서 타락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희망과 동경이 있다. 샤오위는 일본에 가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고 싶어 하며 우민은 연인에게 늘 비정하게 버려지면서도 순수한 사랑을 열망한다. 아칭은 죽은 동생을 그리워하면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의 화해를 꿈꾼다. 그들은 양 사부의 제의로 ‘안락향’이라는 게이바를 차리고 비정한 사회에 자신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려 하지만 끝내 사회의 차별과 냉대로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
목차
화보
제1부 추방
제2부 우리의 왕국에서
제3부 안락향
제4부 그 젊은 새들의 행로
옮긴이의 말
저자
바이셴융 (지은이), 김택규 (옮긴이)
출판사리뷰
타이완 퀴어 문학 최고의 고전
40년 만에 한국 땅을 밟다
드라마, 연극, 영화, 가극, 무용극으로 각색된 명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홀로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하여 이 글을 쓴다.”
_바이셴융
1970년대 타이베이시 신공원에서 형성된 남성 동성애자 그룹의 서브컬처를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동성애자 소년들의 절박한 상황과 심정, 그들과 부모 간의 절절한 감정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 있다.
타이완을 넘어 중화권 현대문학의 거장인 바이셴융白先勇의 『서자?子』(1983)가 출간 40년 만에 드디어 한국어로 번역·출간됐다. 글항아리가 새롭게 선보이는 ‘거장들의 클래식’ 제1권으로 나왔다. 바이셴융은 오래전부터 중국어권을 대표하는 소설가였다. 1999년 홍콩의 유력 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에서 선정한 ‘20세기 중국어소설 100선’에서 바이셴융의 작품집 『타이베이 사람들臺北人』(1971)은 7위를 차지했다. 그 앞의 1~6위는 모두 사망한 작가들의 작품이었으므로 생존 작가 중에서는 그가 으뜸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중국문학자 샤즈칭夏志淸도 그가 “현대 중국 단편소설가 가운데 기재로서 5·4운동 이후 예술적 성취에서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은 루쉰부터 장아이링까지 단 대여섯 명에 불과하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인 『서자孼子』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타이완의 잡지와 싱가포르의 신문에 연재된 후 1983년 타이완 위안징遠景출판사에서 단행본이 출간되었을 때 민감한 소재로 인해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미 바이셴융이 저명한 작가였고 문단 데뷔 이후 여러 편의 퀴어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도 그랬다. 몇 년 뒤 프랑스와 미국에서 번역서가 출판돼 열렬한 반응을 일으키고 나서야 타이완 내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86년 이 작품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가 상영되었고 2003년에는 역시 동명의 드라마가 절찬리에 방영되어 타이완 금종상의 여우주연상, 감독상, 미술상 등을 휩쓸었다. 당시 드라마의 영향으로 연예인과 일반인의 커밍아웃이 줄을 이었으며 가출한 동성애자 자식들에게 “용서해줄 테니 돌아오라”는 말을 전해달라는 부모들의 전화가 방송국에 빗발쳤다고 한다.
바이셴융은 그간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87년 중앙문화사에서 중문학자인 고故 허세욱 교수의 번역으로 바이셴융의 대표작인 『타이베이 사람들臺北人』이 번역된 적이 있으나 몇 편을 골라 선역한 것이며, 책 자체도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으로 루쉰·자오쯔판趙滋蕃의 작품과 묶여 있었다. 그나마 일찍이 절판되어 구해볼 수 없는 상태이지만 허세욱 교수의 좋은 번역으로 바이셴융 문학의 풍부한 묘미가 전달되었던 바 있다.
『타이베이 사람들』이 단편집이라면, 『서자』는 장편소설로 스스로 동성애자이기도 한 작가가 타이베이 동성애 젊은이들의 삶을 제재로 해서 써내려간 큰 분량의 작품이다. 스스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홀로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하여 이 글을 쓴다”라고 밝혔듯이 가정과 학교로부터 버려진 타이베이의 젊은이들에 관해 묘사한다.
아칭, 샤오위, 쥐, 우민, 아슝 등은 타이베이의 신공원에서 양 사부를 중심으로 불법적인 지하 동성애 왕국을 조직하여 매춘을 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대부분 비정상적인 가정환경과 동성애 성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와서 타락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희망과 동경이 있다. 샤오위는 일본에 가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고 싶어 하며 우민은 연인에게 늘 비정하게 버려지면서도 순수한 사랑을 열망한다. 아칭은 죽은 동생을 그리워하면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의 화해를 꿈꾼다. 그들은 양 사부의 제의로 ‘안락향’이라는 게이바를 차리고 비정한 사회에 자신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려 하지만 끝내 사회의 차별과 냉대로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
바이셴융에 대하여
1954년 타이베이. 17세의 고등학생 바이셴융은 학원의 여름방학 대학입시 준비반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수업에 늦어서 허겁지겁 학원 건물 계단을 뛰어 올라가다가 자신처럼 지각한 다른 반 학생과 부딪쳤다. 마른 체격에 갸름한 얼굴의 그 학생은 이름이 왕궈샹王國祥이었고 두 사람은 아마도 처음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신들이 같은 부류의 사람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금세 친해진 두 소년은 같은 대학에 가기로 약속한다. 당시 바이셴융은 장차 타이완과 중국이 통일된 후 중국으로 건너가 산샤三峽댐 건설에 참여하는 것을 꿈꿨다. 그래서 타이난에 있는 청궁成功대학 토목학과에 진학했고 왕궈샹은 같은 대학의 전자공학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바이셴융은 1년 만에 전공이 자기 적성과 안 맞는다는 걸 깨닫고 다시 시험을 봐서 타이완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이에 왕궈샹도 그를 따라 타이완대학 물리학과로 옮겨 간다. 바이셴융은 이후 단편소설 창작과 공개 낭송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왕궈샹은 그의 충실한 독자이자 청중이 된다. 그런데 왕궈샹은 대학 3학년 때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려 2년을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간에 바이셴융은 정성껏 그를 돌봤으며 다행히 그는 건강을 회복한다.
대학 졸업 후 대학 동기들과 잡지 『현대문학』을 창간하고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던 바이셴융은 1962년 모친 별세 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때도 왕궈샹은 바이셴융을 따라간다. 함께 아이오와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바이셴융이 석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대학 샌타바버라 분교의 중문학 교수로 취임하고 나서도 그와 함께했다. 두 사람은 작은 집을 얻고 정원에 이탈리아 측백나무를 심었다. 휴일이면 근처 항구에서 킹크랩을 사와 왕궈샹이 정성껏 요리를 해서 함께 나눠 먹었다. 그렇게 30여 년간 둘만의 행복한 세월을 보내다가 1989년 왕궈샹의 재생불량성 빈혈이 재발한다. 그 후 3년 동안 바이셴융은 왕궈샹을 데리고 미국 각지의 병원을 전전한다. 나중에는 중국의 명의까지 찾아가 치료 방법을 강구하지만 결국 왕궈샹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92년 8월 왕궈샹이 55세를 일기로 사망함으로써 바이셴융은 38년간 벗한 연인을 잃고 만다. 그리고 6년 뒤, 그는 왕궈샹과의 사랑을 기념하는 에세이집 『나무는 이와 같다樹猶如此』를 출간한다.
훗날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바이셴융은 병석의 왕궈샹을 돌보던 때를 회고하며 이런 말을 했다. “당시 누가 내게 히말라야 산꼭대기에 명의가 있다고 했다면 나는 거기에 올라가 신약을 달라고 애걸했을 겁니다. 그때 내게는 왕궈샹의 생명을 구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그는 내 연인이었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자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만회하기 힘든, 유감스러운 일이었죠”라고 말했다.
바이셴융은 62세에 홍콩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에 관해 뚜렷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처음 나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알게 된 후로 내게 동성애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또 『서자』와 관련해서는 “이 작품은 동성애를 다루는 것에 앞서 인간을 다루었습니다”라고도 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주로 1970년대 타이완 타이베이시 신공원에 형성된 남성 동성애자 그룹의 서브컬처를 제재로 삼긴 했지만 그밖에도 그들과 부모 간의 절절한 감정을 깊숙이 조명하고 있다.
나는 『서자』를 번역하는 내내 작가 바이셴융과 그의 아버지의 관계가 어땠는지 내내 궁금했다. 『서자』에는 두 명의 아버지가 매우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한 명은 주인공 아칭의 아버지이고 다른 한 명은 동성애자 아들을 자살로 잃은 푸 어르신이다. 두 사람은 모두 군인 출신으로, 이런 설정은 역시 아버지가 군 장성이었던 바이셴융의 자전적 색채를 보여준다. 바이셴융의 아버지 바이충시白崇禧는 타이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까지 지낸 저명인사였다. 바이셴융은 그의 10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나 어릴 적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며 그 자신도 부모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그런데 훗날 “당신 아버님은 당신의 성 정체성을 아셨습니까?”라는 여러 인터뷰어의 질문에 바이셴융은 각기 다른 답을 내놓았다. 한 번은 “모르셨지만 만약 아셨어도 그분은 자식들의 사생활을 존중했기 때문에 아마 이해해주셨을 겁니다”라고 했고 또 한 번은 “나의 특수한 성향을 아셨지만 그래도 나를 존중해주셨습니다”라고 했다. 바이셴융은 왜 이렇게 다른 말을 했을까? 또 둘 중 어느 쪽이 진실일까? 나는 둘 다 진실이며 바이셴융은 그 진실의 서로 다른 면을 말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바이셴융은 이미 미국으로 떠나기 전부터 「월몽月夢」 「외로운 17세寂寞的十七歲」 같은 퀴어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그리고 평소 자식을 사랑했던 아버지 바이충시가 아들의 성 정체성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따라서 바이충시는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언급하지 않고 묵인해준 것이라 생각한다. 보수적인 군인이었던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바이셴융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가 미국에 있을 때 급환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훗날 그는 어느 지면에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았던 때를 회상한다. 당시 한 달여 전 아내를 여읜 그의 아버지는 고희의 노구를 이끌고 공항에 나가 아들의 미국행을 전송한다. 멀리 떠나는 아들 앞에서 그는 뜻밖에도 눈물을 보였다. 그 당당했던 군 장성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