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흔한 책’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던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의 저자가 이번에는 ‘귀중한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돌아 왔다. 귀중본 고서가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각각의 책들은 어떤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목차
시작하며 - 귀중본이란 무엇인가
1부 조선시대 인쇄술의 명암
1 목판인쇄의 진실_ 팔만대장경과 유교 책판
2 조선의 스테디셀러_ 《포은집》
3 무엇을 위한 금속활자인가_ 《북헌유고》
2부 환영받지 못한 반환 문화재
1 기록을 지배하는 자, 권력을 차지한다_ 《난여》
2 시간의 저울_ 《주형》
3 사랑의 역사_ 《정사유략초》
4 다른 생각, 다른 말, 다른 행동_ 《남화경주해산보》
5 누워서 떠나는 여행_ 《명산기》
3부 인생의 한순간을 기억하며
1 한 번 동기는 영원한 동기_ 《사마방목》
2 황하가 마르고 태산이 닳도록_ 《선무원종공신녹권》
3 60년의 세월을 돌아보며_ 《영조사마도》
4 국왕의 그림자, 승정원 승지들의 애환_ 《은대창수시》
5 금강산의 봄_ 《금강록》
6 인생의 이력서_ 《남계선생연보》
7 황제의 유물에 얽힌 비밀_ 《황사매책시문첩》
4부 명문이란 무엇인가
1 신라인, 세계로 진출하다_ 《협주명현십초시》
2 1478년판 한국문학전집_ 《동문선》
3 퇴계는 과연 위대한 인물인가_ 《퇴계잡영》
4 수석합격자의 모범 답안 모음집_ 《동국장원책》
5 문화 외교의 기록_ 《황화집》
5부 쓸모 있는 책
1 매사냥의 바이블_ 《응골방》
2 굶주림과의 전쟁_ 《중간구황활민보유서》
3 효도를 실천하는 법_ 《수친양로신서》
4 편안하면 위태로움을 생각한다_ 《진법》
5 호기심 많은 조선시대 의관의 연구노트_ 《소문사설》
6 지옥을 피하는 방법_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
7 우리 동네 역사책_ 《훈도방주자동지》
마치며 - 귀중한 책의 역사는 계속된다
저자
장유승
출판사리뷰
조선시대 인쇄술과 목판 인쇄의 실체
본격적인 귀중본 이야기에 앞서 저자는 조선시대 인쇄술의 실체를 먼저 짚어 본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활자인쇄가 발달한 이유는 인구가 적은 나라에서 다양한 책을 생산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 출판기술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구텐베르크보다 2백 년 앞선다는 한국 금속활자의 실체이다. 또한 팔만대장경은 책을 찍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호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목판이 결과물이고 책이 부산물이다. 팔만대장경 목판은 300평의 공간을 차지하지만 인쇄물은 2평이면 충분히 들어간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유교 책판 역시 ‘인쇄 도구’가 아니라 ‘학문과 권위의 상징’일 뿐이다. 활자본 문집은 목판본 문집 간행을 위한 중간 단계로서 배포용이 아닌 보관용으로 많은 부수를 인출(활자를 조판하고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일)하지 않았으며, 목판본 문집 역시 광범위한 유통을 입증할 증거를 찾기 어렵다. 목판의 수명은 고작해야 30년이었으며, 목판본 문집 간행의 목적은 문집의 유통이 아니라 판목의 판각과 보존에 있기 때문에 학문의 소통이나 전승, 담론 형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책보다 판목을 중시하는 관념은 조선시대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조선 말기까지 목판인쇄를 고집한 이유였습니다. 판목을 아무리 소중히 보관한들, 그 자체로는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판목은 그것이 책으로 바뀌어 널리 보급될 때 비로소 가치를 발휘하는 법입니다. 그 속에 아무리 수준 높은 지식이 들어 있어도 책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팔만대장경과 유교 책판은 지식의 보급에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지식이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였으니 당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팔만대장경과 유교 책판의 실체입니다.”
‘조선의 스테디셀러’부터 ‘우리 동네 역사책’까지
26종의 귀중본 이야기
책에는 조선 시대 최다 간행 문집이자 스테디셀러였던 정몽주의 《포은집》부터 조선 후기에 귀중한 사료로 이용되었던 ‘우리 동네 역사책’ 《훈도방주자동지》까지 26종의 귀중본이 소개된다. 각각의 책에 담긴 사연과 역사적 맥락, 책의 저자와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리고 책의 내용에 대한 인용이 어우러져 흥미를 자아낸다. 특히 저자의 꼼꼼한 자료조사와 고서에 대한 남다른 전문지식에 힘입어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책에 소개된 귀중본 몇 편을 들여다보자.
기록을 지배하는 자, 권력을 차지한다_《난여》
조선시대에도 ‘조보’라고 하는 관보가 있었다. 국왕의 명령, 신하의 보고, 조정의 주요 결정 사항, 신하들의 논쟁이 실린다. 조보는 낱장의 문서 형태라 이렇게 만든 책의 제목에 찢어진 조각을 뜻하는 ‘난(爛)’자가 붙는데 《난여》도 그중 하나이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환수된 852책 가운데 하나로서 귀중본으로 분류되지만 《난여》를 비롯해 당시 환수된 책들은 당시에도 지금도 관심을 받지 못한다.
《난여》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가 만든 책으로 노론으로서 평생을 당쟁의 와중에서 보낸 김재로의 파란만장한 정치적 역정의 산물이다. 경종의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그 기간 동안 노론은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4년’이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세력은 으레 ‘적폐 청산’을 시도한다. 노론은 경종 재위 기간 동안 소론이 저지른 만행을 속속들이 기억해 두었다가 요긴하게 사용하고자 《난여》를 만들었다. 특히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영조) 왕세제 책봉문제로 충돌한 신임사화와 관련된 기록이라면 실록보다 자세할 정도로 가리지 않고 모았다.
김재로는 《난여》를 통해 신임사화의 책임은 소론에 있으며 노론은 억울한 희생자라는 이른바 ‘신임의리’를 확고히 정립한다. 기록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차지하는 법. 김재로 가문이 4대에 걸쳐 여섯 명의 정승을 배출하며 영조와 정조조에 권력을 잡았던 배경에는 《난여》와 같은 기록의 힘이 작용했다.
한 번 동기는 영원한 동기_《사마방목》
조선시대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을 사마시,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 명단을 ‘사마방목’이라고 한다. 사마시 합격은 가문의 영광이며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평생을 함께할 동기이므로 합격자에게는 사마방목이 꼭 필요했다. 책에 소개된 1573년 사마시 합격자의 명단인 《사마방목》은 일종의 동기수첩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문헌이고 금속활자 을해자로 간행되어 귀중본으로 지정되었다. 책의 표지를 넘기면 시험관들의 관직과 성명이, 그다음에 합격자 명단이 성적순으로 실려 있으며 합격자의 신분과 성명, 자(字), 생년, 본관, 거주지, 부친의 관직과 성명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생원시 1등급 다섯 명과 합격한 동기 187명의 인생행로를 추적해본다. 출세한 동기도 있고 몰락한 동기도 있으며, 임진왜란을 거치며 의병장으로 활약하거나 목숨을 잃은 이도 있다. 전란이 끝난 1602년, 생원 84등으로 합격했던 홍이상이 안동 부사로 부임하여 우연히 동기를 만나 안동에서 동기모임을 열기로 한다. 14명이 모였다. 이날 모임의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 바로 〈계유사마동방계회도〉이다. 이들은 1614년에도 모임을 가져 40년 가까이 합격자 모임을 이어 왔다.
흥미로운 것은 사마시에 합격하고도 문과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시 장원이 동기회장을 계속 한다는 것. 관직으로 가는 첫 관문인 사마시를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다. 출신학교를 능력보다 눈여겨보는 요즘의 세태와도 겹친다.
퇴계는 과연 위대한 인물인가_《퇴계잡영》
우리나라 화폐 천 원권에 들어가 있는 퇴계 이황은 과연 위대한 인물인가? 퇴계의 생애와 저술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퇴계잡영》은 퇴계가 은퇴를 결심한 1546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1565년까지 지은 시를 엮은 책으로 1576년 간행되었고 퇴계의 친필을 그대로 모각했기 때문에 귀중본으로 분류된다.
1610년 퇴계는 선조 임금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묘 배향은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광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퇴계의 위대함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당시 그의 제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퇴계가 다른 유학자들보다 학문적으로 우수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퇴계가 활동하던 시기가 주희의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정착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퇴계가 남긴 저술 역시 주자학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독창적인 사상을 담은 책은 아니다. 퇴계가 위대한 점은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든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고려 말기에 수입되었지만 퇴계 이전까지는 이해가 부족했다. 퇴계가 은퇴를 결심한 1543년, 주희의 저술을 종합한 《주자대전》이 조선에서 처음 간행되었다. 퇴계는 이 책에 심취해 은퇴를 결심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 결과, 퇴계의 주자학 이해는 당시 조선에서 독보적인 수준에 올랐다. 퇴계는 주자학의 ‘얼리어답터’였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퇴계 이후 조선 유학자들의 성리학 이해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전국 각지에 서원이 세워지고 향약이 보급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