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읻다가 준비한 한여름의 오마카세 소설
『여름기담: 매운맛』, 『여름기담: 순한맛』 전 2권 출시!
취급은 취향껏, 개봉 후 서늘한 응달에서 읽으세요
열대야와 장마의 계절 여름, 이름 모를 불안감과 지루함에 뒤척이는 당신을 위해 8인의 작가가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놓는다. 심연의 공포와 불안을 끄집어내는 『여름기담: 매운맛』, 겁이 많은 독자들도 함께 읽을 수 있는 기기묘묘하고 엉뚱한 『여름기담: 순한맛』이 각각 읻다에서 출간되었다.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는 속설처럼 속이 아릴 것을 알고도 기어코 꺼내 들게 될 백민석, 한은형, 성혜령, 성해나 작가의 ‘매운맛’ 소설 네 편을 소개한다.
목차
백민석
나는 나무다 ‥‥ 9
공포는 현실에 ‥‥ 40
한은형
절담 ‥‥ 47
방생 ‥‥ 87
성혜령
마구간에서 하룻밤 ‥‥ 93
다리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 127
성해나
아미고 ‥‥ 133
2058년 13월 ‥‥ 157
저자
백민석, 한은형, 성혜령, 성해나 (지은이)
출판사리뷰
“하지만 내가 봤고, 나는 증언한다”
〈나는 나무다〉
그 사내는 내 발밑에 묻혔다. 사내들은 자기들이 입을 다물면 그 일이 영원히 잊힐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내가 봤고, 나는 증언한다. 그의 살덩이와 골수는 녹아내려 내 이파리와 줄기들로 흘러들었고 짙은 갈색으로 내 나이테에 새겨졌다.
─18쪽, 〈나는 나무다〉 중에서
신록의 숲을 이루는 울창한 이파리들이 모두 나무의 부릅 뜬 눈이라면? 화자 ‘나무’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무에 함부로 기대어 울지 말 것.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 곳에서도 패악을 벌이지 말 것. 자신의 뿌리 밑에 시체를 묻지 말 것. 하지만 나무의 말은 인간에게 들리지 않고, ‘나’의 뿌리 밑에는 더 많은 ‘진실’이 쌓이고 분해되어 나이테에 새겨진다. 550여 년간 감지 않은 눈으로 목격한 인간의 세태를 나무는 한결같이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약속하고 먼저 떠나간 이를 애도하는 존재인 동시에 끝을 모르고 치닫는 악의 현현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헤아릴 수 없이 빼곡하게 묻혀 있던 진실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데…….
대대로 내려오는 괴담은 시대의 불안을 반영한다. “공포는 현실에, 이 사회에, 소설의 바깥에” 있다는 백민석 작가의 말처럼 〈나는 나무다〉는 “자기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진실만을 찾는” 시대의 병증을 파괴적인 이미지와 통렬한 시선으로 역설한다.
“이것은 내가 절에서 겪은 이야기다”
〈절담〉
이것은 내가 절에서 겪은 이야기다. 절에서만 겪은 건 아니고 절을 나와서도 겪은 이야기. 스님과 절밥이, 절밥과 절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 그러니까 절담이라고 해야겠지.
─85쪽, 〈절담〉 중에서
이 글은 “‘나’가 나오는데 그 ‘나’가 실제의 나인 이야기”다. 서두에 쓰인 이 선언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허구로 받아들일 것인지 독자에게 몫을 넘긴다. 10년 차 소설가 ‘나’는 어느 날 아는 기자의 소개로 ‘사찰 음식의 대가’라는 한 스님을 만나게 된다. ‘나’의 눈에 비친 스님은 청빈한 종교인과는 정반대의 인물로 사업 수완이 좋고, 외제차를 타며, 타코집을 즐겨 찾는, 보기 드물게 “현란한 화술을 구사하는” 스님이다. 화자 ‘나’는 스님의 모든 말을 하나의 징후처럼 느끼고 만남 끝에 스님은 “나 누군지 알겠어요?”라고 묻는다. 다음 날 ‘나’는 문득 잊고 있던 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대학 동기와 잠시 절에서 머물렀던 일, 그 절의 음식이 끔찍하게 맛이 없었고, 스님 대신 절의 모든 살림을 도맡았던 공양주 보살과 그의 어린 딸에 대한 기이한 기억. 스님을 다시 만났을 때 둘에 대해 묻자, 스님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 절은 원래 나 혼자였다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하고 그러는 게 다 수행입니다.”라고 답한다.
진정한 홍매는 붉은 게 아니라 사실 검다. 한은형 작가의 〈절담〉은 일상적인 대화의 수면 아래 감춰진 비밀과 검은 홍매가 흐드러진 기이한 절의 살풍경을 그리며 온전할 것이라고 믿어온 기억의 경계를 위협한다.
“문진은 별장에서 냄새가 난다고 믿었다”
〈마구간에서 하룻밤〉
문진은 별장에서 냄새가 난다고 믿었다. 주위가 아주 고요한 날, 바람조차 불지 않을 때면, 오래 묵은 건초에 섞인 동물의 분뇨 냄새가 슬그머니 피어올라 문진을 거슬리게 했다.
─94쪽 〈마구간에서 하룻밤〉 중에서
주인공 ‘문진’은 항암치료를 마친 후 생전에 외할아버지가 지었던 마구간을 개조한 별장에서 머물고 있다. 그는 딸이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건넸던 “엄마 잘 살아”라는 인사처럼 별장을 팔고 “혼자 잘 살아남아” 보기로 한다. 그 전에 5년 전 같은 병실에서 나란히 항암치료를 받았던 ‘순연’과의 관계를 먼저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그는 문진에게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밥을 먹었는지 궁금해하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수상한 약과 물건을 강매시키고 조금씩 돈을 꿔가는 유해한 사람이었다. 순연은 돈을 갚아달라는 문진의 연락을 받고 기어코 별장 앞으로 찾아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갑게 인사를 건네며 별장 안으로 들어선다.
성혜령 작가의 〈마구간에서 하룻밤〉은 ‘가족’이라고 불렀던 이들이 모두 나의 곁을 떠나고 홀로된 자리에 선량한 얼굴을 한 타인들이 찾아오는 이야기다. 순연을 시작으로 하나둘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별장을 찾아오기 시작하고,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관계와 공간이 뒤틀리며 나의 의지로는 깰 수 없는 악몽이 계속 이어진다.
“이곳엔 인간이 몇이나 될까”
〈아미고〉
저들은 모르겠지만, 당신은 무사할 거예요, 아미고.
─141쪽 〈아미고〉 중에서
고도로 발달한 AI가 나의 미래마저 오차 없이 예측한다면 그 신적인 존재 앞에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공지능 스피커가 비서의 역할을 대신하고 무인 우버가 상용화된 멀지 않은 미래 시대, 주인공 ‘죠’는 촬영 현장의 유일한 스턴트맨이다. 촬영 중 큰 사고를 겪은 뒤 돌아온 현장에는 사람 대신 ‘야키마 H1’이라는 로봇이 디렉터스 체어에 태평하게 앉아 있다. 과거에 그 로봇을 처음 보았을 때 ‘죠’는 괴기함과 이질감을 느꼈지만 동료들은 그것을 ‘아미고(친구)’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대기 시간에 동료들은 로봇과 나에게 스파링을 부추기고, 그때까지만 해도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던 야키마 H1은 나의 주먹에 족족 맞는다. 맥없이 쓰러진 로봇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다가갔을 때 그것은 나의 귀에 또박또박 속삭인다. “저 얼굴들을 잘 기억해 둬요. 그리울지도 모르잖아요.” 그의 예언대로 학습을 거듭한 로봇이 촬영 현장을 점거하고 동료들은 모두 실직자가 되었다. 다시 만난 야키마 H1은 나에게 한 번 더 자신이 예측한 미래를 말해주는데…….
성해나 작가의 〈아미고〉는 “미끈하고 잡음 없는 삶”에 익숙해진 한 인물이 이명처럼 울리는 실체 없는 두려움에 몸을 담그는 이야기다. 작가는 “불투명하고 흐릿한 무엇이 선명한 윤곽을 드러낼 때, 인간이 어떤 공포를 느끼는지 나는 알고” 있으므로 호기심으로라도 그것을 함부로 들춰보지 않을 것을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