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프랑스의 위대한 예술가
오노레 드 발자크, 루이 후아르트, 앙리 모니에의
날카롭고 기묘한 문학 시리즈, 인간 생리학 5부작!
tvN 알쓸인잡 김영하를 사로잡은 오노레 드 발자크와
200년 전 프랑스 예술가들의 통찰력, 현대의 한국 사회를 꿰뚫어 보다
페이퍼로드가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한 생리학 시리즈 5부작을 출간했다. 생리학이라는 문학 장르는 명언이 솟구치는 풍자문학의 보고이자 사회 풍속 연구의 백미로 꼽힌다. 생물학적 생리학과는 다른 개념이며, 사회의 이치를 실증적으로 해석한다. 『기자 생리학』, 『공무원 생리학』, 『부르주아 생리학』, 『의사 생리학』, 『산책자 생리학』으로 이뤄진 프랑스 생리학 5부작은 발칙하고 대담한 상상력으로 격변기 프랑스에 명멸한 인간 군상과 사회현상, 직업군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묘사했다. 이 시리즈에는 프랑스혁명과 반혁명, 나폴레옹 시대가 폭풍처럼 몰아친 프랑스의 유례없는 사회 변동 양상이 응축돼 있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담겨있다. 지지부진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작가와 저널리스트들은 생리학이라는 형식을 빌려 사회 전반에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댔다. 팬데믹 위기와 유례없는 불황, 사회 갈등의 고조 등으로 분기점을 맞고 있는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데도 심오한 통찰을 제공한다.
tvN 알쓸인잡의 김영하도 주목한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공무원 생리학』은 발전하는 사회 속에서 퇴보와 비효율 그 자체인 공무원과 그 조직을 분석한다. 200년이 흘렀지만 한국의 공무원 사회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위대한 문호인 발자크는 공무원을 풍자하면서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을 저격한다. 마치 논문처럼 정의를 제시하고 명제를 밝히는가 하면 잇달아 파생 명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진지한 분류법으로 공무원을 분류하고, 공무원과 정치인의 차이를 세심하게 묘사한다. 공무원에서 정치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단계별로 그리며 공무원 사회 내의 온갖 직급 체제가 갖는 비극성과 희극성을 속속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폭로한다.
목차
『기자 생리학』
『공무원 생리학』
『부르주아 생리학』
『의사 생리학』
『산책자 생리학』
저자
오노레 드 발자크, 앙리 모니에, 루이 후아르트 (지은이), 류재화, 김지현, 홍서연 (옮긴이)
출판사리뷰
tvN 알쓸인잡 김영하를 사로잡은 오노레 드 발자크와
200년 전 프랑스 예술가들의 통찰력,
현대의 한국 사회를 꿰뚫어 보다
페이퍼로드가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한 생리학 시리즈 5부작을 출간했다. 생리학이라는 문학 장르는 명언이 솟구치는 풍자문학의 보고이자 사회 풍속 연구의 백미로 꼽힌다. 생물학적 생리학과는 다른 개념이며, 사회의 이치를 실증적으로 해석한다. 『기자 생리학』, 『공무원 생리학』, 『부르주아 생리학』, 『의사 생리학』, 『산책자 생리학』으로 이뤄진 프랑스 생리학 5부작은 발칙하고 대담한 상상력으로 격변기 프랑스에 명멸한 인간 군상과 사회현상, 직업군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묘사했다. 이 시리즈에는 프랑스혁명과 반혁명, 나폴레옹 시대가 폭풍처럼 몰아친 프랑스의 유례없는 사회 변동 양상이 응축돼 있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담겨있다. 지지부진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작가와 저널리스트들은 생리학이라는 형식을 빌려 사회 전반에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댔다. 팬데믹 위기와 유례없는 불황, 사회 갈등의 고조 등으로 분기점을 맞고 있는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데도 심오한 통찰을 제공한다.
tvN 알쓸인잡의 김영하도 주목한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공무원 생리학』은 발전하는 사회 속에서 퇴보와 비효율 그 자체인 공무원과 그 조직을 분석한다. 200년이 흘렀지만 한국의 공무원 사회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위대한 문호인 발자크는 공무원을 풍자하면서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을 저격한다. 마치 논문처럼 정의를 제시하고 명제를 밝히는가 하면 잇달아 파생 명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진지한 분류법으로 공무원을 분류하고, 공무원과 정치인의 차이를 세심하게 묘사한다. 공무원에서 정치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단계별로 그리며 공무원 사회 내의 온갖 직급 체제가 갖는 비극성과 희극성을 속속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폭로한다.
『기자 생리학』은 문단과 언론을 향한 무차별적인 고발이 아니라, 저널리스트로서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처절하게 해체하고 탐구한 끝에 얻어낸 발자크의 연구서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휘두르는 기자들과 내뱉으면 말인 줄 아는 비평가들을 기생충이라며 신랄하게 독설을 꽂는다. 루이 후아르트는 『의사 생리학』에서 지극히 과학적인 풍자를 통해 상업주의와 엘리트 특권의식에 빠진 의사를 풍자한다. 의사, 약사, 의료기기 회사와 언론, 정치인까지 얽혀 들어가는 이 거대한 카르텔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그저 먼 나라의 과거로만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하다.
어떤 것이 완벽한 산책일까? 『산책자 생리학』에서는 산책자의 도시이지만 진정한 산책자는 없는 파리를 조롱한다. 진정한 산책이란 생각은 많이 하고 말은 적게 하며, 혼자서도 잘 놀고 피곤할 때는 쉬어 갈 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과 귀에는 상품과 이미지가 홍수처럼 쏟아져 대도시의 자본주의적인 삶에서 벗어나 산책할 수 없다. 『부르주아 생리학』의 저자 앙리 모니에를 두고, 발터 벤야민은 “자기 자신을 관찰할 줄 아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속물”, “생리학의 거장”이라 칭하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지성이 결여된 채 부에 따라 나뉜 계층은 더욱 견고해져 세대, 종교, 젠더, 빈부 갈등을 낳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참 지성인을 찾기 어려운데,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앙리 모니에는 그 자신이 부르주아이지만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부르주아를 풍자한다.
19세기 프랑스나 한국이나 다를 바 없다.
공무원 사회를 치밀하게 꿰뚫는 대문호의 르포르타주!
개혁의 시대, 기대와 불만이 탄생시킨
생리학이라는 새로운 풍자 문학
지금부터 대략 200년 전 프랑스에서는 의학용어의 이름을 빌린 생리학Physiologie이라는 기묘한 문학 장르가 생겨났다. 당시 사회는 일종의 격변기였다. 절대 왕정을 몰락시킨 프랑스 혁명이 다시 나폴레옹이란 전제군주를 탄생시킨 뒤 군주제로 퇴행해버렸고, 그 퇴행을 극복할 새로운 혁명들이 기존 계급을 허무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한편, 급격히 이루어진 과학의 발전은 상업의 득세와 함께 자본주의를 권력의 유력한 한 축으로 새로이 편입시켰다. ‘~의 생리학’이라는 이 기이한 문학 장르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급격한 사회 변화, 새로운 시대에의 기대, 지지부진한 개혁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탄생시킨 시대의 풍자 문학인 것이다.
기존의 관념과 학문이 더는 인간사회를 분석할 수 없을 때, 마치 동물이나 식물을 연구하듯 인간 혹은 인간 유형을 치밀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하겠다는 야심만만한 발상이 이 장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그 나름의 생존방식에 따라 생리적 기질대로 살아가며, 이를 분석, 분류함으로써 사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그리고 익히 알고 있듯, 이는 발자크가 “인간 희극” 연작을 집필한 의도와 정확히 일치하며, 실제로도 발자크 역시 익명의 작가들이 가득한 이 생리학이라는 장르 속에서 이름이 드러난 몇 안 되는 필진 중 하나로 찬연히 빛나고 있다. 날카로운 풍자와 치밀한 분석을 주 도구로 삼을 수 있는 생리학이라는 장르에서 발자크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필력을 거침없이 자랑해낸다.
“공무원이란 무엇인가?”
소설가의 펜을 빌어 탄생한 또 하나의 『사회계약론』
책에서 발자크는 정권의 교체기와 새로운 체제의 형성기를 동시에 겪고 있는 당시 공무원 사회를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호쾌하게 해부해낸다. 책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공무원이란 무엇인가? 어느 직급에서 시작해서 어느 직급에서 끝나는가?” 이 문장이 겨냥하는 궁극의 과녁은 바로 프랑스 국왕이다. 혹자는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1789년이 아니라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출간한 1762년으로 잡기도 한다. 역사에 남을 대혁명조차 발단은 거창한 행동이 아닌 발상의 변화에서부터 일어난다. 공무원의 현실 역시 국왕조차 공무원이며, 공무원 사회에 편입할 수 있다는 새로운 시대의 발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많은 새로운 변화가 그러하듯, 이 변화 역시 마냥 긍정적 결과만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이처럼 발자크는 이 책의 전제로서, 국왕조차 국가 세비를 받는 공무원에 불과하니 일정한 법의 감시망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확고하게 명시하면서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세법과 형법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나름 이상적 사회’인 공무원 사회를 반어법적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있을 군상들을 맨 윗자리부터 가장 아래의 자리, 그리고 공무원이지만 공무원은 아닌 ‘비정규직’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직책별, 유형별로 하나씩 묘사해낸다. 마치 동물이나 식물 종을 품종이나 서식지에 따라 분류하고 서술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동물을 육식동물과 초식동물로 나누고 다시 육식동물은 사자, 치타 등으로 분류해 묘사하듯, 이 책은 숱한 공무원 품종의 생태와 특성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특별비서관은 “젊고 유능한 청년”으로 장관 대신에 기자의 표적이 된다. 그리고 언제든 장관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장관이 해야 할 “예와 아니오”를 대신 말해준다. 그러다 마침내 장관과 서로 거리낌 없이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이가 되며, 둘 사이의 거리감과 함께 양심도 내려놓는다.
사회의 발전 속에서
퇴보와 비효율의 길을 걷는 공무원이라는 종을 분석하다
다윈보다 앞서 나온 발자크식 『종의 기원』
기대와 불만이 가득한 180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 ‘생리학’이라는 장르는 대중의 지지를 강하게 받는 장르였다. 사실주의라는 문학의 쓰디쓴 정수에 카툰이라는 연유를 섞은 이 장르는 마치 여름날의 까페라떼처럼 당시 사회에 맹렬히 퍼져나갔다. ‘생리학’이라는 과학의 향취를 풍기는 용어를 빌려왔듯, 이 책의 구성은 마치 하나의 학술 논문처럼 얼핏 보기에는 치밀해 보인다. 공무원의 정의와 분류, 습성(?)에 대해 마치 논문처럼 정의를 제시하고 명제를 밝히는가 하면 잇달아 파생명제를 제시한다. 자못 진지한 분류법으로 공무원을 파리 공무원과 지방 공무원으로 나누는가 하면, 지사와 공무원, 지사와 정치인의 차이를 세심하게 구별한다. 군인과 공무원을 구분하기도 하고, 공무원에서 정치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단계별로 폭로하며 공무원 사회 내의 온갖 직급 체제가 갖는 비극성과 희극성을 속속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묘사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뻔한’ 논문 형식을 조롱하듯 그 안을 풍자와 예시로 가득 채워댄다.
가상의 인물, 실존의 인물들이 실제와 가상의 직책을 받아 장관 아무개 씨, 발송직원 아무개 씨, 실장 아무개 씨로 책 속에서 생생하게 묘사된다. 이들이 드러내는 것은 마치 문명과 사회의 진보 같고, 전제군주 시대 이후의 합리적 체제 같았던 현대 공직사회의 뒤에 숨어 있는 수많은 모순과 적폐들, 그것도 생계와 일상이라는 이름을 입어버린 모순과 적폐들이다. 시대정신에 따르면 분명히 이상적이었을 공직 사회의 모습이 이렇듯 진화 아닌 진화를 해나가 비대해지고, 비효율적으로 변하며, 그들만의 사회로 침잠해 더욱 부패하가는 모습은 인간 종 중 하나일 공무원이라는 종에 대한 관찰 기록으로서도, 또한 그 자체가 담고 있을 함의 그 자체로서도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하다. 그리고 하나의 종의 이 장엄하고도 불쾌한 모습을 담은 이 책이 다윈의 『종의 기원』보다도 수십 년 먼저 나왔다는 현실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잠시 동안 감탄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공무원은 안녕하신가?
200년의 세월을 넘어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모습이 200년 뒤의 우리가 보기에도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실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인의 아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다면 어디어디의 공무원을 만나라”라든가 “공무원이 되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어야 공무원이 될 수 있다”, 혹은 “국가가 다수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하면서부터 국가가 비인간적, 맹목적으로 변해간다”는 주장은 오늘날의 관점으로도 지극히 시사적이다. 필요한 공무원은 찾아가도 늘 자리에 없다든가, 국가는 매번 같은 자리에 건물을 세우고 허물기만 반복한다는 주장은 우리가 공무원에 대해 불평하는 말 그대로다. 한편, 직책에 따른 공무원의 일생 묘사 역시 우리가 아는 공무원의 일생과 전혀 다른 바가 없다.
평범한 공무원 생활을 보내 쓸쓸히 은퇴하는 소시민의 모습과, 때론 공직 사회의 가장 소외된 곳에서, 묵묵히 일만 하며 인생의 좁은 길만 걷는 이들을 언급하는 발자크의 문장은 짧고 간결하면서도 우리 마음속에 큰 멍을 터 오르게 만든다. 파리의 어느 추운 날, 매서운 비나 눈을 뚫고 어두운 얼굴로 새벽같이 출근하는 사람을 보며 발자크는 이렇게 외친다. “아, 비정규직이시구나!” 그리고 때론 소설 같은 생생한 묘사를 담고, 때론 사설처럼 날카로운 풍자를 담으며, 전체적으로는 마치 체계적인 학술 논문인 듯한 ‘척을’ 하고 있는 『공무원 생리학』이라는 이 특이한 글은 오늘날에도 당연히 유효할 다음과 같은 글로 ‘거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도덕 및 정치학 아카데미는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 자에게 상을 줘야 할 것이다. “다음 중 최상의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적은 공무원으로 많은 일을 하는 국가인가, 아니면 많은 공무원으로 적은 일을 하는 국가인가?”
- 본문 200쪽, ?생리학이 주는 교훈? 중에서
그 누구도 발자크의 펜 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처절한 기자 정신으로 자신마저 해체한 대문호의 풍자와 독설!
기자와 언론의 생리를 직격하는 저널리즘의 고발장이자
명언이 솟구치는 풍자 문학의 전범!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반복된 학습의 결과물이다. 1913년 존 브로더스 왓슨은 관찰과 예측만으로 인간은 물론 동물의 심리까지 객관적으로 유출할 수 있다는, 이른바 행동주의 이론을 발표했다. 그는 심리학의 엄격한 자율성을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행동만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생물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반세기 전 프랑스에서도 일어났다. 바로 19세기 파리 전반을 풍미한 생리학Physiologie이다.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이 장르는, 당대 부르주아와 파리지앵을 단골 소재로 각계각층의 여러 인물상을 묘사하고 풍자함으로써 다양한 사회 현상을 통찰하는 게 특징이다.
그 중심에는 인간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데 천부적인 자질을 지닌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가 있었다. 그는 특유의 풍자법과 과장된 수사법으로 자신의 필력을 가감 없이 발휘한다. 발자크의 눈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비난부터 쏟아내는 ‘논객’이나 기본적인 예술 소양도 갖추지 못한 ‘비평가’ 모두 “프랑스라는 피부에 달라붙어 사는 기생충”에 불과하다. 저널리즘 종의 유일한 학습 능력은 오로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다. 혹자는 이 책, 『기자 생리학』을 대문호가 창조한 픽션이라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처절한 기자 정신으로 언론의 생리를 끈질기게 파고든 자의 고발장이다. 분명한 건 그 누구도 발자크의 펜 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것이다.
저널리즘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그 속의 본질을 적확하게 꿰뚫다
발자크가 살던 집의 출입문은 두 개였다. 평생 빚더미에 허덕여야 했던 그는 날마다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 뒷문으로 도망쳐야만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나는 펜으로 정복하겠다”라고 자신을 다잡을 만큼 습작에 열성을 보였던 그는, 첫 작품 『크롬웰』의 실패 이후 소설보다는 저널리즘이 돈이 된다고 판단해 문학판을 떠난다. 이후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는 저널리즘에 매료된다. 인간의 삶과 생존 방식에 대해 치밀하게 파고드는 그가 언론의 생리에 둔감할 리 없었다. 한때 “저널리즘이야말로 인간 지성의 총체”라 칭송할 정도로 발자크는 언론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쩌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권력이야말로 내리막길로 치달은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카드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발자크와 저널리즘의 관계가 뒤틀린 건 비단 『키뇰라의 재력』 초연 당시 파리 신문과 잡지가 쏟아낸 혹평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자신이 창간한 『르뷔 파리지엔』이 3회 만에 파산한 게 직접적인 도화선이었다. 편집, 인쇄, 조판까지 언론이 탄생하는 전 과정에 참여했음에도 별다른 성과 없이 실패하자 그는 자신이 저널리즘 세계로부터 패배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때 시작된 저널리즘에 관한 분노와 원망은 『기자 생리학』의 집필로 이어진다. 그는 “다른 이들은 글을 너무 많이 써서 논객인데, 이 자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논객”이라고 신문사 주필을 꼬집고,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언론을 향해 “지금 파리 사설에는 상투적인 연설 투 같은 관습에 찌든 미사여구만 있을 뿐”이라며 날카로운 문장을 내리꽂는다. 자신을 공격한 비평가에 대한 증오가 저널리즘의 존재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발자크가 묘사하는 언론의 생리는 통쾌하면서도 우울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그가 문단과 언론을 향해 휘갈긴 복수의 펜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 『기자 생리학』이 오늘날까지 유효한 것은 문단과 언론을 향한 무차별적인 고발이 아닌 저널리스트로서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처절하게 해체하고 탐구한 끝에 얻어낸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지만 모든 게 자기 것인양하는 언론
200년 전 문장만이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뿐이다.
『기자 생리학』은 문인 종種을 ‘논객’과 ‘비평가’로 분류하고 세분화해 언론의 메커니즘을 일거에 보여준다. “두 손 달린 동물 사회의 자연사”라는 표현만 봐도 이러한 분류법 자체에 풍자적 함의가 내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저널리즘 세계를 마치 동물의 왕국처럼 종을 나누고 그 생존 본능이 추출한 치졸한 본성을 묘사한 대목은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실제 발자크는 저널리즘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자신의 논리만큼은 뭉뚱그려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널리즘 세계의 구조적 모순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담아냈다. ‘정치인’을 두고 “공공장소 청소 하나 제대로 시킬 줄 모르는” 인물이라 묘사하고 ‘비평가’는 “예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면서 예술에 대해 말하는” 익살꾼이라 지칭한다. 이렇듯 생생한 표현이 지금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200년 전 발자크의 통찰력은 가히 천재적이라 볼 수 있다.
여전히 프랑스 저널리즘이 정치와 밀접한 걸 보면 신문사가 자신의 야심을 마음대로 발휘하거나 기자와 정치인이 공공연하게 결탁하는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닌듯싶다. 하지만 발자크가 가장 경계했던 것은 거짓을 선동으로 몸집을 키워나가는 언론이 아닌, 자기 취향에 맞는 신문만을 구독하는 강성 구독자들이었다. 이들은 아침에 ‘타르틴’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파리지앵처럼 신문을 자신의 옆구리에 꼭 끼고 다닌다. 발자크는 스스로 편향성을 자초한 이들을 ‘편집증 환자’라고 진단하고 측은하게 여긴다. 신문 구독과 정치 뉴스 소비만이 사상의 각성이라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움직임이 프랑스 혁명 이후 더욱더 확고한 자유로 향하는 발걸음이라 믿는다. 하지만 빈껍데기한테 줄 자유는 없다. 언론은 “오직 약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 대해서만 자유로울” 뿐이다.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 민족을 죽이듯 언론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자유를 줌으로써”라고 칼을 꽂는 발자크의 명제는 뼈아프다. 이러한 강성 구독자들이야말로 별 볼 일 없는 논객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고, 그들을 배부른 돼지로 만들 뿐이다. 이는 오늘날 대놓고 ‘구독’과 ‘좋아요’를 외치는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를 앞세워 타인을 억압하고 비난하는 걸 서슴지 않는다. 서로 편을 나누고 권력을 드러내며 집단 히스테리를 양성하는 것. 이제는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처럼 언론이 종을 울리자마자 침을 흘리고 달려드는 이들을 보면 발자크는 뭐라고 말할까.
언론은 여자와 같다. 거짓말을 내놓으면서 그걸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 때에는 그야말로 감탄이 절로 나오며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욱이 이 투쟁에서 그녀는 항상 최고의 실력을 펼친다. 구독자는, 그러니까 대중은 부인한테 꼼짝 못하는 남편처럼 멍청하다.
- 본문 265쪽, ?결론? 중에서
19세기 파리지앵을 사로잡은 단 한 명의 부르주아
앙리 모니에가 직접 그리고 묘사한
부르주아의 우아하고도 치졸한 일상
“자기 자신을 관찰할 줄 아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속물”
발터 벤야민은 그를 두고 생리학의 ‘거장’이라 지칭했다.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책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기술의 발전과 함께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붕괴되었다고 말한다. 더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지 않아도 모나리자를 볼 수 있고 원한다면 다양한 방식으로 소유할 수도 있다. 이전의 예술작품이 신과 종교를 중심으로 한 숭배의 의미를 지녔다면 이제는 작품의 오리지널리티가 사라지고 그 독창성마저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기술복제의 차원을 넘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과 계급이 붕괴될 것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신흥 귀족 집단이라 불리는 ‘부르주아’다. 이들은 자신들이 견고하게 쌓아온 부와 권력이 무너지는 걸 원치 않았다. 여전히 예술작품에 ‘아우라’가 존재한다고 믿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신성화시키길 원했다. 벤야민은 이러한 상류층의 태도를 ‘예술에 관한 속물적 관념’이라 비판했다. 그러나 이렇듯 부르주아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벤야민이 인정한 부르주아가 한 명 있었으니 바로 풍자화가이자 삽화가, 희극작가이자 연극배우였던 앙리 모니에Henry Monnier다.
당시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정치적 지형은 물론 삶의 양식마저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대중들은 시대의 격변과 함께 새로이 등장한 인간 군상들의 해석에 대해 갈증을 느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게 풍속 연구 중 하나인 ‘생리학’ 시리즈다. 문고판으로 출간된 이 작은 책자는 다양한 인간 종을 묘사한 삽화와 날카로운 묘사를 통해 일약 시대의 유행으로까지 등극했다. 발자크 같은 유명 작가는 물론, 수많은 저널리스트, 신문 소설과 대중 소설 작가까지 다양한 인사들이 때론 실명으로, 때론 익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 생리학 시리즈의 필자로 활약했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까지 썼던 시대의 천재 앙리 모니에는 단연 돋보이는 필자였다. 벤야민은 그를 두고 “자기 자신을 관찰할 줄 아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속물”, “생리학의 거장”이라 칭하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부르주아의 우아하고도 치졸한 일상을
묘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부르주아 뿐이다!
앙리 모니에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희극 『통속생활의 정경Scenes populaires, dessinees a la plume』에서 조제프 프뤼돔Joseph Prudhomme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내고 직접 연기하면서부터이다. 당시 파리지앵은 격동하는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부상한 부르주아, 일명 ‘프뤼돔’ 백작의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에 열광했다. 무대에서 무슈 프뤼돔은 훌륭한 부르주아, 신중한 부르주아로 등장하지만 실상은 위선으로 똘똘 뭉친 멍청한 유산 계급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모니에는 스스로 창조한 허구 인물을 직접 연기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부르주아 집단을 해체하고 이들의 허위의식을 낱낱이 고발한 것이다. 이렇듯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화살을 겨누는 냉정함과 이를 예술로 표현해내는 눈부신 재능을 목격한 그의 친구 발자크는 자신의 역작 『인간극』연작에 수록된 단편 「사업가(Un homme daffaires)」에서 그를 모델 삼아 장 자크 빅시우라는 인물을 창조해냈다.
모니에의 눈에 비친 부르주아는 “세상에 처음 올 때 나이가 50세인 듯하니, 그는 회색 머리칼에 안경을 쓰고 불룩한 배, 흰 양말에 검은 의복을 입은 채로 태어”났으며, 낡아빠진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안주하려는 종족에 불과하다. 그는 부르주아를 애써 설명하거나 묘사하지 않고 생동감 넘치는 대화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 어떤 질문에도 “마레지구, 샤를로 가 45번지”라고 대답하는 부르주아 소년은 자신이 사는 곳의 주소만으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타 생리학 시리즈 중에서도 은근하게 비꼬는 대화문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동시대 풍속을 다뤘다는 면에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만, 우스꽝스러운 대화 속에 담긴 함의를 독자가 스스로 해석하고 생각을 확장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능동적인 독서를 요구한다. 이러한 모니에의 독특한 표현 방식과 부르주아를 향한 날카로운 고발정신은 훗날 그에게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두 번이나 수상하게 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단 한 명의 부르주아도 없다.
보다 가치 있는 복제품이 되길 원할 뿐이다.
부르주아에 의한 부르주아를 위한 부르주아 시대의 문학, 그중에서도 이 책 『부르주아 생리학』은 이 책의 주요 독자이자 거품 같은 풍요의 특산품인 부르주아를 분석하고 풍자한다. 우리는 200년 전 프랑스 사회의 인간군상을 분석한 이 작품을 통해 인간 사회의 모순과 허위의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부르주아란 도시를 가리키는 ‘부르bourg에서 파생된 ‘성城안 사람’이란 의미로, 이때 부르주아는 왕과 성주와 달리 실질적 활동의 주체로 이 세계의 상업과 산업뿐 아니라 문화적, 지적 진보의 주체였다. 이들은 혁명에 앞장섰고 사회를 움직이는 지적 동력으로 활동했다. 때문에 무산계급인 평범한 백성들은 기득권층인 이들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면서도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는 부르주아의 풍요로운 삶을 동경하는 모순된 감정을 품게 되었다. 부르주아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갖가지 사회적 의무를 완수하는 그 정확성이야말로 부르주아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주요한 특징 중 하나”라 여겼던 점도 이러한 현상에 한몫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부르주아를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다. 정확히 말해 우리는 부르주아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흔히 재벌이라 불리는 기득권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누군가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전혀 다른 혜택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들에게는 앙리 모니에가 골몰했던 부르주아로서의 자신에 대한 성찰, 더 나아가 유산계급 부르주아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찾아볼 수 없다. 타인과의 조화로운 삶이나 상생의 덕 역시 좀체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더 나은 가치 실현을 꿈꾸지 못한 채 막연한 타인인 부르주아의 삶을 모방하고 답습하기에 바쁘다. 청년들은 주식이나 비트코인을 통한 일확천금을 꿈꾸고, 자신을 상품처럼 전시하는 걸 서슴지 않는다.
지성이 결여된 채 부에 따라 나뉜 계층이 더욱 견고해져 세대, 종교, 젠더, 빈부 갈등을 낳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고발할 줄 아는 지성인을 찾기 어렵다. 때문에 이 책 『부르주아 생리학』을 읽은 독자는 200년 전 프랑스에 살던 이 탁월한 작가의 스스로를 성찰하는 지성과, 이를 예술로 풀어내는 동력을 반드시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시대를 풍미한 천재이자 지식인이었던 앙리 모니에의 부르주아 고발장인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끔 만드는 자기고백적 문학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어른들의 그 어떤 물음에도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마레지구, 샤를로 가 45번지.”라 대답하는 소년을 두고 이 아이에게 자신의 대답이 지닌 한계에 대해 끝내 설명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을 거라 말한다. 살고 있는 동네와 집의 가치로 많은 것이 결정되는 이 사회에서, 200년 전의 풍자 작가가 묘사한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간과할 수 없는 울림을 주고 만다. 더 나아가, 이렇듯 공허한 대답만을 반복하는 아이가 자라서 어떤 부르주아가 되는지는 애써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답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 그리고 그 사회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애초에 그것이 바로 파노라마 문학과 생리학 장르의 가장 근본적인 배경이다. 이때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 있던 존재, 급변하는 19세기의 주인공이 ‘부르주아’였음은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본문 13쪽, ?역자 서문ㅡ프뤼돔 씨의 생리학? 중에서
“이 두 발 달린 짐승들은
그 어떤 야수보다도 무자비했다”
200년의 시간을 넘어 현대에 투사된 의학계의 공공연한 뒷모습
엘리트 의식, 능력주의, 기득권에 대한 집착과 사회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 그리고 상업주의. 오로지 그들만의 특권을 위해 배부른 파업에 나서고, 의료를 무기 삼아 그들만의 정치적 성향을 강요하며 환자를 환자가 아닌 고객으로 간주하고, 사이비 의료기기를 유통시키거나, 때로는 의사 대신 다른 이에게 치료를 전담시키고 정작 자신은 진단서만 작성하는 도덕불감증적 행위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의 예시가 아니다. 이 책, 『의사 생리학』의 저자이자 위대한 풍자 저널리스트 루이 후아르트에 따르면 ‘19세기에 계몽사상의 선진국이자 헌법 앞머리에 인권선언을 넣은 프랑스에서는 이런 무지몽매한 의사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동물을 분석하듯, 사회 속 인간 군상들을 희화시킨 과학 분석으로 해부하며 조롱하는 이 ‘생리학’이라는 문학 장르에서 저자인 후아르트는 “홍수,?폭동,?열병으로도 모자라 의사?400명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있는” 환자들을 대변해 이익만 챙기려는 의사들의 실태를 고발한다.
병원이 병을 만들고, 의사가 환자를 실험 대상화할 뿐이라는 저자 후아르트의 풍자는 날카롭다. 더 나아가 저자는 상업주의와 엘리트 특권의식에 빠진 의사라는 군상이 환자를 고객을 넘어 호갱 취급하며, 자기들만의 그릇된 정치 혹은 사회의식의 세뇌 혹은 협박 대상으로 삼는 기막힌 현실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그것도 지극히 ‘과학적’인 풍자를 통해서. 의사, 약사, 의료기기 회사와 언론, 정치인까지 얽혀 들어가는 이 거대한 커넥션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그저 2백 년 전 과거의 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하다. 책을 보는 내내 기시감에 시달릴 정도로.
혁명의 국가도 넘어서지 못한 그들만의 카르텔
“그들은 자신들의 배부른 파업을
마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로 여겼다”
19세기 프랑스에는 소수의 엘리트 의사와 다수의 엉터리 의사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기 동안 단두대에서는 무수한 생명이 사라져갔고, 이 죽음을 발판 삼아 수많은 시체를 단기간에 해부하며 소위 의학의 발전과 엘리트 의사의 등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 엘리트 의사가 손끝을 향한 곳은 절대 다수의 만인이 아니라 귀족과 성직자 등 극소수 특권층의 거처였다. 거의 전 국민은 발전한 선진 의료가 아닌 돌팔이 의료의 희생양이었다. 이 희생양 사이를, 환자를 ‘고객’이라 부르는 협잡꾼과 허위 진단서로 푼돈을 그러모으는 사기꾼들이 고객, 그러니까 희생양을 찾아 마치 산보자처럼 배회하는 곳이 후아르트가 바라본 당시 프랑스 사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네 발 달린 동물보다 흉폭한 이 두 발 달린 야수”들의 공격은 계층을 가리지 않고 꾸준했다. 오랜 악습이었던?‘유사 치료법’의 희생자는 나폴레옹 전쟁 때의 전사자 수를 크게 웃돌았다.?거머리 치료,?사혈 요법,?수(水)치료,?자기치료, 온천 요법, ?최면 치료 등 중세기적 치료법이 소위 ‘발달한 의학 이론’을 무기 삼아 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그런데 사실 처방의 근거는 의학이 아니라 의사였고, 이 자칭 무소불위의 의사들은 치료는 물론 발병과 완치의 판단 역시 의학에 기대지 않았다. 근거 없는 처방, 엉터리 수술이 소위 ‘고명한’(그것도 자기들끼리 생각하기에 고명한) 의사의 이름으로 환자들 위에 덮어씌워졌다. 그 결과는 약제사, 언론, 그리고 각종 의사 카르텔이 합작한 노골적이거나 혹은 암시적인 바가지 청구서의 향연으로 마무리된다. 19세기의 프랑스에서, 청구서의 액수는 의사의 권위로 결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청구서의 액수가 의사의 권위를 결정했다. 진단은 무책임했고, 처방 또한 제멋대로였다. 짐마차는 엉터리 처방약을 싣고 프랑스 전역을 순회했고, 거기에는 엉터리 처방전의 권위를 보증해줄 의사 한 명이 늘 따라붙었다. 이런 상황에서 1789년 대혁명, 1848년 2월혁명 등 여러 차례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시민들이 왜 ‘혹성탈출’에서처럼 의사에 저항하는 제4의 혁명 깃발을 내걸지 않았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나폴레옹 제국 시대 이후 의사들은 귀신같이 빠른 ‘시류 편승 감각’으로 환자들을 야금야금 끌어모았다. 지하철을 도배하고 있는 한국의 병원 광고 못지않게 19세기 의사들도 환자들을 유혹하는 능란한 마케팅 수법을 총동원했다.?돈을 받고 위장으로 신문에 의사에 대한 감사 편지를 기고하게 하는 등 요란한 광고전을 펼쳤다. 무료진료를 해준 뒤, 자신이 지정한 약국과의 이면거래로 폭리를 취하는 수법은 현대의 마케팅전문가가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원한다면 죽을 자유가 있다”
19세기 프랑스 의사들은
악명 높은 투기사업자이자,?돈을 긁어모으는 금융업자였다.
책에 따르면 한 의사는 자신과 뒷거래를 하는 약사를 찾지 않은 환자에게는 “원한다면 죽을 자유가 있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는다. 『의사생리학』 저자가 군의관에 대한 형편없는 처우를 개탄하며 서로 자신의 팔 다리를 먼저 잘라달라고 외치는 야전병원의 아비규환을 묘사할 때, 그리고 매년 300명의 징집 대상자 중 신체장애를 호소하며 징집을 기피하고자 하는 젊은이가 대략 300명에 달한다고 하는 대목을 맞닥뜨릴 때, 우리는 나폴레옹 시대를 거친 프랑스인들의 트라우마를 읽어낼 것이다.
의사라는 권위를 내세워 병실에 두터운 장막을 쳤던 19세기 의료계는 일반 환자들에게 난시청의 영역이었다.?저자는 이 책에서, 당시 프랑스 사회 전반을 흠뻑 적시고 있었던 자유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의사로 대표되는 새로운 엘리트층의 부상을 면밀한 터치로 스케치하고, 그 이면을 들추었을 때 나타나는 참담한 실상을 폭로한다. 책은 의학계 이면에 무지했던 대중들의 갈증을 샘물처럼 풀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으리라.?의사들이야말로 최악의 환자들’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의사들의 병명은 무엇일까. 『의사생리학』 저자가 내린 진단은 이렇다. 19세기 프랑스 의사들은 악명 높은 투기사업자이자,?돈을 긁어모으는 금융업자였다. 저자는 “호랑이나 하이에나도 의사라 불리는 두 발 달린 검은 동물에 비하면 순한 양일 뿐”이라며 환자의 등뼈까지 빼먹는 의사들의 위압적 행태를 맹수에 비유했다.?요통,?고열,?류머티즘 등 갖가지 병을 몽땅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의사가 제일 좋아하는 먹잇감이다. 자본의 노예가 된 의사들을 묘사할 때 저자의 풍자는 더없이 예리해지고, 그의 반어법은 더욱 신랄해진다. 이 거침없는 풍자와 비판은 사실 ‘의사라는 종에서 교훈적인 면을 찾아보겠다’는 너스레 섞인 포부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다음과 같은 결론 말고는 찾을 수 없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시대 모든 의료 사기꾼들의 행위에는 일말의 교훈도 없다!”
“인간군상의 추악한 면면을
과학의 시선으로 해부하다”
시대의 대문호들이 때론 익명으로, 때론 실명으로 써나간 풍자 문학의 걸작선
저자는?세계 최초로 삽화가 들어간 신문?『르 샤리바리』에서 맹활약한 작가다.?치밀한 내러티브와 압도적 풍자로 당대 의료계 이면을 뒤집고 패러디하면서 의사들의 자아도취와 무능,?의사와 한통속 약사의 겹줄 공생 행태 등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1840년대 프랑스에서 유행한 생리학은 기존의 관념과 학문이 더는 인간 사회를 쪼개고 해석할 수 없을 때, 마치 동물이나 식물 생리를 연구하듯 인간 혹은 인간 유형을 치밀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하겠다는 야심만만한 발상에서 출발했다.?저널리스트, 문인,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 시기를 풍미한 ‘생리학’ 시리즈들은 1810년대부터 프랑스에서 유행한 풍속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 나타난 새로운 사회 현상들에 주목하고 있다. 페이퍼로드는 올해 1월 『기자생리학』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공무원생리학』, 『부르주아 생리학』, 『의사생리학』 등 생리학 총서를 차례로 출간하고 있다. 처절한 기자정신으로 자신마저 해체한 대문호 발자크의 풍자와 독설이 빛나는 『기자생리학』을 비롯한 4권의 생리학 시리즈는 마치 ‘유럽풍자백과사전’처럼 팔딱거리는 당대 엘리트 내면의 욕구, 촘촘하고 생생한 미시사, 시대의 본질을 총체적이고 입체적으로 펼쳐놓는다.
생리학은 주로 새로운 직업군과 새로운 사회 계층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풍자적인 논평을 펼치는데, 『의사생리학』의 저자 루이 후아르트는 그중에서도 특히 신랄한 입담으로 유명하다. 그는 의사와 약사 사회 구석구석을 무대에 올리듯 조명하며 첨예하게 조롱한다. 이 책은 중압감이 느껴지는 르포르타주로 접근하기보다 즉각적이고 재기 넘치는 시사만평처럼 의사들의 타락상을 까발리듯 펼쳤다.
엘리트 의식, 능력주의, 기득권에 대한 집착과 사회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 상업주의…. 19세기에 비해 장비나, 이론, 의료기술이 급격하게 진보한 오늘날에도 의사들의 실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은 전문 지식이나 의학 기술이 아닌, 의사라는 직종의 생리를 다룬단 점에서 새로운 통찰을 준다. 의사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내용이라 앞뒤가 꽉 막힌 한국의 일부 의사들은 몹시 불쾌하시겠다.
- 강신익,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인문의학자
현대 도시가 탄생한 시대,
도시 산책자에 대한 최초의 관찰 기록
감각, 인식, 사유까지 모든 것이 급변하던 시기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본 파리 산책자들의 인간 군상
인간은 산책하는 동물이다
19세기 파리에 도래한 산책자들의 시대
“인간은 곧 산책자다.”
이 책의 저자인 풍자 저널리스트 루이 후아르트는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위에 있다면, 그 이유는 산책할 줄 알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가 살아간 19세기 중반은 대도시에서의 산책이 탄생한 시대였다. 산업과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세계 곳곳에서는 대도시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대도시라는 무대를 활보하는 신인류가 탄생했다. 이들이 바로 플라뇌르flaneur, 우리말로 산책자다. ‘정해진 방향이나 목표 없이 천천히 거닌다’는 뜻의 프랑스어 동사 ‘플라네flaner’에서 나온 말이다.
후아르트가 살고 있던 파리는 플라뇌르의 도시로 유명했다. 개선문이 있는 에투알 광장부터 샹젤리제 거리, 불로뉴 숲, 튈르리 공원까지 파리의 명소들은 산책자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도시 곳곳을 열정적으로 관찰했다. 화려한 도시 공간은 산책자들의 감각을 교란하며 그들의 인식과 사유까지 바꿔놓았다. 산책자들은 물신의 숭배자가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문학 평론가 발터 벤야민은 도시 산책자를 현대 도시의 관찰자이자 탐색자, 현대 도시의 소비주의를 드러내는 존재로 봤다. 『산책자 생리학』은 바로 이 시대를 풍자한 세태 비평이자, 현대 도시의 산책자에 대한 최초의 관찰 기록이다. 과거를 탐구하는 고고학이 아니라 현재를 관찰하는 고현학(考現學)이라고 할 수 있다.
산책자를 향한 유쾌한 듯 쓰디쓴 풍자
좀스럽지만 어쩐지 친근한 모습들
저자는 당시에 유행했던 풍자 문학 장르인 ‘생리학Physiologie’의 틀을 빌려 당시 파리의 산책자 군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동식물을 분류하고 그 생태를 분석하듯이, 당시의 다양한 인물상을 각각의 인물 유형으로 분류하고 분석하는 것이 생리학 장르의 특징이었다. 과학 연구의 탈을 썼지만 실은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어조의 풍속 연구였다. 해부대 위의 동물이 메스를 피하지 못하듯, 기자부터 의사, 공무원, 부르주아까지 누구도 날카로운 풍자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했다.
산책자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이유는 산책이라더니, 바로 다음 문단에서 저자는 태도를 바꾼다. 산책은 자신의 시간과 청춘을 자발적으로 잃어버리는 행위라고. 도시의 산책자와 숲속의 원숭이의 차이는 지팡이의 유무뿐이란다. 이렇게 산책자를 향한 유쾌한 듯 쓰디쓴 풍자와 예찬의 탈을 쓴 조롱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계속된다.
책 속 파리 산책자들의 천태만상을 살펴보자. 너무 잘 먹어 비만해진 산책자는 겨우 몇백 보 걷고 지쳐서 헉헉대며 가까운 카페로 들어가 쉰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니는 부유한 산책자들은 양옆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공원 풍경을 감상하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가 버린다.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진열장에 있는 물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살펴보는 산책자들도 있다. 일요일이 되면 오락거리가 없는 가족들이 산책을 나와 지난주와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교통수단이 말이나 마차에서 자동차, 지하철로 바뀐 것만 제외하면 21세기 대도시의 산책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다. 좀스럽지만 어쩐지 친근하지 않은가.
완벽한 산책이 불가능해진 시대
진정한 산책자가 되는 법
어떤 것이 완벽한 산책일까? 천천히 걸으면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분주한 삶에 여백을 만들어내는 것이 완벽한 산책일 것이다. 불행히도 그런 산책은 『산책자 생리학』 속 산책자들에게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나 허용되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도시를 산책하는 사람들의 눈과 귀에 상품과 이미지가 홍수처럼 쏟아지기 때문이다. 산책을 나왔다 눈에 띄는 물건에 혹해 목적이 산책에서 쇼핑으로 바뀌어 버린 사람, 상품을 욕망하지만 살 돈이 없으니 그저 주위를 맴도는 사람, 물건 하나를 보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사람까지, 누구도 현대 대도시의 자본주의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후아르트는 말한다. 진정한 산책자는 외국어나 수학, 과학은 몰라도 되지만 어떤 모자 가게에서 예쁜 모자를 파는지, 어떤 정육점에서 맛있는 고기를 파는지, 어떤 카페에서 맛있는 레모네이드를 파는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은 많이 하고 말은 적게 하고, 혼자서도 잘 놀면 된다. 피곤할 때는 쉬어 갈 줄 아는 사람이면 된다. 그렇게 어려운 조건들은 아니지 않은가!
당신의 산책은 어떠한가? 건강을 위해 만보기 앱을 확인하거나 스포츠맨처럼 늘 강박적으로 걷지는 않는가. 저자는 다음과 같은 자질을 소유하지 않은 자는 산책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소유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어떤 경우에나 명랑할 것
필요할 때는 성찰할 것
항상 관찰 정신을 지닐 것.
책을 읽다 보면 19세기 산책자들과 함께 파리 곳곳을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파리 산책자들의 모습을 유쾌하게 스케치한 삽화와 당시 파리의 시대상을 꼼꼼히 설명해 주는 각주도 놓치지 마시라!
진창길에서의 피난처가 되어준 인도들과 산책자들, 모두에게 은총 가득하시길. 내 금발 청춘 시절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길 위에서 흘러갔다. 포석, 화강암, 타르, 아스팔트, 그 어떤 포장도로든! 나는 정말 오랫동안 산책했고, 앞으로도 정말 오랫동안 산책하기를 희망한다.
- 본문 129쪽, 「산책의 작은 행복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