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세기 프랑스나 한국이나 다를 바 없다.
특정 계급을 치밀하게 꿰뚫는 대문호의 르포르타주!
개혁의 시대, 기대와 불만이 탄생시킨
생리학이라는 새로운 풍자 문학
지금부터 대략 200년 전 프랑스에서는 의학용어의 이름을 빌린 생리학Physiologie이라는 기묘한 문학 장르가 생겨났다. 당시 사회는 일종의 격변기였다. 절대 왕정을 몰락시킨 프랑스 혁명이 다시 나폴레옹이란 전제군주를 탄생시킨 뒤 군주제로 퇴행해버렸고, 그 퇴행을 극복할 새로운 혁명들이 기존 계급을 허무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한편, 급격히 이루어진 과학의 발전은 상업의 득세와 함께 자본주의를 권력의 유력한 한 축으로 새로이 편입시켰다. ‘~의 생리학’이라는 이 기이한 문학 장르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급격한 사회 변화, 새로운 시대에의 기대, 지지부진한 개혁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탄생시킨 시대의 풍자 문학인 것이다.
기존의 관념과 학문이 더는 인간사회를 분석할 수 없을 때, 마치 동물이나 식물을 연구하듯 인간 혹은 인간 유형을 치밀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하겠다는 야심만만한 발상이 이 장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그 나름의 생존방식에 따라 생리적 기질대로 살아가며, 이를 분석, 분류함으로써 사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그리고 익히 알고 있듯, 이는 발자크가 “인간 희극” 연작을 집필한 의도와 정확히 일치하며, 실제로도 발자크 역시 익명의 작가들이 가득한 이 생리학이라는 장르 속에서 이름이 드러난 몇 안 되는 필진 중 하나로 찬연히 빛나고 있다. 날카로운 풍자와 치밀한 분석을 주 도구로 삼을 수 있는 생리학이라는 장르에서 발자크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필력을 거침없이 자랑해낸다.
목차
│1권│
제1장 정의定意 7
제2장 입증된 공무원의 유용성 21
제3장 공무원의 철학적 역사와 초월적 역사 35
제4장 구분 53
제5장 사무실 61
제6장 가공한 몇몇 존재들에 대하여 83
제7장 임시직 107
제8장 기도 117
제9장 사무직의 다양성 121
제10장 요약 159
제11장 국장 167
제12장 실장 173
제13장 사환 181
제14장 퇴직자 189
작품해설 발자크, 공무원 사회의 살갗을 벗기다 203
│2권│
위조자들에게 알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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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종 논객 19
1. 신문 기자 23
2. 기자 겸 정치인 75
3. 팸플릿 작가 94
4. 공염불하는 자 100
5. 직에 연연하는 자 109
6. 하나만 우려먹는 자 112
7. 번역 기자 116
8. 신념 작가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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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종 비평가 129
1. 구식 비평가 135
2. 금발의 젊은 비평가 145
3. 대비평가 157
4. 문예 비평가 177
5. 군서 신문 비평가 200
결론 260
작품해설 발자크, 언론의 생리를 직격하다 271
저자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은이), 류재화 (옮긴이)
출판사리뷰
“공무원이란 무엇인가?”
소설가의 펜을 빌어 탄생한 또 하나의 『사회계약론』
책에서 발자크는 정권의 교체기와 새로운 체제의 형성기를 동시에 겪고 있는 당시 공무원 사회를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호쾌하게 해부해낸다. 책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공무원이란 무엇인가? 어느 직급에서 시작해서 어느 직급에서 끝나는가?” 이 문장이 겨냥하는 궁극의 과녁은 바로 프랑스 국왕이다. 혹자는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1789년이 아니라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출간한 1762년으로 잡기도 한다. 역사에 남을 대혁명조차 발단은 거창한 행동이 아닌 발상의 변화에서부터 일어난다. 공무원의 현실 역시 국왕조차 공무원이며, 공무원 사회에 편입할 수 있다는 새로운 시대의 발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많은 새로운 변화가 그러하듯, 이 변화 역시 마냥 긍정적 결과만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이처럼 발자크는 이 책의 전제로서, 국왕조차 국가 세비를 받는 공무원에 불과하니 일정한 법의 감시망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확고하게 명시하면서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세법과 형법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나름 이상적 사회’인 공무원 사회를 반어법적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있을 군상들을 맨 윗자리부터 가장 아래의 자리, 그리고 공무원이지만 공무원은 아닌 ‘비정규직’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직책별, 유형별로 하나씩 묘사해낸다. 마치 동물이나 식물 종을 품종이나 서식지에 따라 분류하고 서술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동물을 육식동물과 초식동물로 나누고 다시 육식동물은 사자, 치타 등으로 분류해 묘사하듯, 이 책은 숱한 공무원 품종의 생태와 특성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특별비서관은 “젊고 유능한 청년”으로 장관 대신에 기자의 표적이 된다. 그리고 언제든 장관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장관이 해야 할 “예와 아니오”를 대신 말해준다. 그러다 마침내 장관과 서로 거리낌 없이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이가 되며, 둘 사이의 거리감과 함께 양심도 내려놓는다.
기자와 언론의 생리를 직격하는 저널리즘의 고발장이자
명언이 솟구치는 풍자 문학의 전범!
발자크가 살던 집의 출입문은 두 개였다. 평생 빚더미에 허덕여야 했던 그는 날마다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 뒷문으로 도망쳐야만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나는 펜으로 정복하겠다”라고 자신을 다잡을 만큼 습작에 열성을 보였던 그는, 첫 작품 『크롬웰』의 실패 이후 소설보다는 저널리즘이 돈이 된다고 판단해 문학판을 떠난다. 이후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는 저널리즘에 매료된다. 인간의 삶과 생존 방식에 대해 치밀하게 파고드는 그가 언론의 생리에 둔감할 리 없었다. 한때 “저널리즘이야말로 인간 지성의 총체”라 칭송할 정도로 발자크는 언론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쩌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권력이야말로 내리막길로 치달은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카드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발자크와 저널리즘의 관계가 뒤틀린 건 비단 『키뇰라의 재력』 초연 당시 파리 신문과 잡지가 쏟아낸 혹평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자신이 창간한 《르뷔 파리지엔》이 3회 만에 파산한 게 직접적인 도화선이었다. 편집, 인쇄, 조판까지 언론이 탄생하는 전 과정에 참여했음에도 별다른 성과 없이 실패하자 그는 자신이 저널리즘 세계로부터 패배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때 시작된 저널리즘에 관한 분노와 원망은 『기자 생리학』의 집필로 이어진다. 그는 “다른 이들은 글을 너무 많이 써서 논객인데, 이 자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논객”이라고 신문사 주필을 꼬집고,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언론을 향해 “지금 파리 사설에는 상투적인 연설 투 같은 관습에 찌든 미사여구만 있을 뿐”이라며 날카로운 문장을 내리꽂는다. 자신을 공격한 비평가에 대한 증오가 저널리즘의 존재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발자크가 묘사하는 언론의 생리는 통쾌하면서도 우울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그가 문단과 언론을 향해 휘갈긴 복수의 펜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 『기자 생리학』이 오늘날까지 유효한 것은 문단과 언론을 향한 무차별적인 고발이 아닌 저널리스트로서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처절하게 해체하고 탐구한 끝에 얻어낸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지만 모든 게 자기 것인양하는 언론
200년 전 문장만이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뿐이다.
여전히 프랑스 저널리즘이 정치와 밀접한 걸 보면 신문사가 자신의 야심을 마음대로 발휘하거나 기자와 정치인이 공공연하게 결탁하는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닌듯싶다. 하지만 발자크가 가장 경계했던 것은 거짓을 선동으로 몸집을 키워나가는 언론이 아닌, 자기 취향에 맞는 신문만을 구독하는 강성 구독자들이었다. 이들은 아침에 ‘타르틴’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파리지앵처럼 신문을 자신의 옆구리에 꼭 끼고 다닌다. 발자크는 스스로 편향성을 자초한 이들을 ‘편집증 환자’라고 진단하고 측은하게 여긴다. 신문 구독과 정치 뉴스 소비만이 사상의 각성이라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움직임이 프랑스 혁명 이후 더욱더 확고한 자유로 향하는 발걸음이라 믿는다. 하지만 빈껍데기한테 줄 자유는 없다. 언론은 “오직 약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 대해서만 자유로울” 뿐이다.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 민족을 죽이듯 언론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자유를 줌으로써”라고 칼을 꽂는 발자크의 명제는 뼈아프다. 이러한 강성 구독자들이야말로 별 볼 일 없는 논객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고, 그들을 배부른 돼지로 만들 뿐이다. 이는 오늘날 대놓고 ‘구독’과 ‘좋아요’를 외치는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를 앞세워 타인을 억압하고 비난하는 걸 서슴지 않는다. 서로 편을 나누고 권력을 드러내며 집단 히스테리를 양성하는 것. 이제는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처럼 언론이 종을 울리자마자 침을 흘리고 달려드는 이들을 보면 발자크는 뭐라고 말할까.
언론은 여자와 같다. 거짓말을 내놓으면서 그걸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 때에는 그야말로 감탄이 절로 나오며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욱이 이 투쟁에서 그녀는 항상 최고의 실력을 펼친다. 구독자는, 그러니까 대중은 부인한테 꼼짝 못하는 남편처럼 멍청하다.
- 본문 265쪽, 「결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