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도서출판 b〉에서 D. H. 로렌스의 『아포칼립스(Apocalypse)』를 출간했다. 비유적, 상징적 표현들에 옮긴이가 상세한 주석을 달아준 점이 돋보이는 책이다. ‘아포칼립스’는 ‘종말의 계시’라는 본래의 의미 이전에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지칭한다. 짧은 「요한계시록」을 로렌스가 장편의 에세이로 다루었다는 것은 이 책이 매우 섬세하고 깊은 계시록의 탐구를 담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성경 연구자도 아닌 소설가가 종말을 계시한 성경을 자세히 분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로렌스의 대표적 작품들에 가득 찬 재생과 생명, 삶의 에너지, 야생적 자유 등의 주제에서 찾을 수 있다. 외설을 도발하며 본연을 대담하게 따르는 성의 자유, 아버지와 남편과 문명을 떠나 자연과 우주 속으로 자신을 던져버리는 원시성, 이로써 획득하는 총체성이나 상상력의 해방 등은 로렌스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 주제이다. 이것은 지상의 파괴와 절멸 이후 천국을 대비해야 한다는 「요한계시록」이 일러주는 삶과는 정반대의 삶이다. 1914~1928년 사이에 로렌스가 쓴 『무지개』, 『사랑에 빠진 여인들』, 「말을 타고 떠난 여인」, 「세인트모어」, 『채털리 부인의 연인』 같은 장ㆍ단편은 로렌스 소설의 핵심 주제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주인공들은 우주, 태양과 땅, 인류와 유기적 관계를 화복하는 역동적 삶을 산다. 그리하여 파국과 절멸 이전에 회복과 재생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소설에서 제시한다. 이어서 로렌스는 죽기 전 마지막 책인 『아포칼립스』를 쓰고 이 책에서 유대-기독교 전통이 왜곡하며 전유한 종말의 서사를 샅샅이 비판하기에 이른다.
『아포칼립스』는 로렌스가 죽기 전 마지막 저술이고 사후(1931년) 출판된 책이다. 모두 23장을 썼는데, 내용상 1~4장, 5~8장, 9~16장, 17~23장으로 나눌 수 있다. 1~4장은 이 책의 서문 격이다. 5~8장에서는 「요한계시록」 자체에 초점을 맞추며 주제를 드러내고 그것의 탄생 배경을 밝히는데, 세상의 종말이라는 관념은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교도적 관념이라는 것이다.
“에게문명의 고대 저술들 중 하나로 일종의 이교도 신비주의에 관한 책”을 저변으로 삼아 “그 책을 유대교 종말론자들이 다시 썼고, 그 내용이 확장되었다가, 마지막에 유대-기독교 종말론자인 요한이 이를 다시 고쳐 썼으며, 요한 사후에 이 책을 기독교 저작으로 만들려 했던 기독교도 편집자들에 의해 삭제되고 교정되고 다듬어지고 추가되었던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읽는 「계시록」이라는 것이다. 이후 9~16장은 「계시록」의 전반부를, 17~21장은 「계시록」의 후반부를 다룬다. 이 챕터들은 「계시록」6~22장에 대한 로렌스의 주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는 「계시록」에 담긴 고대 이교도들의 ‘이미지 중심 사유 방식’을 통해 각 구절에 깃든 원래의 이교도적 상징을 찾아내고 그것의 의미를분석한다. 로렌스에게 「계시록」이 이교도 종교문서를 유대-기독교인들이 변형, 훼손시킨 책이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그가 이 챕터들에서 수행하는 서술은 일종의 비교종교적 관점을 통해 원래의 이교적 상징들이 유대-기독교인들에 의해 어떻게 변형되고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 22~23장은 이 책의 결론부이다. 지금까지 「계시록」의 이야기와 구절들을 분석했던 로렌스는 점점 더 강력한 파괴와 더불어 ‘자신들만의’ 천국을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천상에 구축하는 결말을 맺는 기독교 아포칼립스에 대하여 사악하고 불쾌하다고 일갈한다. 옮긴이는 이 책의 해제에서 “신의 명령에 귀의하여 다른 모든 생명과 지구 전체를 몰살시키며 자신들만의 천국을 마련하는 「계시록」의 비전에 맞서면서, 로렌스는 죽음과 몰락 이후의 삶의 방향성과 자세를 빚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종말과 끝을 뜻하는 ‘아포칼립스’는 로렌스를 통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과 가장 강렬한 희망을 가진 메시지로 변신하여 우리에게 온다”고 썼다.
목차
아포칼립스 … 7
부록 1 / 존 오만 박사의 「요한계시록에 대한 서평 … 267
부록 2 / 프레데릭 카터의 「아포칼립스의 용」 ‘서문’ … 270
옮긴이 해제 … 302
저자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은이), 문강형준 (옮긴이)
출판사리뷰
이 책을 고른 독실한 기독교인 독자는 얼마 안 가 이 책에 절망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로렌스는 첫 챕터에서부터 자신의 주일학교 경험을 이야기하며 「계시록」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를 고백하고 있는 데다가, 책 전체가 기독교 비판으로 날 서 있다. 하지만 급한 절망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읽어가다 보면 그는 교회 설교에서는 결코 들어본 적 없었을 「계시록」에 대한 다양하고도 급진적인 (그리고 이단적인!) 해석을 접하게 될 터이다. 최근 유행하는 종말과 파국의 서사들에 관심 있어 이 책을 고른 인문 교양 독자라면 『아포칼립스』에서 종말에 관한 기독교적 근본 이미지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관념이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교도적 관념임을 알게 될 것이며, 고대 동방 이교도들의 상상력이 우주 전체에 펼쳐지고 있음을 보고 놀랄지도 모른다. 그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영화의 근본 요소인 ‘살아남은 자들’이 세상의 끝이라는 절멸의 스펙터클에 이어지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꿨던 초기 기독교인들과 겹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계시록」이라는 주제보다는 로렌스의 소설을 좋아하는 문학 애호가들이라면 이 책에서 ‘공부하는 로렌스’를 발견하게 될 뿐 아니라, 공부를 하면서도 지식의 한계를 의식하면서 끊임없이 삶의 열정과 활력을 강조하는 로렌스의 전형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