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세계의 명화는 성경이 그렸다!
‘미술관에 간 화학자’ 전창림 교수가 들려주는
불후의 명화를 탄생시킨 성경 이야기
화학물질인 물감이 미술사에 끼친 영향을 밝힌 『미술관에 간 화학자』로 ‘미술과 과학의 융합’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크게 주목받았던 저자가, 이번에는 52점의 명화로 구약과 신약 전체를 꿰뚫는 『명화로 여는 성경』을 펴냈다.
중세 유럽에서 대중은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화가들은 성경의 구절을 그림으로 그려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오래되고 규모가 큰 성당들은 많은 창과 벽을 스테인드글라스와 벽화로 장식했는데, 성당 자체가 한 권의 성경이 되어 성당 안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이 책은 단순히 성경의 장면을 그린 명화 모음집이 아니다. 책에서 다룬 그림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푸는 열쇠다.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믿음이 흔들릴 때, 그래서 마음이 답답하고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이 책에 담긴 그림을 권한다. 그림은 우리를 묵상에 이르는 길로 안내한다. 명화 감상과 미술사 지식은 부차적으로 주어지는 덤이다.
저자가 학자로서의 삶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삶이다. 저자는 영성을 위해 성경만 읽는 데 그치지 않고, 거장들이 남긴 수많은 성화를 감상하며 기도했다. 저자는 오랜 세월 성화를 통해 묵상하면서 성화 그 자체가 성경 구절임을 깨달았다. 십여 년 전부터 교회에서 ‘명화로 여는 성경’을 주제로 강의와 글쓰기를 해온 저자는, 그 결실로 이 책을 펴냈다.
목차
머리글 _묵상을 이끄는 말씀 같은 그림
Chapter 1. 구약
천지창조 _히에로니무스 보스
아담의 창조 _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_마사초
가인과 아벨 _베첼리오 티치아노
노아의 방주 _에드워드 힉스
바벨탑 _피터 브뢰헬
욥 _조르주 드 라 투르
소돔의 멸망 _존 마틴
이삭의 희생 _로렌조 기베르티
장작권을 파는 에서 _헨드릭 테르 브루겐
야곱의 사다리 _도메니코 페티
형제를 만난 요셉 _페터 폰 코르넬리우스
불타는 떨기나무와 모세 _도메니코 페티
홍해를 건너다 _코시모 로셀리
십계명판을 깨는 모세 _렘브란트
가나안의 정탐 _지오반니 란프란코
모세의 놋뱀 _틴토레토
여리고 _제임스 티소
소년 사무엘의 기도 _조슈아 레이놀즈 경
다윗과 골리앗 _베첼리오 티치아노
다윗과 우리아 _렘브란트
솔로몬의 재판 _발렌틴 드 불로뉴
에스더 _조반니 안드레아 시라니
엘리야와 엘리사 _주세페 안젤리
다니엘 _마티아 프레티
요나 _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Chapter 2. 신약
수태고지 _프라 안젤리코
동방박사의 경배 _지오토 디 본도네
소년 예수 _두초 디 부오닌세냐
세례 요한 _니콜라 푸생
그리스도의 세례 _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유혹 받는 예수님 _후안 데 플란데스
제자를 부르심 _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사마리아 여인 _게르치노
산상수훈 _프라 안젤리코
백부장의 믿음 _베로네세
가나안 여인 _안니발레 카라치
마르다와 마리아 _디에고 벨라스케스
선한 목자 _대 루카스 크라나흐
돌아온 탕자 _렘브란트
나사로의 부활 _지오토 디 본도네
최후의 만찬 _레오나르도 다빈치
겟세마네의 기도 _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유다의 키스 _지오토 디 본도네
십자가의 예수님 _조르주 앙리 루오
십자가에서 내림 _로히에르 반 데르 베이덴
피에타 _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부활하시는 예수님 _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바울의 회심 _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_카라바조
예수님의 승천 _가로팔로
성령강림 _조셉 이그나즈 밀도르퍼
저자
전창림 (지은이)
출판사리뷰
‘미술관에 간 화학자’를 묵상으로 이끈 그림들
평생 학문의 길을 걸어온 이순(耳順)을 넘긴 과학자가 있다. 그는 젊은 시절 화가를 꿈꿨지만 그림물감 제조업을 해온 선친의 뜻에 따라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해야만 했다(그의 선친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포스터칼라’를 만든 알파색채의 창업자 故전영탁 선생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 화학 실험실과 루브르 박물관을 수없이 오가며 화가의 꿈을 화학자로 풀어낸 그의 연구 대상은, 미술사를 뒤흔든 거장들의 작품들이다. 그는 미술작품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퇴색하거나 발색하는 일련의 과정이 화학작용에서 비롯되었음을 규명했다. 명화들은 그의 손에 들린 프리즘에 투영되어 그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흥미진진한 속내를 비로소 드러냈다. 그에게 명화는 현미경 속 결정구조만큼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다.
귀국 후 그는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화학과 미술을 주제로 일반인들을 상대로 틈틈이 강의와 글쓰기를 해오다 『미술관에 간 화학자』라는 교양서를 펴냈다.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자연과학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지금은 ‘미술관에 간 화학자’가 저자의 별칭이 될 정도로 그를 세상에 알렸다.
평생을 과학자로 살아왔고 어느덧 유명한 학자가 되었지만, 그가 도리와 겸손을 잃지 않고 우직하게 정도를 걸을 수 있도록 해 준 데는 ‘신앙’의 영향이 컸다. 과학은 그 자체만으로는 제 역할을 다 할 수 없고 주님의 정의로운 말씀에 부합했을 때 비로소 그 소임을 다 할 수 있음을, 그래서 종교와 과학은 결코 대척관계가 아님을, 그는 성경을 읽고 성화를 감상하며 깨달았다. 이를테면 그는 북유럽의 화가 피터 브뢰헬이 그린 『바벨탑』을 보면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는 성경 구절(잠언 16:18)을 되새겼다. 과학이 인간의 욕망에 이끌려 그 본분을 벗어났을 때 세상을 얼마나 위험에 빠트리는가를 재차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그는 순간순간 잊기 쉬운 과학자로서의 본분과 지식인으로서의 가치관을 신앙을 통해 환기했다.
그는 영성을 위해 성경만 읽는 데 그치지 않고, 거장들이 남긴 수많은 성화를 감상하며 기도했다. 그는 오랜 세월 성화를 통해 묵상하면서 성화 그 자체가 성경 구절임을 깨달았다. 십여 년 전부터 교회에서 ‘명화로 여는 성경’을 주제로 강의와 글쓰기를 해온 그는, 그 결실로 이 책을 펴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푸는 열쇠 같은 그림들
성경은 심오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게 성경이다. 그런 이유로 오랜 세월 성경을 반복해 읽은 사람들조차도 종종 신앙의 길을 잃고 헤매곤 한다. 신앙의 깊이는 성경을 읽은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
저자는, 성경의 참뜻을 놓쳐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긴 설교집이 아닌 그림 한 점으로 다시 묵상에 이르는 경험을 체득했다. 즉,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할 때마다 저자는 조용히 그림들을 살폈다.
이처럼 그림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묵상하는 이른바 ‘명화묵상법’은, 역사적으로 꽤 오래 전부터 행해져온 방식이다.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와 카라바조 등 미술사를 이끈 거장들은 저마다 성경의 중요 장면을 그렸는데, 그들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미술작품들로 성경 읽기를 대신했다. 즉, 문맹인 사람들은 그림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새기고 묵상에 들었다.
이 책은 단순히 성경의 장면을 그린 명화 모음집이 아니다.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마음이 답답하고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저자는 성경을 읽으며 이 책에 수록된 그림들을 바라봤다. 저자가 경험했듯이, 이 그림들은 우리를 묵상에 이르는 길로 안내한다.
저자는 왜 수르바란의 『양』을 표지 이미지로 써 달라고 요청한 걸까?
그림을 통해 삶을 반추하고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는 저자의 ‘명화묵상법’은 결코 어렵지 않다. 명화와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상관없다. 이 책에 수록된 성경을 읽고 그림을 되새기며 저자의 글을 찬찬히 음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한 루카스 크라나흐의 『선한 목자』는 특별하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말끔하고 깨끗한 차림새를 하고 양을 어깨에 둘러멘 모습으로 ‘선한 목자’를 그렸지만, 크라나흐는 다 헤진 속옷 한 장만 겨우 걸친 상처투성이 목자를 그렸다. 목자는 한 마리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너 온갖 위험 끝에 늑대도 만났을 것이다. 저자의 시선은 어깨에 둘러멘 양도 목자도 아닌, 목자의 누더기 옷에 멈춘다. 크라나흐는 왜 다른 화가들과 달리 누더기를 걸친 목자를 그린 걸까? 그림의 제목 ‘선한 목자’에서 ‘목자’보다 ‘선한’이라는 단어에 묵상하게 되는 이유는 왜 일까? 저자는 크라나흐의 『선한 목자』에서 ‘선하다’를 뜻하는 ‘GOOD’에서 ‘GOD’의 의미를 되새겼다. 즉, 누더기를 입은 목자의 모습을 한 주님을 통해서 ‘악함’의 반대 개념이거나 상대적인 ‘선함’이 아닌 ‘절대선’의 경지를 헤아려본 것이다(183쪽 참조).
이 책의 표지 이미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저자와 편집부의 의견이 엇갈렸던 에피소드에서도 저자의 ‘명화묵상법’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출판사에 원고를 송고하면서 몇 가지 의견을 냈는데, 스페인 출신의 화가 수르바란이 그린 『양』이라는 작품을 표지에 써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출판사는 수차례의 편집회의를 통해 수르바란의 『양』을 책의 표지 이미지로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저자는 몹시 아쉬워했다.
모든 출판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편집회의에서 내리는 결정들은 대체로 보편적이거나 보수적인 방향으로 흐를 때가 많다. 꼼짝 못하게 묶여 곧 도살될 어린 양의 평온한 표정의 그림을 표지 이미지로 쓰는 것이, 편집부는 적잖게 부담스러웠다. 혹여나 이 그림이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편집부의 선택을 지배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달랐다. 저자는, 화가 수르바란이 대속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발이 묶여 제단에 올려진 어린 양 한 마리를 그린 것으로 이해했다. 저자는 검은 배경에 대비되는 새하얀 양에서 그리스도의 죄 없음을 목도한 것이다. 저자는 오랜 세월 이 그림을 통해 묵상하며, 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의 허물 때문에(시 53:8) 보배로운 피를 쏟으신 예수님(벧전 1:19)을 생각했다(7쪽). 저자가 수르바란의 『양』을 표지 이미지로 써 달라고 강하게 요청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거장들의 정신을 깨웠던 한 줄의 말씀, 사람들을 묵상으로 이끄는 한 점의 명화
이 책에서 다룬 그림 이면에 숨겨진 뒷이야기들은 예술과 신앙 사이에서 번민하던 거장들의 내면을 가늠하게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얽힌 이야기는 특히 울림이 크다. 로마 교황청의 주문으로 『최후의 만찬』을 그리게 된 다빈치는 우선 예수님의 모델로 깨끗하고 선하게 생긴 열아홉 살의 젊은이를 찾아서 그를 모델삼아 예수님을 그렸다. 이어서 열한 명의 제자를 모두 다 그리는 데 무려 6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한 명이 남았는데, 바로 예수님을 밀고한 배반자 가롯 유다였다. 다빈치는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아다니다가 사형을 기다리던 로마 지하감옥의 죄수 중에서 악인의 상징 같은 얼굴을 발견하고 그를 모델로 그렸다. 그림을 완성하고 난 뒤에 그 죄수가 다빈치에게 자신을 모르겠냐고 물었다. 그는 바로 6년 전 예수님의 모델인 청년이었다. 그렇게 선하고 성스럽던 얼굴의 청년이 불과 6년 만에 살인마의 얼굴로 변한 것이다. 그 후로 다빈치는 두 번 다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196쪽).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귀향』도 많은 화가들이 그린 주제이다. 하지만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은 매우 특별하다. 호화스럽게 부귀영화를 누리며 방탕하게 살던 렘브란트가 자식들과 아내를 잃고 전 재산을 탕진한 뒤 홀로 비참한 말년을 보내면서 그린 그림이 『탕자의 귀향』이다. 그래서일까, 이 그림에는 탕자처럼 살던 작은 아들의 후회도, 자신의 의(義)를 믿던 큰 아들의 의문도, 자식들이 모두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아버지의 회환도 함께 서려 있다(188쪽).
대부분의 화가들이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의 아름다운 여체에 초점을 맞춰 사무엘하 11장을 그린 것과는 달리, 렘브란트는 깊은 묵상 끝에 우리아 장군이 자신의 운명을 인지하고 제물이 됨을 받아들이는 장면을 그렸다. 그림 속 우리아 장군의 핏빛 옷은 그가 곧 죽을 운명임을 암시한다. 그의 얼굴과 손에 쏟아지는 빛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처럼, 다윗왕의 죄악을 대신 지고 제물이 된 우리아 장군 뒤의 어둠 속에 초라한 눈빛으로 앉아 있는 다윗왕에 저자는 주목했다(107쪽). 렘브란트는 밧세바를 향한 다윗왕의 욕망에서 자신을 나락으로 끌어내린 세속의 덫을 반추했던 게 아닐까?
이처럼 거장들의 정신을 깨운 성경의 말씀이 그들의 손을 통해 명화로 부활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