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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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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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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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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영어로 쓰인 가장 탁월한 유대 역사서”

『책의 민족』은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유대 역사서이다. 미국 역사가이자 작가인 맥스 I. 디몬트는 유대 역사를 학자들만의 것으로 남기지 않고, 4천 년 유대 민족의 일대기를 유머가 깃든 대중적인 필치로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책의 민족』에는 유대 역사와 세계사에 박학다식한 저자의 방대한 지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유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신비한 인물인 모세의 정체에 관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해석부터 유대교와 기독교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드러내준 사해 문서의 발견에 얽힌 이야기, 나폴레옹이 제국 내에 살던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천8백 년 만에 유대 최고 회의를 소집한 일화까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대인과 유대 역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전 세계에서 수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어로 쓰인 가장 탁월한 유대 역사서”라는 평을 받았다.

목차

개정판 머리말
머리말
들어가는 글 - 경이로운 유대 역사 4천 년

1부 유대인의 탄생
1장 보이지 않는 신과 아브라함의 언약
2장 마지못해 예언자가 된 모세
3장 판관과 왕들의 시대
4장 바빌론 유수와 책의 종교의 탄생

2부 유대-그리스 융합 시대
5장 헬레니즘의 유혹과 종교 전쟁
6장 에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7장 그리스의 정신과 로마 제국의 칼
8장 유대-로마 전쟁과 예루살렘 멸망
9장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
10장 디아스포라의 시작과 학자의 도래

3부 예수와 바울의 시대
11장 메시아 예수와 기독교 기원의 딜레마
12장 기독교는 어떻게 로마 제국을 정복했는가?

4부 탈무드와 랍비의 시대
13장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학교들
14장 《탈무드》, 유대 정체성을 지킨 위대한 책

5부 이슬람교의 새로운 여호와
15장 이슬람 문명에서 맞은 유대 황금기
16장 아랍에 그리스 문화를 전하다
17장 《탈무드》와 ‘토라’의 대결

6부 종교 전쟁과 게토 유대인
18장 십자군 원정, 르네상스, 종교 개혁
코즈모폴리턴 유대인
르네상스에 기여한 유대인
에스파냐의 개종 유대인 박해
유대인 차별법과 게토의 탄생
종교 개혁과 유대인 추방
19장 기독교 세계의 유대인 박해
20장 세파르디 유대교와 아슈케나지 유대교
21장 중상주의를 꽃피운 유대 자본가들
22장 신비주의 카발라 유대교의 도전

7부 반유대주의와 시온주의의 탄생
23장 근대 유럽 혁명과 유대인
새로운 예루살렘 ‘암스테르담’
유대인 계몽주의자 멘델스존
근대 유럽의 유대인 혁명가들
로마노프 왕조의 유대인 박해
24장 반유대주의와 드레퓌스 사건
25장 스피노자부터 아인슈타인까지, 유럽 문화의 창조자들
26장 동유럽의 유대 문학 르네상스
27장 미국에 세운 새로운 바빌론
28장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29장 현대 시온주의 운동과 이스라엘의 탄생

8부 역사의 유목민과 모자이크 문화
30장 자유를 향한 디아스포라의 드라마

부록 |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역사(1914~2019년)
주석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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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맥스 I. 디몬트 (지은이), 김구원 (옮긴이)

출판사리뷰

구약의 아브라함 시대부터 세계사의 주역이 된 20세기까지
‘책의 민족’ 유대인의 경이로운 4천 년 역사 이야기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문명이 쇠퇴하고 소멸하는 동안 나라도 없이 떠돌던 유대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고대 팔레스타인과 바빌로니아에서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거쳐 미국과 이스라엘까지, 네 대륙으로 흩어지고 여섯 문명을 거치면서도 유대인은 어떻게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중세 이슬람 문명과 르네상스, 그리고 근대 혁명기 유럽과 미국에서 수백 년 동안 꽃을 피운 유대인의 놀라운 창조성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예수, 바울,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을 배출하고 노벨상 수상자의 20퍼센트를 차지한 유대인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슬람 제국 시절 유대인은 아랍인으로부터 ‘책의 민족(People of the Book)’이라는 존경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며 번영했다. 수천 년간 나라 없이 살아가야 했던 유대인에게는 그들만의 특별한 생존법이 필요했다. 그 중심에 바로 ‘토라’와 『탈무드』를 비롯한, 그들의 고유한 정신과 사상을 담은 책들이 있었다. 디몬트는 유대 전통과 역사 속에서 일구어낸 유대인의 지적 성취를 총체적으로 살핀다. 유대 철학을 그리스와 로마에 전파한 『70인역 성경』부터 유대인의 지혜를 집대성한 『탈무드』와 19세기 유대 민족주의의 원형 『쿠자리』까지, 유대인은 민족의 책을 통해 정체성을 지키며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창조성을 키웠다. 유대인에게 책은 지혜의 뿌리이자 생존의 도구였고 창조의 원천이었다.

수천 년 인류 역사를 관통한 영적·지적 성취의 숨은 주역
유대인은 수천 년간 수많은 역경과 도전을 이겨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 가나안의 방랑기, 바빌론의 포로 생활을 거쳐 헬레니즘 세계에 융화되었고, 로마 제국의 흥망을 지켜본 후 이슬람 문명권과 르네상스기 유럽에서 번성했으며, 중세 암흑기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수많은 문명과 종교와 민족이 역사에서 사라지거나 흡수되었을 때 유대인은 어떻게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유대인이 문화를 창조하는 공동체로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즉 유대인 특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삼아 유대 역사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유대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고 유대 사상을 이웃 민족과 구별하게 해준 ‘모세 율법’부터, 유대교의 바탕이 된 ‘토라’, 포로 생활에서 생존하기 위해 새로운 신 개념을 만들어낸 예언자들, 그리스 문학과 과학 저술을 아랍에 전한 번역가들, 유대 사상을 지식 체계로 구체화한 『탈무드』까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신념과 사상을 가슴에 품고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 책은 한 민족이 소멸의 위험에 맞서 전진과 후퇴, 도전과 응전을 거듭해 온 기나긴 투쟁의 서사시이자, 유대인이 수천 년 역사를 관통하며 인류의 영적·지적 성취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생동감 넘치고 매혹적인 이야기다.

세계사의 주인공인 적은 없었으나 세상을 정복한 민족, 유대인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의 약 0.2퍼센트(1500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 과학, 경제, 철학, 문학, 음악, 미술, 상업, 산업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유대인은 주변국을 정복해 제국을 이루는 방식으로 역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역사의 전환점이 된 사건 뒤에는 늘 유대인이 있었다.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구별 짓게 해준 ‘유일신 사상’은 세계 최대의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탄생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에 능통했던 유대인 언어 천재들은 책을 활발히 저술하고 번역하여 유럽과 아랍 문명의 번영을 주도했다. 근대 유대인 혁명가들은 1848년 이탈리아의 통일에 참여했고, 프랑스인·독일인·영국인·러시아인으로서 싸우며 19~20세기 유럽의 변혁을 이끌었다.

전 세계를 배경 삼아 펼쳐지는 유대 민족의 놀라운 모험
유대인은 지구상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책의 민족』은 유대인이 남긴 발자취를 추적하기 위해 먼저 세계 각국의 역사를 개괄하고, 네 개의 대륙과 여섯 개의 문명에서 꽃피운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를 속도감 있게 그려낸다. 유대의 신 여호와와 아브라함의 만남에서부터 수천 년간 이어진 유랑 생활, 헬레니즘 문화의 도전, 아랍과 유럽에서 맞이한 부흥기, 유럽에 퍼진 반유대주의, 시온주의의 탄생과 이스라엘 건국까지 4천 년 유대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마치 모험 소설을 읽는 듯하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겪어내며 살아남은 유대인의 생명력과 끈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의 관심 밖에 있던 유대인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다
역사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에서 유대 역사를 전혀 다루지 않았고,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유대인의 역사를 ‘각주’로만 다루었다. 이처럼 유대인은 세계 곳곳에 남긴 지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유대인과 같은 시기에 역사에 등장했던 다른 민족과 달리, 유대인은 민족의 영광을 증언해주는 유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대신 유대인에게는 사상이 있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유물만 남긴 민족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사상을 남긴 유대인은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책의 민족』은 유대 사상의 핵심을 이룬 ‘모세 율법’, ‘토라’, 『탈무드』의 탄생 배경과 발전 과정을 깊이 있게 다루면서 역사의 뒷면에 존재했던 유대인을 역사의 무대 앞으로 끌어낸다.


유대인과 유대 사상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기원전 2000년경 유대인은 중근동 민족들 사이에서 뒤늦게 출현했다. 유대 역사는 최초의 히브리인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만나 언약을 맺은 그날로부터 시작한다. 신은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계명을 내렸고,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가나안 땅에서 방랑하던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은 유일신 사상, 할례, 인신 제사 금지였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고 풍요 제의를 올리던 근동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유대인은 보이지 않는 신을 믿었고 어디에서나 회당을 세워 사제 없이 신과 직접 소통했다. ‘하나뿐인 신’과 ‘보이지 않는 신’ 개념은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확연히 구분되게 해주었고, 각 문명을 넘나들며 지적 성취를 이룬 원동력이 되었다.

유일신 사상과 보이지 않는 신 때문에 유대인의 지적 능력이 향상되었다. ‘움직이는 성막’이 유대인들을 특정한 장소에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기회를 따라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옮겨 다닐 수 있었다. …… 그리스인의 전통 의상인 튜닉, 아랍의 무슬림 랍비 무프티, 미국의 아이비리그처럼 디아스포라 문화가 어떻게 포장되었든 그 안에는 언제나 여호와 유일신교가 있었다. - 171~179쪽

유대 정체성을 세운 ‘모세 율법’
성서에 따르면 이집트로 가 유대인을 해방시키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모세는 홍해를 지나 시나이 사막으로 유대인을 이끌었고 그곳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유대인에게 주었다. ‘모세 율법’은 유대인의 정치·문화·종교 등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신의 명령이었고, 개인과 개인의 관계, 개인과 국가의 관계, 개인과 신의 관계를 규정했다. 모세 율법은 가나안에서 방랑하는 유대인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유대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해주었다. 약 3천 년 전에 작성된 모세 율법에는 오늘날 미국 헌법의 철학과 유사한 자치주의와 휴머니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미국 헌법의 철학과 모세 율법의 철학 사이에는 신기한 유사성이 있다. 연방 정부가 헌법이 부여한 권한만 지니는 반면에 개별 주정부들은 그들에게 명시적으로 금지된 것을 제외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듯이, 유대인들도 모세 율법이 금지한 것을 제외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 이것은 유대인에게 엄청난 자유를 허락한다. 그들은 율법에 명시적으로 금지된 것을 하지 않는 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60쪽


그리스 문명은 유대 사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기원전 3세기경, 근동 지역에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가 들어왔다. 그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통치를 받으며 헬레니즘 문화와 맞닥뜨렸다.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추구했던 그리스인과 달리 유대인은 금욕적인 유일신 신앙과 정신적 가치를 추구했다. 이렇게 달랐던 두 민족의 사상은 어떻게 한 지점에서 만났을까?

유대인 대부분은 헬레니즘 자체는 거부했지만 그리스 철학은 철저히 연구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제공한 모든 지적 유산을 흡수하여 유대인의 감각을 더해 자신들만의 탁월하고 수준 높은 지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이런 사상적 융합의 분위기 속에서 기원전 3세기에 『구약 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구약 성경』을 플라톤 철학으로 해석했다. 플라톤에 심취했던 필론은 유대 신앙을 그리스 철학과 융합한 최초의 학자였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
『구약 성경』은 근동 지역 언어인 아람어로 쓰인 [다니엘], [에스라]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당시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 등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구약 성경』의 내용이 언어보다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읽는 것이 성경을 전혀 모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70인역 성경』은 유대인이 이방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고심 어린 전략에서 탄생했다. 이 책은 외국의 이방 문화에서 성장한 유대인을 유대교의 테두리 안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70인역 성경』은 그리스, 로마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70인역 성경』은) 문학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그리스어 저작이며, 유대인보다 이방인에게 더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유대의 휴머니즘과 철학을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전파한 것도 이 책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전도하러 왔을 때 그의 교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미 『구약 성경』에 익숙했다. - 171, 172쪽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은 어떻게 유대 정체성을 지켰나?

유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흩뜨리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인데, 팔레스타인 땅 밖에서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디아스포라 역사는 유대인이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때부터 19세기 유럽의 게토에서 해방될 때까지의 기간을 뜻한다. 이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주변 문화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지 않고 유대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을까?

『탈무드』,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만들어 디아스포라라는 위기에 맞섰다. 『탈무드』는 완성되기까지 2백 년이 넘게 걸렸다. 1100년경 법전화된 『탈무드』의 편찬자들은 구전으로 전해 오던 율법을 구체적인 윤리 체계로 정리했다. 도덕과 신앙에 관한 철학적 담론뿐 아니라 위생, 천문, 경제 등 일상적 문제까지 담은 『탈무드』는 유대인의 생존 도구였다. 유대인은 언제 어디서나 『탈무드』를 읽으며 유대적 삶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탈무드』는 변화된 삶의 조건에 맞게 어디에서나 적응 가능한 유대인을 창조했고, 동시에 흩어진 유대인을 영적 공동체로 결합하는 역할을 맡았다.

『탈무드』 연구자들은 하느님을 일상적인 활동에 받아들여, 유대인의 행동이 하느님의 성품으로 물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라가 종교적 유대인을 만들었다면, 『탈무드』는 유대인의 관심을 과학과 이론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성경이 민족주의적 유대인을 만들었다면, 『탈무드』는 어디에서나 적응 가능한 유대인을 창조했다. - 238쪽

유대 학문의 구심점 ‘예시바’
『탈무드』의 산실은 유대인 고등교육기관인 ‘예시바’이다. 이 학교들에서 유대 사상이 『탈무드』 또는 ‘지혜’라고 불리는 지식 체계로 구체화되었다. 예시바의 역사적 역할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이방인의 땅에서 살면서 급속도로 변화할 유대인의 운명을 보호하기 위해 율법에 융통성을 부여한 데 있다. 최초의 예시바는 3세기에 로마의 보복을 피해 팔레스타인에서 탈출한 랍비들에 의해 바빌론에 세워졌다. 9세기 이후에는 유럽에 최초로 예시바가 세워졌고, 13세기 이후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예시바는 유대 문화에서 지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12세기에 최초로 세워진 유럽 대학의 원형이 되었다.

유대 사회에서 학자는 점점 더 큰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학자들은 오늘날 기업 총수나 스타 영화 배우보다 더 크게 존경받았다. 유대 전설에서 영웅은 칼로 난폭한 괴물을 죽이는 기사가 아니라, 지식으로 무지의 용을 죽이는 사람이 되었다.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었고,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무식하면 경멸의 대상이었다. 유대 랍비들은 학식 있는 평민이 배우지 못한 귀족 자제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임신한 여자들은 배 속의 아이가 학자의 영으로 충만하기를 원하며 예시바에 모여들었다. - 245쪽


아랍인은 왜 유대인을 존경했을까?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은 첨예하게 갈등하는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두 민족은 유대인이 아라비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1세기 말부터 15세기 무렵까지 평화롭게 공존했다. 아랍인은 유대인을 ‘책의 민족’이라 부르며 존경했고, 유대인은 아랍인의 관용에 힘입어 유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6세기 아랍인은 사막 유목민이었고, 7세기 아랍인은 아라비아반도의 정복자였으며, 8세기 아랍인은 비잔틴을 제패한 제국의 주인이었고, 9세기 아랍인은 눈부신 문명과 예술·건축·과학의 선도자였다. 이슬람 제국의 번영 뒤에는 유대인이 있었다. 유대인이 아라비아로 들어오면서 상업과 산업이 부흥하고, 메카가 국제 도시로 탈바꿈되고, 학문이 꽃피기 시작했다. 이 시대 유대인 가운데 철학, 의학, 과학, 수학, 언어학 분야에서 위대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유대인을 존경한 이슬람교의 메시아
아랍인은 유대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구약 성경』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 중 하나인 무함마드는 유대교를 향한 열정과 존경심이 가득했던 아랍인이었다. 『코란』에 따르면 동굴 속에서 백성을 어떻게 구원할지 고민하던 무함마드 앞에 아브라함, 모세, 예수가 겪었던 것처럼 신이 천사 가브리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준 토판에는 하느님(알라)이 무함마드를 ‘전달자’로 임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하고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이슬람교의 탄생에는 유대교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제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영웅이 나타나 아랍인의 자연 숭배, 기독교도의 구원 교리, 유대인의 유일신 사상을 새로운 신 개념으로 통합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 영웅이 바로 무함마드였고, 그 종교가 이슬람교였다. …… 무함마드는 대상들에 의해 시리아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처음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접한다. 만남 이후 그는 평생 유대인의 ‘그 책(The Book, 『구약 성경』)’을 존경했다. 유대 족장들은 그의 영웅이 되었고, 이후에 이슬람교의 성경인 『코란』에도 그 영웅들 이야기가 들어가게 된다. - 274, 275쪽

이슬람과 유럽을 연결한 문화 전도사
이슬람 제국이 번성한 8세기 무렵이면 그리스어로 쓰인 책 대부분이 사라졌고 그리스어는 잊혔다. 아랍인은 시리아어 번역본을 통해 전해지거나 유대인과 로마인의 도서관에 보존돼 있던 그리스어 서적을 유대인에게 아랍어로 번역하도록 장려했다. 당시 여러 문화를 경험한 유대인은 히브리어, 아랍어, 그리스어, 라틴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에 능통했다. 유럽의 군주들도 유대인의 능력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리스·아랍의 저술과 히브리 문학을 라틴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유대 학자들을 나폴리로 초청해 히브리어를 가르치게 했다. 유대 번역가들은 유럽에 아라비아 숫자와 ‘0’의 개념을 소개했고,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플라톤의 철학과 소포클레스의 시를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현대의 학자 모지스 해더스(Moses Hadas)가 그리스 과학과 인문주의를 유럽에 전달하는 일을 가리켜 이른 ‘유럽으로 통하는 터널’이 8세기 유대인에 의해 재개통되었고, 그 터널은 1400년까지 유지되었다. 최초의 번역서들은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를 아랍어로 번역한 것이었지만 곧 그리스어와 아랍어 저술들도 히브리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히브리 문학과 철학도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즉 쌍방향의 문화 소통이 발생한 것이다. - 284, 285쪽


근대 유럽 문명의 감춰진 창조자

중세 유대인의 역사는 영국에서는 1300년경에, 프랑스에서는 1400년경에, 에스파냐에서는 1500년경에 끝났다. 각 나라에서 유대인이 추방되거나 게토로 쫓겨난 것이다. 근대 유대인의 역사는 유대인과 유대인의 기술이 필요해진 17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다시 유대인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역사의 무대가 근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유대인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십자군 운동이 끝난 14세기에 그리스?로마 고전 문화 부흥 운동 르네상스가 온 유럽에 퍼졌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는 유대인을 지적인 민족으로 인정했고, 일찍부터 이탈리아로 그들을 불러들였다. 이탈리아 유대인은 의사, 시인, 천문학자, 금 수공업자, 약사, 선원, 조각가 등 당시 존재했던 거의 모든 전문직에 종사했다. 이탈리아인은 철학과 과학, 의학과 수학을 유대인으로부터 배웠다.

르네상스가 유대인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분야에서 꽃피운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르네상스가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독일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은 그곳에서 유대인이 3백 년 동안 그리스, 아랍, 히브리 고전들을 라틴어로 활발하게 번역했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나폴리로 프리드리히 2세가 유대인을 초청해 그리스 책들을 번역하게 했고, 기독교 학자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게 했다는 것이다. - 322쪽

프랑스 혁명과 유대인의 해방
유대인을 프랑스 시민으로서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1789년 프랑스 혁명기와 이후 나폴레옹 제국에서 가장 뜨거운 정치적 논쟁이었다. 교회는 혁명의 적이었으므로 유대인도 혁명 공화국의 적이 되었다. 18세기 유대 계몽주의자 모제스 멘델스존을 통해 유대 문화에 감화를 받은 귀족 출신 혁명 지도자 미라보 백작은 자신이 시민의 보편적 권리라 여긴 것들을 유대인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변론했다. 결국 유대인 시민권 문제는 국민 투표에 부쳐졌다. 파리의 60개 구 가운데 53개 구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데 찬성했다. 1791년에 프랑스 유대인 7만 명이 프랑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시민이 되었다. 그 뒤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해방이 뒤따랐다.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스스로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독립 집단이자 거의 완전한 자치 국가를 이루고 살던 유대인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대산헤드린 의회를 소집해 유대인의 율법에 관한 12가지 질문을 던졌다. 나폴레옹은 대산헤드린 의회에서 유대인은 자기들만의 국가를 만들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 유대인은 조국인 프랑스를 위해 싸울 것이라는 답을 얻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카드를 펼쳐 보였다. 그는 거의 1천8백 년 만에 최초의 대산헤드린 의회를 소집했다. 대산헤드린 의회는 로마가 성전을 파괴한 기원후 70년 이래로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유대인이 특별 대산헤드린 의회에서 자신들의 대답을 재천명함으로써, 그 대답이 모든 유대인에게 법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제야 나폴레옹의 의도를 알아챘지만, 대산헤드린이라는 유서 깊은 의회가 다시 한번 유대인의 삶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에 감격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은 유대인 세계에 급속도로 퍼졌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모든 유대인에게 알려졌고, 전 유럽과 미국의 회당에서 그를 위한 특별 예배가 진행되기도 했다. - 450쪽


유대인은 왜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 되었나?

유대인이 해방된 뒤 19세기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19세기 이전에도 유대인은 속물스러운 민족이라 경멸당했고, 대량 학살되고, 고문당하고, 추방되었다. 디몬트는 과거 유대인에게 자행된 폭력은 ‘반유대적(anti-Jewish)’ 행위라고 지칭하며 반유대주의와 구분한다. 반유대주의와 반유대적 행위에는 서로 다른 동기가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이전에는 많은 민족이 유대인과 비슷한 일을 겪었다. 중세에 기독교도가 유대인에게 폭력을 가한 이유는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개종 유대인은 기독교도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이처럼 반유대적 행위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의식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면,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범죄’로 만드는 것이었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 시대의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다.

유럽에 혁명이 전염병처럼 돌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탄생한 19세기는 ‘해진 화이트칼라 계층(frayed-white-collar class)’과 유대인이 갑자기 정치인들에게 중요해진 시기였다. 우익 정치인들은 좌익 정치인들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몰락 계층(declasse)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그들은 몰락 계층의 불안정한 삶을 당시 사회적·경제적 조건이 아니라 유대인의 악행 탓으로 돌렸다. …… 우익 정치가들은 ‘유대인만 없다면 몰락 계층의 모든 사람이 사회의 중요한 기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반유대주의의 시작이었다. - 474, 475쪽

현대 시온주의 운동과 이스라엘의 탄생
나치 암흑기에 절멸의 위기를 겪은 유대인은 다시 세력을 결집해 새로운 유대 국가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반유대주의의 탄압 속에서 유대인으로서 생존하겠다는 새로운 의지는 시온주의를 이념으로 삼아 불타올랐다. 19세기에 싹을 틔운 ‘시온주의’는 ‘시온으로의 복귀’, 즉 예루살렘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정치적 고향이라고 주장하며, 옛 고향 땅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모았다. 시온주의 운동이 많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전 세계 각지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모여들었고, 마침내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유대 국가가 탄생했다. 건국 직후 이스라엘과 원래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던 아랍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두 민족 간의 갈등과 다툼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에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공식 출범했다. 그곳에서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는 벤구리온의 목소리를 들었다. “유대 민족의 타고난 권리와 역사적 권리에 의해,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대 국가가 설립되었음을 선포한다.” 선포 직후 벤구리온은 신생 유대 국가에 대한 아랍 국가들의 협조를 구하면서 이스라엘은 “중동 전체의 발전에 기여할 준비가 되었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집트는 이 신생 국가를 없애기 위해 곧 침략할 것임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다. 다른 세 아랍 국가?요르단, 레바논, 시리아?도 형식적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이집트와 같이 행동하겠다고 발표했다. - 621쪽

상품필수 정보

도서명
책의 민족
저자/출판사
맥스 I. 디몬트 (지은이), 김구원 (옮긴이),교양인
크기/전자책용량
214*152*13
쪽수
224
제품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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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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