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수많은 해석이 경쟁하는 역사라는 전쟁터에는 늘 붐비는 곳도 있지만, 고증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빈 곳도 많다. 그중에서도 사찰의 역사는 특히 그러하다. 사찰의 역사는 수백년에 달하지만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몇 토막이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전부일 때가 많다. 절에 세워져 있는 유물 앞 안내판에는 늘 “불에 타서 소실되고 중건했다”는 문구가 빠지지 않는다. 잦은 외침으로 인해 늘 공격의 대상이 됐던 사찰은 잿더미에 잿더미를 거듭하는 오욕의 세월 속에서 본연의 기록을 잃어버렸고, 수많은 사실이 깜깜한 과거 속에 묻혀버렸다. 후대에 조각보를 기우듯 만들어낸 역사는 애초의 진실과 멀어져서 사찰의 기원을 올려 잡는다든지, 유명 스님과의 연계점을 만든다든지 하는 세속적 욕망에 침윤되기 일쑤였다.
최근 이런 분위기에 정문일침을 꽂는 듯한 학문적 시도가 나왔다. 화엄사와 오랜 인연을 맺은 무진 스님이 박사논문으로 화엄사의 역사를 고증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단일 사찰의 통사적 시원을 밝히고자 한 시도 또한 낯설고 새롭지만, 거의 모든 기록물이 사라진 상황에서 선사들의 비문이나 유물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통해 충분히 과거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사찰사 서술의 하나의 인상적인 사례는 충분히 될 만하다고 판단된다.
목차
추천사
머리말 신비의 화엄사 한국 불교의 역사 속으로
제1장 서론
제2장 중관해안의 『화엄사사적』과 창건주 연기
제1절 『화엄사사적』의 비판적 검토
1. 화엄사의 격을 높이려는 시도와 연기의 문제
2. 신라의 땅 구례와 지리산에 대한 의미
3.『화엄사사적』이 화엄사의 사료가 될 수 없는 원인
제2절 연기와 연기의 화엄에 관한 성격 검토
1. 연기와 적멸당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2. 통일신라 황룡사의 자장계 화엄
3. 자장계 연기의 화엄사와 관혜
제3장 선사의 비문에 보이는 화엄사 관련 사료
제1절 통일신라시대 선사의 비문 검토
1. 통일신라시대 선사의 비문 성격 고찰
2. 17명의 선사를 통한 연기의 성격 비교 고찰
제2절 통일신라시대 화엄과 선문의 연관성 분석
1. 통일신라시대 선문의 특징과 화엄의 관계
2. 화엄종과 선문 산사 사찰의 공통된 표현 방식
3. 통일신라 화엄 사찰과 선문 사찰의 연관성
제3절 9세기~나말여초 사찰의 상황 분석
1. 사찰의 창건과 주지 임명의 과정
2. 9세기 불사와 나말여초 불사의 차이
3. 선사의 부도 탑과 사사자삼층석탑의 비교
제4장 통일신라 불교 확산의 거점 화엄사
제1절 화엄사 위상 변천 과정
1. 통일신라 대렴이 들여온 차 씨 재배와 화엄사의 위상
2. 고려시대 연기 화엄의 변화와 화엄사
3. 조선시대 화엄의 성격이 사라진 연기와 화엄사
제2절 8세기 중반 지리산 권역 화엄종 확산의 근거 자료 검토
1. 754년 호남의 불사 『백지묵서 화엄경』
2. 766년 조성된 독창적 화엄 본존불, 비로자나불좌상
3. 8세기 중반 화엄의 확산 배경과 독창성
제3절 화엄사의 독창적인 창작물의 성격과 조성 시기 분석
1.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2. 차 공양인물상과 석등
3. 최초의 고복형 화엄사석등
4. ‘화엄석경’
5.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
제4절 통일신라 화엄사의 가람 배치 분석
1. 통일신라 화엄사의 건축 유구 검토
2. 통일신라 건축물의 배치 구도
제5장 결론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무진 (지은이)
출판사리뷰
부처가 지리산으로 간 까닭은?
단일 사찰의 역사를 단행본 한권으로 고증한 비범한 연구
대렴의 차 씨를 뿌린 곳은 화엄사, 차 문화의 중심지로 재조명
불교가 경주를 벗어나 전국으로 확산하게 된 것엔
거점 사찰 화엄사의 역사가 존재한다
철저한 사료 분석으로 화엄사의 초기 역사 200년을 밝힌 수작
무진 스님이 풀어낸 통일신라 화엄사의 모습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수도인 경주를 위주로 하던 불교가 화엄사를 거점으로 삼아 전국 불교로 퍼져 나갔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통일신라 남악 화엄사는 의상의 화엄종보다 앞서는 창건주 연기의 화엄종 본찰이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화엄사가 구례 지리산의 차 재배를 선도하여 한국 차 문화를 퍼트린 장본인이라는 점입니다. _ 추천사, 화엄사 주지 덕문
연기처럼 사라진 창건주 연기緣起법사의 행방
이 책이 다루는 것은 화엄사의 역사다. 화엄사의 역사 또한 전쟁의 불길을 피하지 못했기에 저자는 이 책에서 사라진 화엄사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기존 사료를 분석하고 새로운 사료를 보태어 다른 각도에서 고찰을 시도했다. 755년 조성된 『백지묵서 화엄경』을 통해 연기緣起법사(?~?)가 호남의 무주(현재 광주) 지역에서 불사를 일으킨 황룡사의 승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화엄사의 유일한 사료인 중관해안中觀海眼(1567~?)의 『화엄사사적』(1636)에 기록된 연기와는 일치점을 찾을 수 없었다. 『백지묵서 화엄경』의 연기법사가 화엄사의 창건주라면 화엄사의 창건 시기는 755년 무렵이겠으나 『화엄사사적』에서는 544년에 화엄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또한 『화엄사사적』은 연기를 9세기 후반 활동한 선각도선과 같은 인물로 서술하여 더욱 혼란을 낳았다. 결국 『화엄사사적』은 역사 사료로써 신뢰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저자는 먼저 화엄사와 연기법사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다양한 사료를 비교 검토했다. 그리고 9세기에 활동한 선사의 일대기를 적어놓은 선사의 비문을 통해 통일신라 불교계의 상황을 분석했다. 마지막으로 동시대 다양한 유물을 비교 분석하고 가람 배치를 분석한 결과 화엄사의 역사를 복원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화엄사 창건은 755년, 자장계 화엄 전통
제2장 ‘중관해안의 『화엄사사적』과 창건주 연기’에서는 화엄사의 격을 높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중관해안이 『화엄사사적』을 편찬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중관해안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화엄사가 크나큰 인적·물적 손실을 당한 시기에 집필했기 때문에 온전한 역사를 확인하기 어려웠고, 그러한 이유로 화엄사를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와 동격으로 만들기 위해 창건 시기를 544년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대표적인 신라 승려들이 화엄사에 인연을 두고 있는 것처럼 서술했다. 그 결과 역사적 진실을 무시한 허구와 왜곡의 기록만 남게 되었고 화엄사의 역사에서 창건주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말았다. 기존 문헌 자료와 선임 연구를 검토한 결과 연기는 자장계 화엄종 승려라는 점을 확인했으며, 8세기 중반 창건된 화엄사는 자장계 화엄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즉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 지리산 권역에 창건된 황룡사 자장계 화엄종 승려인 연기가 창건한 사찰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화엄사는 나말여초 연기계 화엄종 사찰인 남악 화엄사를 대표하는 관혜에 의해 후백제 견훤을 지지하다가 고려의 건국과 함께 쇠퇴 기로에 접어들었다. 소용돌이치는 나말여초의 변환기에 권력의 향방을 잘못 짚은 것이다. 화엄사는 쇠퇴하는 흐름 속에서도 1092년 대각국사 의천이 화엄사를 방문하는 무렵까지 연기의 화엄종 법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 후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1281년에 이르면 연기의 화엄종 법맥은 사라지고 화엄사는 의상계 화엄종 사찰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분석 결과 나말여초의 시기를 기점으로 화엄사에서는 연기의 화엄종 색채가 옅어지기 시작하여 13세기 말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17명 선사의 비문이 알려준 나말여초 불교계의 진실
제3장 ‘통일신라 선사의 비문을 중심으로 한 화엄사 관련 사료’에서는 9세기~나말여초의 시기에 활동한 17명의 선사의 일대기를 고찰했다. 그 목표는 8세기 중반 창건된 화엄사의 성격을 비교 분석하여 확보하는 것이다. 선사의 비문은 선사가 활동한 시기의 불교계 상황을 사실 그대로 전달해주는 일차 사료다. 대표적 역사 사료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도 13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이기에 통일신라에서 나말여초까지 불교계의 상황은 13세기 불교계의 시야로 정리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선사의 비문은 통일신라에서 나말여초 불교계의 상황을 사실대로 검토할 일차적 사료가 되는 것이다. 선사의 비문은 당시 화엄사의 입지와 위상을 추정할 만한 중요한 불교계 정황들을 담고 있다. 먼저 선사의 선문은 화엄종을 바탕으로 활동하면서 화엄을 중시하고 있으며, 9세기에 선문은 화엄종 사찰에서 선문 사찰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화엄사 석축의 조형성이 다른 선문 사찰들에 보이는 동일한 조형물을 비교 분석하는 기준점을 제공한다. 즉 화엄사에 조성된 석축 양식이 다른 선문 사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면 화엄사 조형물이 원형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선사의 비문을 통해 나말여초 시기에는 사찰의 대단위 불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화엄사의 석축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되었으며, 시기는 8세기 중반~나말여초 이전으로 범위를 확정할 수 있다. 즉 화엄사의 대단위 불사는 약 750년부터 89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시대성을 확보한 것이다. 선사의 비문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의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에도 기여했다. 금당의 뒤쪽 언덕에 세워져 있는 사사자삼층석탑은 승려의 부도 탑으로 의심되었으나, 선사의 비문을 검토한 결과 선사의 부도 탑은 9세기 사찰 밖 산등성에 조성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9세기 선사들은 부도 탑 밑에 매장하는 장례 전통을 따랐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부도 탑이 사찰 안으로 들어와 금당 뒤쪽 위에 건립된 것은 고려 건국 이후에 나타난 현상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화엄사의 금당 뒤 높은 곳에 세워진 부처의 사리탑인 사사자삼층석탑의 조성 방식이 고려 건국 이후에는 선사의 부도 탑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사의 비문에서 선사의 부도 탑 건립의 성격을 분석함으로써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은 부처의 사리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통일신라 화엄종 사찰과 화엄사의 성격을 고찰할 수 있었다.
차 문화의 거점으로 불교 전국 확산에 기여
제4장 ‘통일신라 불교 확산의 거점 화엄사’에서는 자장계 연기의 화엄종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화엄사의 위상을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화엄사에 조성되어 있는 독창적인 조형물을 분석하여 지리산 권역에 화엄사가 창건된 이유를 밝히고자 했다. 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 씨를 828년 지리산 화엄사에서 심어 재배했으며, 화엄사에서 재배된 차가 여러 지역으로 전달되면서 신라에 차 문화가 성행했다는 사실을 통해 9세기 화엄사가 호남 불교계의 중심 사찰이었음을 입증했다. 또한 882년 선각형미와 886년 동진경보가 화엄사 관단에서 비구계를 수계한 사실을 통해 화엄사가 호남 불교계를 담당하는 관단 사찰이었다는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여러 문헌을 통해 고려시대에는 화엄사의 자장계 화엄 전통이 의상계 화엄으로 통합되고, 이후 조선시대에는 화엄사의 연기가 화엄종 승려가 아닌 선사로 변모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기’라는 한자 표기가 달라진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렇듯 15세기 말부터 화엄사에서 연기로 대표되는 전통은 사라지고 있으며, 화엄사의 쇠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화엄사는 8세기 중반 지리산 권역 화엄종 사찰의 맏이 격으로 창건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당시 화엄종의 자부심을 말해주는 독창적 형태의 조형물들이 조성되었다. 대표적으로 현재까지 창작의 조형성이 밝혀지지 않은 사사자삼층석탑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유일하게 화엄경으로 벽을 두른 ‘화엄석경’, 고복형 석등의 조형성을 선도한 화엄사 석등 등 단일 사찰로서는 독창적인 조형물을 가장 많이 탄생시켰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화엄사가 가장 융성했던 통일신라 8세기 중반~나말여초의 가람 배치를 추정했다. 우선 통일신라 다듬돌 초석을 활용한 전각들을 검토하여 처음 건립된 자리를 확인했다. 이어서 건립 이후 자리가 변경되지 않은 서 오층석탑을 기준으로 통일신라시대 화엄사의 가람 배치를 추정했다. 이상의 연구는 화엄사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데 주안점을 둔 탐구 방안이다. 특히 의천이 말한 ‘적멸당’과 남효온이 말한 ‘탑전’이 현재 사사자삼층석탑 옆 탑전이라는 사실 확인은 통일신라 화엄사의 위상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하고 있다.
1092년 문헌에 나타난 ‘적멸당’이 오늘날 적멸보궁을 뜻한다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화엄사의 적멸당이 한국 불교계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적멸보궁의 의미와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해석했다. 또한 ‘적멸당’이라는 표현 속에서 화엄사가 지리산 권역을 중심의 호남 지역을 아우르는 연기의 화엄종 사찰이라는 역사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신라에 차 문화를 성행하게 한 화엄사의 역할을 통해 당시 화엄사가 신라의 관단 사찰이자 호남의 중심 사찰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