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어느 날 우연히 발견된 사진들. 사후 남겨진 사진 작품들로 뒤늦게 세상의 빛을 받은 사진작가. 다양한 삶의 모습을 자신만의 프레임 안에 담은 예술가. 고독했으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비비안 마이어. 프랑스 산골 마을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기억과 그 유산으로 평생의 고단한 삶을 견뎌냈을 그녀의 삶을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가 퍼즐 조각을 맞추듯 세심하게 그려낸 책이다. 수십 년 동안 사진 작업을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조차 자기 작품을 생전에 거의 보지 못했던 예술가. 역광 속에서, 굴곡들 속에서 외로이 생을 마친 비비안 마이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비비안이 찍은 사진 한 컷 없이 오직 텍스트만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독자들은 역광에 선 그녀의 삶을, 그곳에서 그녀가 어떤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는지를, 그리고 그 피사체를 어떻게 사진에 담아내고자 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호숫가의 벤치009
근원들의 시간040
목숨을 건지다056
프랑스에서, 행복의 한 조각068
모든 것이 무너질 때082
대면, 그리고 돌아옴097
뉴욕, 견습의 시기108
시카고, 다른 삶을 향해 주사위가 던져지다125
붕괴 그리고 추락의 현기증146
어둠이 내리다162
책을 마치기 전에…172
옮긴이의 말186
저자
가엘 조스
출판사리뷰
보이지 않는 사진작가, 잊힌 여인 비비안 마이어
암울한 인생이었으나, 이제 영광이 눈부시게 빛나는 한 예술가의 이야기
추운 겨울, 얼어붙은 미시건 호숫가, 벤치에 앉아 있는 한 노파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저자는 비비안 마이어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양새 없는 외투를 걸치고, 닳아빠진 구두를 신고, 해진 모자를 쓴 여인. 벤치 양옆에 선 헐벗은 나무 두 그루까지…. 흑백 사진이어야만 할 것 같은 이 장면은 실제로 비비안이 맑은 정신으로 겨울바람을 쐰 마지막 순간이었던 듯하다.
아이들을 돌보던 보모. 자신이 찍은 사진 대부분을 실제로 보지 못한 사진작가. 뉴욕과 시카고의 길거리를 지칠 줄 모르고 걸어 다니던 사람, 프랑스 오트잘프 지역 푸른 골짜기에서 보낸 행복한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던 아메리카 여자. 그냥, 사라져, 잊힌 여인일 뻔했던 예술가 비비안 마이어.
그녀의 사진들은 어느 날 우연히 발견되었다. 시카고 교외 한 가구 창고에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사진·필름 더미가 경매에 나왔고, 25세의 젊은 사업가 존 말루프가 그것들을 낙찰받고서다. 그는 사진에 문외한이었으나, 자기가 수중에 넣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에 그 사진을 찍은 사람에 대한 정보를 캐 나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베일에 가려진 한 여인의 삶이 조금씩 드러났다. 비비안 마이어는 그 얼마 전 83세의 나이로,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 참이었다.
그때부터 존 말루프는 끈질기게 노력한다. 전문가들이 그녀의 작품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들로 전시회를 열고, 그녀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고, 책을 출간하고,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한다. 그녀의 비범한 시선이, 독특한 앵글이, 섬세한 프레임이 예술계를 강타한다. 그녀의 삶이 일면들이 조금씩 알려질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그녀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저자 가엘 조스는 그녀의 뿌리인 프랑스에서의 흔적들을 찾아 나선다. 비비안 마이어의 모계가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이다. 비비안은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났으나 1932년에 어머니의 고향인 프랑스로 가서 그곳에서 6년을 보낸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프랑스에 남겨 둔 채 고향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어머니, 즉 비비안의 할머니를 찾아 미국이라는 낯선 세계로 진입했으나, 적응에 실패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비비안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미국에서의 세월을 말소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아메리칸 드림이 좌절된 꿈이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18년 만의 씁쓸한 귀향이었다.
딸만을 데리고 빈손으로 돌아와 친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 뉠 곳을 찾았으나 그곳에서도 역시 삶을 재건하기가 쉽지 않은 마리아와는 달리, 비비안은 대도시 뉴욕과 다른 자연의 정취 속에서 들로 숲으로 뛰어다니며 유년의 시간을 행복감으로 채워나간다.
저자는 비비안의 사진가적 재능에 중요한 양분이 되었을 이 시절을 특히 주목하고, 그곳에 남아 있는 그녀의 흔적을 퍼즐 조각 붙이듯 맞춰 나간다. 그 6년 후 결국 다시 뉴욕으로, 그 암울한 곳으로 되돌아가야 했던 비비안에게는 그때가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으리라.
비비안 마이어가 언제 누구에게서 사진을 배웠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려서 그녀를 돌봐준 주변의 몇몇 사람 중 사진 일을 했던 누군가가 있긴 했으나, 그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당시 그녀의 생활 형편으로 볼 때 자력으로 카메라를 사고, 사진을 찍으러 여기저길 돌아다니고, 찍는 족족 인화하고 확인하며 기술을 연마할 상황이 아니었음도 분명하다.
어머니를 따라 다시 돌아온 뉴욕에서, 가정 내 불화와 폭력 속에 방치된 채 성장한 비비안은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 되자 보모 일을 직업으로 택한다. 당시 그녀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는 한시도 몸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고, 일하는 틈틈이 짬이 날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현실이라는 한계를 넘어 자신이 이해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려는 의지가 그만큼 강했던 걸까. 의지할 데 하나 없는 불우하고 고독한 삶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그녀 내면의 힘은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았으며 뜨겁고 열정적이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녀는 걸었다. 멈췄다. 프레이밍. 직관적으로, 완벽하게. 찰칵. 그녀의 인생에서는 다른 것이 그녀와 대적했다. 사람들의 인정 말이다. 그러나 비애도 동정도 없었다. 선의도 관음증도 없었다. 창작의 절박함뿐이었다. 사람을 살아 있게 만드는 그 놀라운 긴장감. 얼핏 보고 파악하는 어떤 것. 현실을 직시하던, 그리고 갑자기 멈춘 시선.” _ 181p
그녀는 돌보는 아이들을, 주변 사람들을, 거리에서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을 자신만의 시선과 감성으로 바라보고 그 순간을 포착해 프레임 안에 담았다. 위대한 사진가들의 재능에 버금가는 재능으로 거리 사진을 찍는 데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인생을 모두 바쳤다. 매일 찍고 평생 끌고 다닌 무수한 필름들은 이제 찬란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으나, 그녀는 자신의 예술적 작업에 대한 전 세계적 열광을 누리지 못하고 그녀의 자리, 그 역광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비비안은 도대체 왜, 그 여유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오로지 사진 작업에 쏟아부었을까? 그녀가 50여 년 동안 거주했던 시카고에는 스튜디오도 많았을 텐데, 왜 한 번도 자신의 작업물을 전문가들에게 보내지 않았을까? 자신의 재능을 감지하고 있었으면서 왜 작은 인정이라도 추구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삶은 상처, 결별, 가족의 고통스러운 비밀들 그리고 심연처럼 깊은 고독뿐이었을 텐데, 그녀의 작품에 담긴 그 공감, 유머는 어디서 온 것일까?
“한 인생의 심연 위로 몸을 기울이는 것은, 역광 속에서, 굴곡들 속에서, 가능성들 속에서, 말줄임표 속에서 한 운명을 해독하려 하는 것은 현기증 나는 시도다. 그것은 강물에 체를 던지는 것, 깨진 파편을, 녹슨 못을 그리고 금을 함유한 돌멩이를 수면 위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은 이 모든 수확물을 해독하는 것이다. 시대의 떠들썩한 소음들을 넘어 잃어버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고 거기서 메아리를 들으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_ 170p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마이어 미스터리는 요즘 시대의 우리로서는 참으로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비비안 마이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하나의 단서라도 더 찾아 그 말을 해독하려고 애쓴 저자의 시도 덕택에, 이제 우리가 비비안의 메아리를 듣는다. 역광의 여인 비비안 마이어, 어쩌면 그녀도 자신의 삶은 수수께끼로 남고 자신의 전부였던 사진들이 제대로 빛나기를 원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