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위반하거나 배신해야 증명되는 존재들,
그들이 사회와 돈의 세계에 날리는 묵직한 크로스 펀치
보르헤스와 함께 아르헨티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로베르토 아를트의 첫 소설이자 대표작. 국내 초역. 자본주의 사회에서 떠밀린 청년이 사회의 중심부에 접근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차별과 가난이라는 절망 속에 자신을 가둔 사회와 돈을 향해 날리는 묵직한 ‘크로스 펀치’라고 할 수 있다. 불운한 삶의 조건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절대로 인생이 불행해지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청년의 마술적 통과제의가 현장감 있는 언어로 그려진다. 위반하거나 배신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증명해내기 어려운 아르헨티나의 혼돈이 반영된 작품이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와 포개 읽어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목차
제1장 도둑들 _007
제2장 노동과 나날 _075
제3장 미친 장난감 _134
제4장 가룟 유다 _191
해설 | 광기의 궤적-소유를 넘어 기쁨의 공동체로 _268
저자
로베르토 아를트 (지은이), 엄지영 (옮긴이)
출판사리뷰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 희망과 미래를
스스로 발굴해내야 하는 청년의 생생한 분투
유럽 이민자였던 로베르토 아를트의 부모는 결핵에 걸린 두 아이를 도시의 빈민가에서 맥없이 잃을 정도로 빈곤했다. 게다가 엄혹하기만 했던 아를트의 아버지는 아를트를 일찌감치 집 밖의 세계로 내몬다. 학교를 중퇴하고 열다섯 살부터 항만 노동자, 정비공, 용접공, 서점원 등을 전전한 아를트는, 20세 초 약동하는 아르헨티나의 부흥기를 도시의 이면에서 맨몸으로 받아들인다. 이후 기자로 일하면서 첫 소설 『미친 장난감』을 발표하는데,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 희망과 미래를 스스로 발굴해내야 하는 청년의 생생한 분투가 다분히 작가의 자화상을 연상케 한다.
“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을 하라는 거예요? 제발…… 엄마는 내가 뭘 하기를 바라는 거죠? 나더러 없는 일자리를 만들어내라는 거예요? 내가 일자리를 찾고 있다는 거 엄마도 잘 알잖아요?”
나는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틈만 나면 심한 말을 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고, 하루하루를 가난에 시달리면서 살아도 무관심하고 냉담한 세상이 너무 증오스러웠다. 이와 동시에 이름 모를 고통과 슬픔으로 나를 몰아넣은 것은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확신이었다.(76쪽)
의적소설을 좋아하고 발명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실비오’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 ‘엔리케’, ‘루시오’와 생계를 위해 ‘한밤의 신사들 클럽’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해 좀도둑질을 일삼는다. 이들은 범죄가 발각돼 판사 앞에 끌려가는 모습을 불안하게 떠올리면서도 돈의 매력에 점차 빠져든다. 도서관에 틈입해 값나가는 책을 훔쳐 나오던 이들은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고, 조직의 활동을 멈춘 채 각자의 삶을 이어나간다. 노골적으로 돈을 벌어 올 것을 종용하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책방에서 일하게 된 실비오는, 그러나 부당하게 자신을 착취하려고만 하는 책방 주인에게 환멸을 느끼고 책방에 불을 놓아버린다. 이후 어렵사리 들어간 항공 군사학교에서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쫓겨난 뒤 지물포에서 일하며 자리를 잡는 듯했지만, 경찰 수사관이 된 루시오와 거액의 위조수표를 유통시키는 데 성공한 엔리케의 소식을 듣고는 다시금 범죄의 유혹에 빠져든다.
“종이만 팔러 돌아다니는 것도 이제 질렸어. 매일 똑같은 생활이 반복될 뿐이야. 녹초가 될 때까지 매일 일만 하잖아. 이봐, 절름발이. 이렇게 사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우리는 먹기 위해서 일하고, 일하기 위해 먹을 뿐이라고. 즐거운 일도 없고, 파티나 축제에 갈 생각은 꿈도 못 꿔. 그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잖아, 절름발이. 이제 이런 생활도 지긋지긋해.”(238∼239쪽)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를트는 주류 문단에서 자주 조롱과 비난이 대상이 되었다. 철자법은 물론이고 전통적인 소설 문법에서 벗어난 그의 작품을 두고, 호세 비앙코는 “로베르토 아를트라는 새로운 전염병이 젊은 작가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라며 혹평하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는 출신이나 교육 수준, 경제적 능력에 따른 사회적 차별이 문단에서도 고스란히 재연되었음을 오히려 자명하게 드러내준다. 그러나 『미친 장난감』으로 대표되는 아를트의 소설은, 1960년대에 들어 보르헤스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아르헨티나 현대문학을 선도하는 작품으로 인정받으며 수많은 작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미친 장난감』은 환상과 현실의 세계를 교묘하게 뒤섞거나 선과 악의 가치판단을 한순간에 허물어뜨리며 비정한 사회의 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는데,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거나 책방에 불을 지르는 상징적인 장면에서 이러한 장점이 잘 드러난다. 누구나 똑같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 도서관이나 책방조차 엘리트나 기득권자에게 그 문을 반쯤 더 열어놓은 채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한 번 더 배제한다.
어린 시절부터 “도적문학의 짜릿한 즐거움과 스릴에 빠져” 살며 환상의 세계를 거닐던 실비오 역시 마음껏 책을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훔칠 때조차 책의 가치를 오로지 그 가격에 따라 판단할 뿐이다. 인간의 권리마저 경제 논리에 따라 좌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책을 읽거나 그 가격 이상의 값어치를 논하는 것이 소모적인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석탄 하나를 집어 책으로 가득 찬 책장 옆에 수북이 쌓인 종이 더미에 던져버”리는 것으로 일종의 복수를 감행하는 실비오에게 마음이 쓰이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아울러 책을 훔치고 책방에 불을 놓는 에피소드가 엘리트 문학을 대표하며 평생 책에 둘러싸여 살았던 보르헤스에 대한 통렬한 패러디로 느껴진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어떠한 선택도 잘못일 수밖에 없는
출구 없는 딜레마
실비오는 지물포에서 종이를 팔며 가까스로 “아무리 속이 끓어올라도 우리는 꾹 참고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야 한다는 눅눅한 삶의 원칙을 깨닫는다. 하지만 “창백한 얼간이”였던 루시오가 경찰 수사관이 되어 나타나고, 비록 철창신세이긴 하지만 위조수표를 유통시키는 것에 성공한 덕분에 어쩐지 “앞날이 밝을 것” 같은 엔리케의 소식을 들으며 또다시 자신의 현실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던 중 또 다른 친구로부터 어느 엔지니어의 집을 털자는 은밀한 제안을 받지만, 엔지니어에게 친구의 범행 계획을 밀고함으로써 범죄의 세계에서 스스로 놓여난다. 실비오의 밀고는 도둑질하고 위반하며 실패하던 삶에서 어쩌면 처음으로 거둔 모종의 성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왜 친구를 배반”했느냐며 엔지니어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아를트는 어떠한 선택도 잘못일 수밖에 없는 윤리적 딜레마 속으로 인물을 위치시킴으로써, 소설에 담긴 묵직한 함의를 출구 없는 통로에 놓인 듯한 오늘날의 우리 젊은 독자들에게까지도 날렵하게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