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젠의 로마사 6

몸젠의 로마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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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사
푸른역사
원산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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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몸젠의 《로마사》, 로마사 연구의 고전이자 인문학적 교양의 결실

몸젠의 《로마사》, 가장 위대한 고전들 중 하나

‘서양 인문학 전공자들의 필독서’, ‘실증주의에 입각한 탁월한 고대 연구서’, ‘역사적 저작들의 가장 위대한 고전 중 하나’.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1817~1903)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를 수식하는 표현들이다. 로마 건국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망까지를 그린 역사서 몸젠의 《로마사》는 기존의 로마사 연구서와 달리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어 좀 더 실증적이며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몸젠은 1902년 12월 이 《로마사》로 독일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역사 연구서가 문학상을 받았다는 점은 《로마사》가 가진 의미, 즉 《로마사》가 역사 연구서를 넘어서는 인문학적 교양의 결실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목차

옮긴이 서문

제7장 이탈리아 복속민들의 봉기와 술키피우스의 혁명

로마인들과 이탈리아인들|주인의 무능력과 부정행위들|불화의 폭발|이탈리아 동맹시민들과 로마 당파|이탈리아 동맹시민과 과두정|이탈리아 동맹시민들과 드루수스|로마에 맞선 반란: 준비 과정|아스쿨룸: 반란의 시작|친로마적인 이탈리아 동맹시들|반란을 대하는 로마인들의 태도|반란세력들의 정치조직|기원전 91/90년의 전쟁 준비|양측의 병력 구성|전쟁의 시작|캄파니아와 삼니움의 카이사르|마르시 사람들과의 전투|피케눔 전투|움브리아-에트루리아의 반란|전쟁 첫 해의 최종 결산|로마인들의 낙담|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함|이탈리아 내의 켈트족에게 라티움시민권을 부여함|동맹시 전쟁 두 번째 해|기원전 89년 피케눔의 전투|놀라까지 캄파니아의 복속|대부분 진압된 반란세력|미트라다테스 전쟁의 발발|기원전 88년의 이탈리아 전쟁|로마의 불안|군율의 몰락|경제적 위기|술키피우스 법|정부의 반대|마리우스가 정권을 잡다|술라의 소환|술라의 로마 입성|술라의 첫 번째 복고정치|술라의 입법|새로운 문제

제8장 동방과 미트라다테스 왕

동방의 상황|이집트|쉬리아|파르티아 상황|소아시아|미트라다테스 에우파토르|소아시아의 민족구성|폰토스 지역|미트라다테스의 영토 확장|이 지역의 희랍문명|미트라다테스가 보스포로스 왕들을 정복하다|소(小)아르메니아|미트라다테스 제국|로마와 미트라다테스|원로원의 개입|술라의 카파도키아 개입|미트라다테스의 새로운 공격|아시아로 파견된 아퀼리우스|전쟁과 평화의 교착|아퀼리우스가 전쟁을 원하다|미트라다테스의 전쟁 준비|로마의 준비 부족|미트라다테스의 소아시아 점령|반(反)로마적 흐름|대학살의 명령|점령 지역의 통치|폰토스의 유럽 진공|로마의 상황|술라의 상륙|오랜 시간을 끈 아테나이의 점령|술라의 위기|폰토스 보병의 희랍 입성|카이로네이아 전투|승전의 미미한 결과|폰토스의 제2차 희랍 파병|아시아가 미트라다테스에게 반기를 들다|루쿨루스와 아시아 해안의 함대|발레리우스 플라쿠스의 아시아 상륙|핌브리아의 전공|평화 협상|델리온의 예비회담|새로운 어려움들|술라와 핌브리아의 대결|아시아 사안들의 처리

제9장 킨나와 술라

기원전 87년 이탈리아 상황|킨나|킨나의 혁명|이탈리아 내의 킨나 당파|로마를 포위한 킨나 일당|이탈리아인들과의 협상|수도 로마의 항복|마리우스의 공포정치|마리우스의 마지막 날들|마리우스의 죽음|킨나의 정부|킨나와 술라|술라에 대한 정부의 조치|타협의 시도|술라의 어려운 처지|술라의 이탈리아 상륙|폼페이우스|캄파니아의 술라|양측의 준비 상황|술라와 아들 마리우스의 대결|프라이네스테의 승리|메텔루스와 카르보의 대결|프라이네스테의 격돌|북이탈리아에서 술라의 성공|술라파의 에트루리아 장악|민주당파와 삼니움족의 로마 공격|프라이네스테의 승리|속주들|히스파니아|시킬리아|미트라다테스와 새로운 갈등

제10장 술라 체제

로마의 통치자 술라|실행|법익 박탈자 명단|재산몰수|시민권 문제|이탈리아 공동체들의 처벌|노병들의 정착|로마의 해방 자유민들|그락쿠스 질서의 철폐|원로원의 재구성|민회의 역할 조정|사제 선거 제도의 복위|호민관의 약화|최고정무관의 제한|술라의 권한 조정|원로원 권력의 강화|호구감찰관의 약화|국가재정|사법 제도의 개혁|술라의 특별 사문회|풍기 관련 법률|로마의 자치도시 제도|자치도시와 국가의 관계|자치도시의 성장|장교들의 반발|국정질서의 복원|술라의 성격|술라의 정치 역정|술라 체제의 가치|술라 복고 체제의 비도덕성|퇴임 후의 술라

제11장 공동체와 그 경제

국가의 경제 상황|속주로부터 들어오는 국가 수입|징수비용|군사적 징발|지역 부담금|착취와 수탈|국가 재정 상황의 요약|국가재정과 공공사업|혁명 과정의 국가 재정|개인 경제활동|산업|상업과 금융|자본가 과두정|화폐 제도|속주의 화폐|당시의 생활상|혼인|희랍 문물의 영향

제12장 민족, 종교, 교육

로마와 희랍의 지속적 우세|희랍 민족|인구의 혼합|종교|희랍 철학|로마의 스토아철학|국가종교|이탈리아에 들어온 동방 종교|교육|희랍어 교육|라티움어 교육|로마의 연설 교육|문학과 연설의 교육 과정

제13장 문학과 예술

스키피오 동아리|비극: 파쿠비우스|비극: 아키우스|희랍 희극|민족 희극|아텔라 희극|공연 방식의 발전|서사시|풍자문학|로마의 역사서술|로마 연대기|비망록과 서신, 연설|일반 학문|수사학|철학|특수 학문|예술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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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테오도르 몸젠 (지은이), 김남우, 성중모 (옮긴이)

출판사리뷰

로마, 통치 이성이 마비된 시대로 향하다

《몸젠의 로마사 제6권-혁명: 술피키우스의 혁명부터 술라의 통치까지》는 2013년 《몸젠의 로마사 제1권-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출간한 후 선보이는 여섯 번째 결실이다. 로마의 탄생부터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다룬 《몸젠의 로마사 제1권-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를 다룬 《몸젠의 로마사 제2권-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성장한 페니키아인들과 로마인들의 전쟁을 다룬 《몸젠의 로마사 제3권-이탈리아 통일에서 카르타고 복속까지》, 로마가 희랍 세계까지 세력권을 확장하는 과정과 카르타고 전쟁 및 마케도니아 전쟁 과정에서 생겨난 로마의 국가 체제 변화 양상을 다룬 《몸젠의 로마사 제4권-희랍 도시국가들의 복속》, 로마의 혁명 시대, 특히 그락쿠스 형제의 노력과 시도를 살핀 《몸젠의 로마사 제5권-혁명: 농지개혁부터 드루수스의 개혁 시도까지》에 이어 제6권에서는 로마 정부와 통치 계급이 보여주는 도덕적 타락과 무능력, 파국을 향해 치닫는 권력욕과 명예욕, 한계를 모르는 탐욕과 사치, 애국적 가치를 저버리고 당파적 이익 때문에 벌이는 갈등과 폭력 등을 목격할 수 있다.

이탈리아 복속민들의 봉기와 술키피우스의 혁명

동맹시 전쟁 발발

“이탈리아인들이 독립을 위해 벌인 마지막 전쟁은 퓌로스를 물리치면서 마무리되었다.”(2쪽) 로마가 혁명으로 흔들리기 시작하기 전까지 이탈리아 동맹시민들은 조용했다. 하지만 혁명이 시작되자 이탈리아 동맹시민들도 권리평등을 위해 로마 혁명당파의 움직임에 동참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로마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에 나섰다. 결국 로마 건국 663/664년(기원전 91/90년) 반란세력인 “사비눔 황소와 로마 늑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21쪽)

반란세력은 전쟁 첫 해 동안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반면 로마는 타협으로 기울었다. “로마를 굴복시키고 파괴하려고 먼저 무기를 든 공동체들의 요구조건을 로마가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가혹한 상황에 이르렀다.”(34쪽) 결국 로마는 이탈리아 내에 거주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로마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했다. 150년 이상 굳게 닫혔던 로마 시민권의 폐쇄성을 고려할 때 이런 양보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몰락 직전의 흔들리는 공동체들을 굳건히 하고 적대세력으로부터 많은 이탈자를 확보하는 효과를 낳았다.

술키피우스의 혁명과 술라의 반격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로마인들은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반란세력과 대결을 이어갔다. 승세를 타고 진격하던 반란세력은 곳곳에서 패전했고 희망을 잃어버렸다. 이때 “거의 죽어가던 반란세력에게 숨구멍을 터주”는 사건이 수도 로마에서 발생했다(46쪽).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키피우스 루푸스가 민회에 혁명적인 법안을 제출한 것이다. 원로원 의원 중 일정 금액 이상의 부채를 가진 이는 원로원 의석을 상실한다는 법안, 해방노예들에게도 똑같이 투표권을 허용하는 법안 등이었다(52쪽).

이는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위기를 불러왔다. 술키피우스의 제안들은 당시 원로원 다수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혔고, 정변을 예상한 술키피우스는 동맹시 전쟁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운 루키우스 술라의 최고명령권을 박탈할 계획을 준비했다. “위험한 이탈리아 반란을 제압하는 데 다른 누구보다 큰 공헌을 한 사내”(59쪽) 술라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군사를 이끌고 로마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 술라는 현존하는 폐단들을 철폐하고 미래의 변혁을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법률적 규정을 만들었다. 술키피우스 법들은 법률적으로 무효화되었고, 법안 제안자와 널리 알려진 추종자들은 도주했다. 하지만 술라 역시 집정관 임기가 끝난 후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후임자 킨나 혹은 아마도 스트라보와 충돌하여 다시 한번 로마로 진군하거나, 아니면 이탈리아 사안은 그대로 방치하고 다른 대륙으로 떠나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했다.”(69~70쪽) 술라는 후자를 선택했다. 로마 건국 667년(기원전 87년) 초, 술라는 그의 군단들을 이끌고 동방을 향해 길을 나섰다.

동방과 미트라다테스 왕

아시아와 동방의 상황 변화


“혁명은 반복되는 화재경보와 외침으로 로마 정부를 숨도 쉴 수 없는 긴장 속에 붙잡고 있었”다(71쪽). 이런 상황에서 로마 정부가 속주 상황에 관심을 두기란 무리였다. 특히 아시아와 동방이 그러했다. “멀리 떨어진 평화로운 민족들은 아프리카, 히스파니아, 알프스 저쪽 이웃들과 달리 로마 정부의 관심을 유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71쪽)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로마 지배의 성격은 전반적으로 크게 바뀌고 있었다. 모든 독재정권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지속적 억압의 가중 때문에, 부분적으로 로마 혁명의 직접적 영향 때문에 그 자체로도 이미 견디기 어려운 로마 지배는 아시아에서 더욱 가중되었다. 기치를 들어 올릴 줄 아는 사람이 출현한다면 “이 평화로운 땅에서 놀라운 경이로운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75쪽)

미트라다테스 왕의 등장과 4년간의 전쟁

당시 폰토스 왕국을 다스리고 있던 에우파토르라고 불리는 미트라다테스 6세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미트라다테스 왕은 “동방에서 로마에 진지한 고민거리를 제공한 로마의 유일한 적”으로, “사냥꾼에게 맞서는 사막의 사자처럼 로마에 맞섰”다(79쪽). 로마는 군대를 파견하는 대신 킬리키아 총독인 루키우스 술라를 파견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로마에 맞서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알고 있던 미트라다테스는 상황을 로마와의 공개적 단절과 전쟁으로 이끌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끈질기고 조용하게 소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실행했다.

로마 건국 666년(기원전 88년)의 시작과 함께 미트라다테스는 공세를 펴 소아시아를 점령했다. 소아시아의 대다수는 로마가 아닌 폰토스로, 미트라다테스 왕으로 돌아섰다. 나아가 미트라다테스는 유럽도 공격하기로 계획했다. 소아시아와 희랍은 완전히, 마케도니아는 상당 부분 그의 수중에 들었다. 미트라다테스의 폰토스 함대는 어떤 경쟁자도 없이 바다를 지배했다. 하지만 미트라다테스가 로마 총독들이 보여준 독재정을 뛰어넘는 폭정을 펼치자 소아시아의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인내하던 소아시아인들이 공개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수륙 양면에서 미트라다테스 왕을 몰아붙였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트라다테스는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 술라는 왕이 정복하여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반환을 요구했다. 미트라다테스가 협상안을 거부하자 술라는 갑자기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마케도니아를 수복하는 등 아시아 가까이 이동했다. 결국 4년의 전쟁을 치른 후 폰토스는 다시 로마의 피호국이 되었고, 희랍과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에서 안정된 단일 정부가 회복되었다.

킨나와 술라

혼란이 지속되던 로마에 등장한 킨나


무력을 통해 동맹시들의 봉기와 술키피우스의 혁명을 진압했음에도 로마의 상황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경제위기로 직격탄을 맞은 자본가들은 분노했고, 반란세력들은 전혀 권리가 없는 예속상태에 불평을 토로했으며, 동맹시들은 반쯤 주어진 양보들에 만족하지 못했고, 새로운 시민들과 자유민들은 특히 술키피우스 법의 철회에 강한 불만을 품었으며. 도시 빈민들은 곤궁함에 시달렸다. “이 모든 불만은 새로운 폭력적 계급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139쪽)

이 불만 세력들이 국가의 최고 권력자로 호명한 인물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였다. 킨나는 호민관 다수의 지지를 등에 업고 새로운 시민권자들과 해방 노예들의 정치적 평등은 물론, 술키피우스 혁명 이후 추방된 사람들의 복권까지 담은 법안을 즉시 제출했다. 이에 원로원은 집정관 킨나를 파면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그를 대신하여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가 선출되었다.

킨나, 수도 로마의 성문을 열다

평민파 집정관을 불법적으로 파면하고 인민의 권리를 침해한 원로원의 만행은 평민 병사들을 자극했다. 캄파니아 군대는 킨나를 집정관으로 인정하면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들은 새로운 시민권자들과 동맹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무리의 핵심이 되었다. 먹구름이 수도 로마 주변으로 몰려왔다. 로마를 포위한 킨나 일당에 대처하기 위해 원로원은 과거 동맹시 전쟁에 참여했으나 무기를 내려놓고 이후 옛 동맹 관계를 상실한 모든 이탈리아 공동체에 추가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정부는 반란군의 수괴들과 협정을 맺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킨나에게 사신들이 급파되었다. 수도 로마의 성문들이 열렸다. 킨나는 그의 군단들을 이끌고 입성했다. 공포 정치와 함께 독재정이 등장했다. 킨나는 4년 동안 내리 집정관을 역임하며 국가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혁명정부는 이탈리아에서 제약 없는 권력을 행사했다.

술라의 반격

추방당한 과두정의 유일한 해방구는, 술라가 장악하고 있던 마케도니아 속주밖에 없었다. 로마 건국 671년(기원전 83년) 이른 봄, 술라는 그의 군단을 데리고 브룬디시움 항구에 내렸다. 첫 전투 결과 술라는 아풀리아, 피케눔, 캄파니아의 복속, 한 집정관 부대의 해산, 다른 집정관 부대의 격퇴와 봉쇄를 이루어냈다. 이후 술라파는 북이탈리아에서 성공을 거듭하면서 에트루리아를 장악했다. 결국 로마 입성에 성공한 술라 휘하의 장군들은 철퇴를 들어 혁명당파와 민족주의자들의 마지막 저항까지 하나씩 끝장내버렸다. 10년의 혁명과 반란이 종식되었다. 국가는 다시 통일적 정부를 구성했고, 대내외적으로 평화를 이룩했다.

술라 체제

승리자 술라, 상벌을 내리다


로마 국가체제는 폐허가 되었고 재건이 필요했다. 혁명은 진압되었지만 그렇다고 옛 체제를 다시 부활시킬 수는 없었다. 승리자로서 모든 권력을 장악한 술라는 국가의 새로운 주인으로 로마 성벽 안에 등장했다. 술라는 새로운 관직의 권한에 따라 정부를 인수한 직후, 혁명을 위해 활동한 이들 중 눈에 띄게 혁명을 지지한 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그들의 법익을 박탈했다. 이들을 받아준 사람은 아주 가까운 친척일지라도 매우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국가의 적들이 가졌던 재산은 전쟁 노획물처럼 국가에 귀속되었다. 그들의 자식들과 손자들은 공직 진출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탈리아 공동체들에도 상벌이 내려졌다. 술라에게 협력한 일등 공동체들은 보상을 받았다. 죄가 크지 않은 공동체들은 벌금, 성벽 철거, 성채 파괴를 명받았다. 아주 완강하게 저항했던 공동체들의 경우 통치자는 토지 일부나 전체를 몰수했다.

제도 개혁, 그리고 퇴장

술라는 제도 개혁에도 착수했다. 기사계급 법정은 철폐했고 이를 원로원 의원들로 다시 채웠다. 원로원은 입법, 사법, 행정에서 최고 권력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유일한 특권 계급이 되었다. 민회는 역할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조정했고, 사제단은 충원의 권리를 무제한적으로 사제단에게 되돌려주었다.술라는 선거에는 개입하지 않고, 다만 정무관 권한을 제한하려 했다. 호민관은 약화시켰고, 최고 정무관도 제한했다. 시민 영역을 통치하는 정치적 권한과 비非시민 영역을 통치하는 군사적 권한을 완전히 분리하고, 모든 최고 정무관 임기를 2년으로 연장하여 임기 첫 해는 시민 업무에, 두 번째 해는 군사 업무에 전념토록 했다. 모든 정무관 가운데 가장 높은 호구감찰관은 형식적으로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배제되었다.

사법 제도 역시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술라의 사법 개혁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째, 법정의 수를 크게 늘렸다. 둘째, 재판 지휘와 관련하여 여러 사문회들의 지휘를 맡을 여섯 명의 법무관을 두었고, 가장 수요가 많았던 살인 사건을 다루는 법정의 경우 또 다른 책임자들이 추가되었다. 셋째, 심판인 자리를 기사계급이 아니라 원로원 의원들이 다시 맡게 되었다. 이것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로마 공동체에 부여한 국가체제였다.

아직 한 가지 일이 남아 있었다. 예외적 비상상황을 다시 등장한 옛 법적 질서로 되돌려놓는 것이었다. 옛 질서의 회귀는 술라가 이 마지막 목표를 한순간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졌다. 국가 재건 사업을 끝마친 사내는 “권력 전체를 자유의지에 따라 반납하였고, 그의 무장 경호원들과 작별하였고, 그의 종행리들을 해산시켰으며, 무수히 몰려든 군중에게 자신에게 따질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청하였다. 모두가 침묵하였다. 술라는 이내 연단에서 내려왔고, 걸어서, 그의 식솔들만 거느리고, 8년 전 그의 집을 파괴하던 그 군중들을 뚫고,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238쪽)

상품필수 정보

도서명
몸젠의 로마사 6
저자/출판사
테오도르 몸젠 (지은이), 김남우, 성중모 (옮긴이),푸른역사
크기/전자책용량
153*224*30mm
쪽수
428쪽
제품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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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2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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