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고대 이탈리아의 시작부터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몸젠의 《로마사》는 로마 건국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망까지를 그린 로마의 역사서이다. 기존의 로마사 연구서와 달리 역사적 증거물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어 좀 더 실증적이며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몸젠의《로마사》는 세 권으로 나뉘어 출판되었으며, 제1권(제1, 2, 3책) 1854년, 제2권(제4책) 1855년, 제3권(제5책) 1856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1856년에는 제1권이 개정 증보되었고, 1857년에는 나머지 두 권도 개정 증보되어 다시 출간되었다. 1903년 11월 사망 직전 몸젠이 최종적으로 손본 제9판은 제1권이 1902년, 제2권이 1903년, 제3권이 1904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이 책은 고대 이탈리아의 시작부터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다룬 제1권의 절반을 담았다.
몸젠은 이 책에서 로마의 역사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역사를 다룬다고 말한다. 국가 체계의 형태를 갖추고 난 이후 로마라는 도시 공동체가 이탈리아 반도를, 이후 세계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결코 그렇게 주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젠은 강조한다. “흔히 로마 인에 의한 이탈리아 정복이라고 불리는 것은 기실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전체 민족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다. 로마 인들이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이긴 했으나, 아무튼 그들도 이들 가운데 한 부분이었을 뿐이다.”
《몸젠의 로마사 제1권-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는 이 가운데 고대 이탈리아의 시작부터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다루고 있다. 몸젠은 이탈리아의 역사가 크게 둘로 나뉜다고 본다. 우선 이탈리아 어계의 주도 아래 이탈리아가 통일되기까지의 내부 역사가 그 하나이고, 이탈리아가 세계를 지배하기까지의 역사가 또 다른 하나다. 따라서 몸젠은 이탈리아 반도에 이탈리아 어계 민족이 정착하는 과정, 희랍인과 에트루리아 인 등 다른 계통 민족이나 선주 문명이 이탈리아 어계의 민족적·정치적 존재를 위협하고 부분적으로 복속시킨 과정, 이탈리아 어계가 다른 계통 민족에 저항하며 그들을 물리치거나 정복한 과정, 마지막으로 같은 이탈리아 어계인 라티움 사람들과 삼니움 사람들이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벌인 갈등과 라티움 사람들이 기원전 4세기 후반에 혹은 로마 인들이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과정 등을 기술하고자 한다.
목차
옮긴이 서문
제1장 서론
고대 역사│이탈리아│이탈리아의 역사
제2장 이탈리아로의 최초 이주
이탈리아의 초기 종족들│이아퓌기아 인│이탈리아 인│이탈리아 어와 희랍어의 관계│라티움 어와 움브리아·삼니움 어의 관계│인도·게르만 어│희랍·이탈리아 문화│농경│경제 이외의 모습│이탈리아와 희랍의 이름 체계│가족, 국가, 종교│예술
제3장 라티움 사람들의 정착
인도·게르만 어족의 이주│이탈리아에서 라티움 인의 확장│라티움│라티움 정착│부락│초기 부락의 위치│라티움 부락 연맹체
제4장 로마의 시작
람네스 부족│티티에스 부족과 루케레스 부족│라티움의 로마 정주지│로마 지역의 특징│로마 지역의 초기 경계│팔라티움│일곱 언덕│팔라티움 언덕 주변의 초기 정착│퀴리날리스 언덕의 로마 인들│팔라티움과 퀴리날리스 공동체의 관계
제5장 로마의 초기 국가 체제
로마 가족│가부장과 그 권한│가족과 씨족│가족의 의탁인│로마 공동체│왕│공동체│시민의 평등│시민의 공역│시민의 권리│원로원│원로원의 권한│국헌의 수호자 원로원│자문기관으로서의 원로원│로마의 초기 국가 체제
제6장 비시민과 국가 체제의 개혁
팔라티움 지역과 퀴리날리스 지역의 융합│시민과 영주민│공동체 외곽에서 살아가는 영주민│상민│세르비우스 개혁│인구조사│세르비우스 군대 정비의 정치적 효과
제7장 라티움 지방에서 로마의 패권
로마의 영토 확대│아니오·알바롱가의 영토│초기 정복지에 대한 처분│로마와 라티움의 관계│알바롱가 몰락 이후 로마의 확장│수도 로마의 확장 : 세르비우스 성
제8장 움브리아·사비눔 부족 : 삼니움 부족의 시작
움브리아·사비눔 부족의 이주│삼니움 부족
제9장 에트루리아 인
에트루리아 민족│에트루리아 인의 고향│에트루리아 인의 뤼디아 기원설│에트루리아 인의 이탈리아 정착│에트루리아│에트루리아와 라티움의 관계│타르퀴니우스 집안│에트루리아의 국가 체제
제10장 이탈리아의 희랍인 : 에트루리아 인과 카르타고 인의 제해권
이탈리아와 주변 민족들│이탈리아의 페니키아 사람들│이탈리아의 희랍인 : 희랍 식민지│희랍 식민지 활동의 시기│희랍 이주민들의 성격│아카이아 식민 도시들│이오니아·도리아 식민지│타렌툼│베수비우스 근처의 식민 도시들│아드리아 해 지역의 희랍인들│이탈리아 서해안의 희랍인들│희랍과 라티움│희랍과 에트루리아│희랍과 페니키아의 경쟁
제11장 법과 법정
이탈리아 역사의 현대적 성격│사법제도│민사재판│절도│계약│후견 제도│상속제도│노예해방│피호민과 영주민│로마법의 특징
제12장 종교
로마의 종교│아주 오래된 로마 공공 축제│마르스와 유피테르│로마 신들의 특징│정령│사제│신탁 중재자│외국 종교│사비눔의 종교│에트루리아의 종교
제13장 농업, 상업과 무역
농업│공동경작│포도 농사│올리브 재배│무화과│농가 경영│대토지 소유│공동 초지│수공업│이탈리아 내의 상업 활동│해양 무역│무역에 적극적인 에트루리아, 수동적인 라티움│에트루리아와 아티카, 라티움과 시킬리아
제14장 측량과 문자
십진법과 십이진법│희랍 도량형│희랍의 영향을 받기 전 이탈리아 역법│희랍 알파벳의 이탈리아 도입│이탈리아 알파벳의 발전│결과│언어와 문자의 변이
제15장 예술
이탈리아 인의 예술적 재능│라티움의 춤과 음악과 노래│종교적 가창│칭찬 노래와 비방 노래│가면 익살극│운율│가락│가면│라티움에서 초기 희랍의 영향│라티움에서 시와 교육의 특징│사비눔과 에트루리아의 춤과 음악과 노래│초창기 이탈리아 건축물│사비눔과 에트루리아에서 초기 희랍의 영향│이탈리아의 조형예술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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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테오도르 몸젠 (지은이), 김남우, 김동훈, 성중모 (옮긴이)
출판사리뷰
몸젠의 《로마사》, 로마사 연구의 고전이자 인문학적 교양의 결실
가장 위대한 고전들 중 하나, 몸젠의 《로마사》 국내 최초 완역의 첫걸음
‘서양 인문학 전공자들의 필독서’, ‘실증주의에 입각한 탁월한 고대 연구서’, ‘역사적 저작들의 가장 위대한 고전 중 하나’.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1817~1903)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를 수식하는 표현들이다. 로마 건국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망까지를 그린 로마의 역사서인 몸젠의 《로마사》는 기존의 로마사 연구서와 달리 역사적 증거물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어 좀 더 실증적이며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런 평가가 전부가 아니다. 몸젠의 《로마사》만큼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책도 없을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은 줄잡아 15개국어로, 그것도 각각의 언어로 여러 번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늦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책을 통해 그 번역국의 하나로 첫걸음을 내딛고자 한다.
몸젠은 1902년 12월 《로마사》로 독일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역사 연구서가 문학상을 받았다는 점은 《로마사》가 가진 의미, 즉 《로마사》가 역사 연구서를 넘어서는 인문학적 교양의 결실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몸젠의 《로마사》의 구성
몸젠의《로마사》는 세 권으로 나뉘어 출판되었다. 제1권(제1, 2, 3책) 1854년, 제2권(제4책) 1855년, 제3권(제5책) 1856년에 각각 출간되었으며, 1856년에는 제1권이 개정 증보되었고, 1857년에는 나머지 두 권도 개정 증보되어 다시 출간되었다. 또 제3판이 1861년에 출간되었으며 이후 여러 번의 개정이 있었으나 제3개정판 이후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1903년 11월 사망 직전 몸젠이 최종적으로 손본 제9판은 제1권이 1902년, 제2권이 1903년, 제3권이 1904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한편 몸젠은 황제정 시대의 경제를 다룬 제4권과 카이사르에서 티오클레티아누스 황제까지의 로마 속주를 다룬 제5권을 기획했는데, 제5권(제8책)이 먼저 1885년 출간되었고 1904년에 제5판이 출간되었다. 제4권은 끝내 출간되지 않았다.
제1책은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제2책은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를, 제3책은 이탈리아 통일에서 카르타고와 희랍의 복속까지를 다루고 있다. 제4책은 ‘혁명’이라는 제목으로 그라쿠스 형제와 술라 시대를 다루고 있으며, 제5책은 이른바 삼두정치라고 하는 군정시대를 다루고 있다. 제8책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몸젠의 로마사 제1권-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는 이 가운데 고대 이탈리아의 시작부터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다룬 제1권의 절반이다. 향후 1년에 1~2권씩, 10년 내에 전권 완역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모쪼록 이 책이 우리나라의 로마사 연구, 나아가 인문학적 교양의 함양을 바라는 독자들의 기대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탈리아, 태어나다
‘로마의 역사’가 아닌 ‘이탈리아의 역사’를 다루다
증명 가능한 한에서 어느 지역의 가장 오래된 주민이 그 땅에서 저절로 생겨났는지 아니면 이주민인지를 결정짓는 것은 역사학에서는 불가능하며 또한 중요하지도 않다.
역사가의 작업은 특정 지역의 연속적인 민족 지층을 파헤쳐 미개 문화에서 좀 더 성숙한 문화로 발전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는 민족이 그렇지 못한 종족 혹은 덜 발전된 문화를 가진 종족을 지배하는 과정을 가능한 범위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추적하는 일이다.
몸젠은 이 책에서 로마의 역사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역사를 다룬다고 말한다. 국가 체계의 형태를 갖추고 난 이후 로마라는 도시 공동체가 이탈리아 반도를, 이후 세계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결코 그렇게 주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젠은 강조한다. “흔히 로마 인에 의한 이탈리아 정복이라고 불리는 것은 기실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전체 민족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다. 로마 인들이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이긴 했으나, 아무튼 그들도 이들 가운데 한 부분이었을 뿐이다.”
몸젠은 이탈리아의 역사가 크게 둘로 나뉜다고 본다. 우선 이탈리아 어계의 주도 아래 이탈리아가 통일되기까지의 내부 역사가 그 하나이고, 이탈리아가 세계를 지배하기까지의 역사가 또 다른 하나다. 따라서 몸젠은 이탈리아 반도에 이탈리아 어계 민족이 정착하는 과정, 희랍인과 에트루리아 인 등 다른 계통 민족이나 선주 문명이 이탈리아 어계의 민족적·정치적 존재를 위협하고 부분적으로 복속시킨 과정, 이탈리아 어계가 다른 계통 민족에 저항하며 그들을 물리치거나 정복한 과정, 마지막으로 같은 이탈리아 어계인 라티움 사람들과 삼니움 사람들이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벌인 갈등과 라티움 사람들이 기원전 4세기 후반에 혹은 로마 인들이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과정 등을 기술하고자 한다.
언어를 통해 이탈리아 초기 민족을 살피다
언어 비교는 올바르고 조심스럽게 행해지기만 한다면, 분화가 일어나던 시점에 민족이 누리던 문화적 수준에 대한 대략적 모습과 함께 문명 발전으로서 역사의 시작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왜냐하면 특히 문명의 발전 시기별로 언어는 문화 수준의 발전을 보여주는 진정한 지표이자 도구이기 때문이다.
상고사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개별 민족, 다른 말로 하면 종족이다. 몸젠은 이를 이탈리아 반도에서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민족들의 언어를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민족의 성장과 함께 만들어진 언어에 각인된 민족 성장의 흔적은 후대 문화에 의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몸젠은 언어 연구를 통해 이탈리아 초기 민족을 셋으로 나눈다. 바로 이아퓌기아 인, 에트루리아 인, 이탈리아 인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인은 다시 라티움 어계와 움브리아·마르시·볼스키·삼니움의 방언을 아우르는 어계로 양분된다.
희랍(고대 그리스) 민족과 이탈리아 민족의 구분
언어 현상에 근거하여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민족과 언어의 모태로부터 희랍어파와 이탈리아 어파의 공동 조상이 갈라져 나왔으며, 이후 다시 이탈리아 어파가 갈라져 나왔으며, 이탈리아 어파는 다시 서쪽 어계와 동쪽 어계로 나뉘며, 동쪽 어계는 나중에 다시 한 번 움브리아 어와 오스키 어로 나뉜다는 사실이다.
언어를 통해 이탈리아 상고사를 살핀 몸젠은 서양 문명의 두 축인 희랍(고대 그리스)과 이탈리아(로마) 민족의 시작과 분화를 고찰한다. 몸젠에 따르면, 인간 삶의 물적 토대에 해당하는 모든 부문에서 희랍 민족과 이탈리아 민족은 동일한 언어 및 풍습의 기원을 갖는다. 이들이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고 있을 때 두 민족은 지구가 인류에게 제시한 가장 오래된 숙제들을 함께 풀어나갔던 것이다. 반면 정신 영역에서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희랍 민족과 이탈리아 민족이 나뉘면서 현저한 정신적 대립이 나타났는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가.
희랍 민족의 특징은 개체를 위해 전체를, 시민을 위해 공동체를, 공동체를 위해 민족을 희생시키는 것이며, 삶의 목표는 미와 선, 그리고 종종 학문적 여가에 있다는 것이다. 각 도시국가의 지역 분권주의를 근본적으로 강화하고, 이후 소위 자치 권한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정치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최초로 신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었으며, 결국 신들을 부정하는 종교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운동에서 거리낌 없이 벌거벗은 사지를 드러내 보이며, 구성원들은 어떠한 위업과 위협에도 맞서는 사상적 자유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로마 민족의 특성은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도록 하고, 시민이 통치자를 섬기도록 하고, 인간이 신들을 경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로지 유용성을 추구하고 존경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한시도 쉬지 않고 짧은 인생의 매 순간을 노동으로 채우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청년들이 정숙하게 몸을 가리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동료와의 집단행동을 회피하는 자를 불량 시민이라고 부르며 국가는 전부이고 국가의 확장을 유일하게 높은 이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고대사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두 민족은 서로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만큼 서로 필적할 만한 맞수였다. 희랍 사람들이 갖는 장점은 좀 더 보편적인 합리성과 좀 더 선명한 아름다움이다. 반면 개별 가운데 보편에 대한 깊은 공감, 개인의 희생과 헌신, 독자적 신성에 대한 진지한 믿음은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자산이다.
로마, 시작되다
활발한 무역 활동과 도시경제의 발전, 로마를 선도적 도시로 만들다
알바롱가의 왕족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영도 아래 알바롱가로부터 일단의 사람들이 도망쳐 로마를 건설했다는 신화는, 이상하게도 그렇게 불리한 장소에 로마가 생겨난 이유를 설명하는 동시에 로마의 시초를 라티움 지방의 거대도시와 연결시키려는 역사적 설명의 소박한 시도라고 하겠다. 스스로 ‘역사’이기를 희망하지만 그다지 훌륭할 것 없는 단순한 설명에 불과한 이런 신화를 역사학은 다른 무엇보다 먼저 배제해야 할 것이다. 지리적 관계의 충분한 검토를 통해 로마의 생성에 관해서가 아니라 로마의 급격한 성장과 팽창에 관해, 그리고 라티움 지방 내에서의 특수한 위치에 관해 긍정적 추측을 제공하는 등 신화보다 진일보한 모습이 역사학에 요구된다.
몸젠은 로마의 시작을 과거 독립적이었던 람네스 부족, 티티에스 부족, 루케레스 부족의 공동체 형성으로 본다. 그리고 로마의 생성을 알바롱가의 왕족 로물루스와 레무스로 보는 신화를 역사학에서는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로마가 라티움 지방의 다른 도시들보다 돋보였던 것은 무역 활동과 이를 통해 형성된 시민들의 생각이었다. 몸젠은 라티움 지방이 농업경제를 유지하는 동안 로마는 도시경제를 활발하고 신속하게 발전시켰으며 이를 통해 라티움의 다른 도시들과는 구별되는 위치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그것이 로마가 라티움 지방에서 선도적인 정치적 입지를 갖게 된 요인이라는 것이다.
가족, 로마 국가의 토대
일반적으로 가족을 구성하는 요소는, 일부다처로 인해 가모 자체가 무의미해지지 않는다면, 가부장과 가모, 아들과 딸, 토지와 주택, 노예와 가재도구다 ……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들을 법률적으로 이해하고 단순하고 단호하게 이를 관철시키는 데에서 로마 민족을 따라올 민족은 없다.
고대 국가 대부분이 그러하듯, 로마 역시 국가의 토대는 가족 기반의 씨족이었다. 로마에서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권한을 물려받은 자유민, 그와 혼인한 가모, 그리고 이들의 아들과 손자들, 그 합법적인 아내들, 또 가부장의 미혼 딸들과 아들들의 딸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모든 소유물과 재산으로 이루어진 단일체다.
몸젠은 로마 가족이 구성원들이 따라야 할 윤리적 위계질서라는 고도의 문화를 근간으로 한다고 말한다. 가부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남성뿐이었다. 법률적으로 가족은 무조건적으로 가부장의 절대적 의지에 따라 통제되고 조정되었다. 가부장은 가족 구성원을 엄격한 통솔하에 부양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재량에 따라 처벌하거나 처형할 수도 있었다. 가부장권은 본질적으로 무제약적이며 세상 누구도 이를 제한할 수 없는, 가부장이 살아 있는 동안 훼손할 수 없는 절대적 권리였다.
왕, 국가 내에서 최고 권력을 가진 유일한 자
국가의 토대가 가족 기반의 씨족들인 것처럼, 국가 공동체의 체제도 세부 사항에서, 그리고 전반적으로 가족의 체제를 모방하고 있다. 자연은 가족에게 가부장을 부여했으며, 가부장과 함께 가족은 생겨나고 소멸한다. 그러나 국가 공동체는 영원무궁해야 할 실체로서 자연이 부여한 주인은 있을 수 없는바, 적어도 로마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는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농민으로 구성되었으며, 로마에서는 어떤 귀족도 자신이 주인으로서 신적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시민들의 중의가 모여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왕(rex), 즉 로마 공동체에 속한 가족들을 이끄는 ‘주인’으로 선출되었다.
로마 국가는 구성 요소에서나 형식에서 이런 로마 가족들을 기반으로 한다. 국가 체제 또한 가족 체제를 모방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시민이 자신들 가운데 한 사람을 왕, 다시 말해 로마 공동체에 속한 가족들을 이끄는 ‘주인’으로 선출한다. 이렇게 선출된 왕은 국가 내에서 최고 권력을 가진 유일한 자로서 명령권, 징계권, 사법권, 징집권, 통수권을 갖는다. 그러나 왕일지라도 지나치게 부당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국법을 위반하는 행위다. 왕은 법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행하기 위해 왕권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왕권은 법적으로 제한된다. 왕은 법을 위반할 경우에는 예외 없이 사전에 민회와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는 법적 효력이 없는 폭군의 행위였다.
시민과 원로원, 로마 국가의 또 다른 구성요소
주권은 항상 로마 시민 공동체에 있다. 시민 공동체는 절대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법에 따라 함께 움직였다. 시민 공동체와 더불어 종신직인 최고 연장자 모임이 있었는데, 마치 왕위 계승자 회의처럼 왕위가 공석이 되면 이 모임의 구성원이 최종적으로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왕권을 대행했으며 또 민회가 법에 위배되는 결정을 했을 경우 이를 거부할 권리를 가졌다. 왕권은 살루스티우스가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법적 제약을 받는 것(imperium legitimum)이었다.
로마 국가의 존망이 시민에 기초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민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군역이다. 오로지 시민만이 무기를 잡을 의무와 권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시민은 동시에 병사였다. 로마 시민들은 단순히 의무를 수행하고 공역을 부담할 뿐만 아니라 행정에도 참여했다. 시민들의 모임인 민회는 법의 관점에서는 왕보다 상위에 위치했다.
각 씨족의 최고 연장자들의 회의였던 원로원은 로마 초기 국가 체제에서 왕과 민회와 함께 제3의 권력기관이었다. 원로원은 왕권 집행에 개입할 수는 없었지만, 왕이 군대를 지휘하거나 재판을 주재할 수 없는 경우 왕은 자신의 대리자를 원로들 가운데에서 지명했다. 또한 원로원은 왕의 지시에 따라 시민이 의결한 모든 사항을 심의하여 시민이 현행법과 어긋나는 것을 의결했을 때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국헌을 수정해야 할 모든 사안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뿐만 아니라 원로원은 왕이 자신의 결정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자문기관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로마, 발전하다
상민 공동체의 형성 그리고 군대 정비와 토지 개혁
전체적으로 다음의 사실은 분명하다. 세르비우스 제도는 계급투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뤼쿠르고스, 솔론, 잘레우코스 같은 개혁 입법자의 흔적이 역력하다 …… 로마 건국 200년 뒤에 희랍 국가들이 남부 이탈리아에 순수한 혈족 체제로부터 재산 소유자들에게 무게를 실어주는 방향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세르비우스 개혁의 출발점을 보게 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기본 사살에서 출발하며 엄격한 왕정 체제를 구축했던 로마가 이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그런 체제 개혁이었다.
몸젠은 이렇게 형성된 로마가 피호민 중심의 상민 공동체 형성, 세르비우스 개혁을 통한 군대 정비, 그리고 그에 따른 토지 개혁으로 발전의 기틀을 닦았다고 본다. 먼저 피호민 중심의 상민 공동체 형성을 보자. 시민이 아니었던 사람들, 즉 피호민은 초기에는 오직 보호자의 중재로만 법적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후기에 국가가 더욱 강력해지고 씨족과 가족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피호민은 보호자의 중재 없이 유일한 보호자인 왕에게 손해에 대한 공정한 재판과 배상을 요청했다. 왕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좀 더 긴밀한 복종의 의무를 가진 이들 피호민의 확보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왕권 강화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세르비우스 개혁에 따른 군대 정비와 토지 개혁을 보자.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군역을 시민이 아닌 토지 소유자들에게, 시민이든 영주민이든 무관하게 부과하는 군대 개혁을 실시했다. 인적 부담에서 물적 부담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와 함께 국가에서는 토지 소유에 대한 세심한 감독을 진행했다. 군대 정비에 따라 공시적 토지 거래 및 토지조사에 관한 법률이 등장한 것이다. 토지에 기초한 시민이 새로 등장함과 더불어 라티움 연맹 출신의 거주 외국인들은 공식적 공역, 세금과 부역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었는데, 이들을 부역민이라고 했다. 분구에 속하지 않으며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군 복무와 투표권을 갖지 않는 시민들은 다만 조세 납부의 의무를 가진 자로 간주되었는데, 이들을 속인이라고 했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과거 공동체를 구성하던 두 계급, 즉 시민과 피호민은 사라지고 시민과 부역민과 속인이라는 세 개의 정치 계급이 확정된다. 이는 이후 수백 년 동안 로마 국가 체제가 된다.
로마, 영토 확장에 나서다
이탈리아 사람들 가운데 과감하고 열정적인 축에 속하는 민족에게 대내외적으로 갈등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지역 번영과 문화 발전과 함께 갈등이 점차 전쟁으로, 약탈이 정복으로 변화되었으며, 정치권력이 형성되기 시작했음에 틀림없다 …… 스트라본은 옛날의 로마를 묘사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부족들이 새로운 도읍을 둘러싸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독립된 지역에 거주했으며 부족 연맹에 종속되어 있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초기 로마의 국경 확장이 벌써 동족의 공동체를 넘어서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로마의 권력과 영토 확장을 전해줄 역사적 전거는 남아 있지 않다. 이에 몸젠은 로마가 어떻게 주변 민족과 전쟁을 벌였으며 어떻게 영토를 확장했는지 대략적으로만 추적한다. 몸젠은 로마가 거대 제국을 이룩하는 데에서 중앙 집중 체제를 주변 국가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 덕을 보았다고 말한다. 로마는 그러한 중앙 집중 체제의 확립을 통해 라티움 연맹의 거점 도시였던 알바롱가를 복속시키고 라티움 연맹의 패권국으로 올라선다. 라티움 연맹이 로마에 의해 통일됨에 따라 영토는 동서로 확장되었다. 로마는 행운과 시민의 능력에 힘입어 분주한 상업 및 농업 도시에서 번성하는 지역의 강력한 중심 도시로 변모했다. 풍부한 자금의 유입, 높아지는 사회적 요구 및 확장된 정치적 지평으로 인해 로마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발전된 로마, 과연 어떠한 모습이었나
로마법, 이탈리아 역사의 현대적 성격을 보여주다
이탈리아 사람들, 특히 로마 사람들에게서 원시 상태의 것들이 여타 인도·게르만 어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 역사는 에를 들어 희랍이나 독일의 역사와 비교해서도 오히려 진보된 문명 단계로부터 시작한다고 하겠으며 그 자체적으로도 비교적 현대적 성격을 갖는다.
몸젠은 로마의 법 체계가 현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로마법은 전체적으로 명료하고 간략하다. 상징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중언부언도 없다. 모든 것은 필요한 한에서 복잡한 절차 없이 집행되었으며, 심지어 사형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민에게는 고문을 가할 수 없다는 원칙은 로마법의 출발점이었는데, 이런 원칙을 확립하기 위해 다른 민족들은 수천 년 동안 투쟁해야 했다. 또한 로마법은 준엄하다. 가혹한 엄정함을 지닌 법이다. 왜냐하면 로마법은 인민이 세운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민이 스스로 법률을 제정하고 스스로 이를 지켜나간다. 로마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로마법에는 자유와 복종, 사유재산과 법률적 제한이라는, 오늘날까지도 변함없는 원칙이 순수하고 엄격하게 지켜졌다.
종교, 현실의 로마를 숭고하고 이상적인 차원에서 반영하다
로마 신들의 세계는 …… 현실 세계의 로마를 좀 더 숭고하고 이상적인 차원에서 반영하되, 작은 것이나 큰 것이다 모두를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국가와 씨족, 개개의 자연현상 및 개개의 정신 활동, 모든 인간, 모든 장소와 모든 대상, 그러니까 로마법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펼쳐지는 모든 행위가 고스란히 로마 신들의 세계에 투영되어 있다.
로마의 국가 종교는 모든 측면에서 중요 현상과 성질을 분명하게 파악하려고 했으며, 이를 점문 용어로 이름 붙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했다. 로마는 그러한 움직임을 통해 관습법을 얻어낸다. 목교관 등의 성직자를 통해 발전되고 정식화된 관습법을 종교로부터 확보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신들의 심판 앞에서 도덕적 강제와 종교적 형벌의 근거가 되었다. 나아가 종교를 통해 도덕적 효과까지 누리게 된다. 신들의 저주는 범죄자를 두렵게 했다. 왕은 종교 심판의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기능했다. 모든 형사법은 궁극적으로 속죄라는 종교적 이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로마, 농업 기반 공동체의 중심지
로마 민족처럼 많은 민족 역시 다른 민족을 물리치고 정복했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과 달리 로마 인들만이 유일하게 정복 토지를 스스로 땀 흘려 자신들의 토지로 만들었으며, 창으로 얻은 땅을 그들은 쟁기로 다시 한 번 공고히 했다. 전쟁으로 얻은 땅은 전쟁으로 다시 빼앗길 수 있지만, 농부들이 이룬 정복은 그렇지 않다. 로마 인들은 여러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그때마다 평화를 얻기 위해 로마의 토지를 양보하지는 않았다. 이는 농부들이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완고하게 고집했기 때문이다. 토지를 다스리는 일에서 개인과 국가의 힘이 생겨난다. 이렇게 시민들이 최대한 직접적으로 토지를 소유한 가운데 확고하게 자리 잡은 농부들의 공고한 단결에 근거하여 위대한 로마가 이룩되었다.
농업은 모든 이탈리아 공동체의 토대였다. 특히 로마에서는 국가의 중심이 농업인구에 있었다. 로마 인들이 보여준 전쟁 및 정복 정책은 그러한 농업인구, 다시 말해 토지 소유자를 늘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정복된 공동체는 로마의 농민 신분으로 수용되었다. 위대한 로마는 확고하게 자리 잡은 이들 농부들의 공고한 단결에 근거하여 이룩되었다.
농경 외의 산업이 로마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시 중심으로 형성된 수공업, 이탈리아 사람들 간의 교역에 국한되어 있다가 해양을 통해 성장한 대외 무역 또한 존재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로마는 무역 도시가 아니라 농업 기반 공동체의 중심지였으며 이후로도 계속 그러했다.
이외에도 몸젠은 로마의 측량술과 문자, 예술을 세심하게 살피며 로마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로마 인들이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추적한다. 생경한 지명과 부족명, 처음 접하는 언어들의 끊임없는 등장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젠의 《로마사》는 일독의 가치가 있다. 서구 문명의 두 축 가운데 하나인 고대 로마의 풍경을 생생하게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