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국보 147호로 지정된 울주 천전리각석. 옛 신라 시대 경주에서 낙동강 유역으로 나가는 주요 교통로 부근에 위치한, 각종 기하학적 문양과 그림 그리고 명문이 새겨져 있다. 문자가 없던 시절부터 문자시대 이후까지, 수백 년 혹은 천수백 년에 걸쳐진 온갖 낙서가 써있는 바위다. 특히 그 바위에는 신라 왕족간 일었던 로맨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도 하다. 벗으로 사귀는 오라비와 누이가 525년 어느 날 경주에서 가까운 천전리계곡으로 데이트를 떠났고, 갖가지 문양이 새겨진 바위에 자신들의 사랑의 이야기를 새겨놓았던 것이다.
이처럼 ‘금석문’은 고대인의 목소리를 날 것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녹음기다. 그것은 기존 역사책에서 찾아볼 수 없던 민초들이 가졌던 생각이나 행동들을 알려주기도 하며, 심지어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실제 무령왕릉의 주인을 무령왕이라고 알려준 것은 발굴 때 찾은 ‘매지석’ 덕택이었다.
청동기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고대사의 숨은 면면들을 금석문을 통해 밝히고 있는, 상당히 흥미로운 고대로의 안내서다.
목차
책을 펴내며
1. 신라 왕족의 로맨스, 그 현장을 찾아서|강종훈
2. 고구려 건국설화가 모두루무덤에 묻힌 까닭은|여호규
3. 고대 한일 관계사의 민감한 화두, 칠지도|김태식
4. 무늬와 그림에 담긴 청동기인들의 메시지|송호정
5. 역사의 블랙홀, 동수묘지|전호태
6. 고구려는 정말 유주를 지배했는가 - 유주자사 진묘지|전호태
7. 지석에 새겨진 무령왕 부부의 삶과 죽음|이한상
8. 신라사의 새로운 열쇠, 냉수리비와 봉평비|전덕재
9. 조우관을 쓴 사절 그림 이야기|권덕영
10. 중원고구려비, 선돌에서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로|최장열
11. 순수비에 담긴 진흥왕의 꿈과 야망|강봉룡
12. 백제 노귀족의 불심, 사택지적비|문동석
13. 기와 조각에서 찾아낸 백제 문화, 인각와|이병호
14. 목간에 기록된 신라 창고|김창석
15. 백제 유민의 숨결,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조경철
16. 정혜·정효공주 묘지, 발해사를 이야기하다|김종복
17. 압수한 벽돌판과 사라져버린 토지문서|하일식
18. 100년 동안의 논쟁, 광개토왕릉비|임기환
참고 문헌(주석)
찾아보기
저자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엮은이)
출판사리뷰
화려한 유물 명세서, 그리고 아쉬움
최근 공주 수촌리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금동관(모) 두 개, 금동신발 세 켤레, 환두대도 석 점, 중국제 도자기 다섯 점, 등자 두 점, 허리띠 두 점, 각종 토기 수십 점…….
분명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화려한 출토 유물인데, 현재 이 유적과 유물의 연대를 두고 5세기 전반인지 5세기 중후반인지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무덤의 주인공이 토착세력인지,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인지를 놓고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논란이 거듭될 때마다, 기년이나 주인공의 정체를 밝혀줄 명문 자료가 함께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의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설사 이 유적에서 더 화려한 금관이나 그 무엇이 나온다고 해도, 무덤 주인공이나 연대를 밝혀줄 금석문이 나오지 않는 한, 무령왕 지석이 나온 무령왕릉의 가치를 뛰어넘을 수 없다.
금석문으로 고대사를 읽는다는 것
유물과 역사 기록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 금석문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특히 자료가 부족한 고대사 분야에서 금석문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이 책은 고대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긴 자료인 금석문을 가지고, 우리 고대사의 비밀에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하는 책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삼국사기》《삼국유사》만 가지고 고대사를 이야기해온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문헌사료는 당대의 기록이 아닌, 후대인들이 쓴 ‘과거형’ 후술(後述)이기 때문에 그 사실성이나 진정성 면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금석문은 당대의 사실을 말해주는 생생한 자료로서, 요새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타임캡술 역할을 한다. 그것도 고대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는 ‘생방송 녹음기’인 것이다.
역사 왜곡을 바로잡는 금석문의 중요성
요즘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편입시키고 있는 문제로 떠들썩하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원왕조의 지방정권으로 만드는 근거로, 중원왕조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중국측 자료를 일방적으로 해석하여 쓰고 있다. 고구려인이 쓴 역사서가 한 조각도 없는 상태에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광개토왕릉비나 모두루 묘지(墓誌), 중원고구려비 같은 고구려 금석문은 당시 고구려인의 당당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사료이다.
이들 금석문에 의하면, 고구려인은 독자(獨自)의 천하관을 갖고 있었다. 모두루 묘지에 보이는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생각하면, 고구려가 중원왕조에 예속된 지방정권이라는 중국측 주장은 터무니없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금석문은 이렇게 후대인들이 왜곡해놓은 사서를 바로잡는 자료가 된다.
역사 대중화의 책무 짊어진 ‘한국역사연구회’
금석문이 중요하다는 것은 연구자들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고, 또 실제 연구 과정에서 널리 활용하고 있지만, 이를 일반 대중에게 내놓고 보여주는 책은 아직 없었다. 일반인들에겐 금석문이란 말조차 생소할 수 있다. 금석문의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책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이 형성됐고, 이 책무는 그동안 일반 대중들에게 고대사를 쉽고 흥미롭게 전달하고자 노력해온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에게 돌아갔다.
한국역사 연구회는 올바른 세계관에 입각한 과학적 역사관 수립을 모토로 1988년 설립된 진보적 한국사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특히 고대사 분과는 《문답으로 엮은 한국 고대사 산책》(1994)과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998)를 통해 역사 대중화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앞의 두 책이 고대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고대인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고대로부터의 통신》은 고대사 연구의 속살이라 할 연구 과정을 최대한 드러내어 독자들이 고대사 연구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금석문을 ‘읽는’ 방식 보여주는 책
금석문 연구의 핵심은 금석문 ‘읽기’다. 이 책이 편집상 가장 역점을 둔 부분도 독자들이 직접 금석문을 읽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총 18꼭지의 관련 금석문들의 사진과 원문을 나란히 배치하고, 금석문에서 원문의 글자들을 찾아볼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합리적 추론과 해석을 통해 역사상을 복원해가는 연구자들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진귀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또한 관련 자료들을 최대한 제시하고, 특히 자료의 어떤 부분이 중요한지 확대 혹은 강조하여 책 내용이 시각적으로도 한눈에 들어오게 했다. 각 꼭지의 앞부분에 그 주제와 관련한 키워드를 하나씩 선정, 풀이해놓은 것도 독자들의 내용 이해를 최대한 돕기 위함이다.
최고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고대사 프로젝트’
이 책은 한국 고대사의 중요한 금석문들을 거의 망라하였다. 멀리는 청동기시대의 문양 자료에서부터 국제적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광개토왕릉비, 한일 관계사의 영원한 화두 칠지도, 고신라사를 한 꺼풀 벗겨낸 냉수리비와 봉평비, 과거 역사를 이끈 주역의 발자취를 담은 무령왕 지석, 동수?유주자사 진 등의 묘지문들……. 심지어 부여에서 나온 기왓장에 새겨진 도장 자국까지, 우리 나라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여러 금석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를 위해 각 주제의 권위자, 전문 연구자들이 총동원된 것은 물론이다. 총 17명의 한국고대사 전공 소장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의 10년 노하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러한 결과물은 당분간 만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