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난 2008년 2월 10일 한 노인의 방화로 숭례문이 불에 탔다. 그 뒤 숭례문은 약 5년 3개월여 동안 복구, 복원되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복구가 마무리된 뒤 일단락이 되었다고 여겼으나 몇 달 뒤 숭례문은 다시 뉴스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단청의 박락으로 촉발된 숭례문 복구에 관한 문제제기는 기와로, 나무로 점점 더 확산되었고, 마침내 복구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한 전면적인 감사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지난 5년여 동안 숭례문 가설덧집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복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진행이 되었던 걸까.
이 책은 5년여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숭례문 복구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숭례문복구단의 책임자가 현장에서 남긴 숭례문 복구 과정 전반에 관한 기록을 토대로 출발했다. 문화재청 숭례문복구단 책임자로서 지난 5년여 동안 숭례문 복구 현장 중심에 서 있던 저자의 이 책을 통해 최초로 공개되는 숭례문 복구 과정의 전모는 실제로 복구 현장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관한 생생한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목차
● 책을 펴내며_‘어제’의 건축물을 ‘오늘’ 다시 세운다는 것
● 되돌아 만나는 숭례문의 지난 날
● 프롤로그_2008년 2월 10일, 숭례문 쓰러지다
제1부 준비
그날 그리고 다음날 ㆍ 숭례문이 불에 타다
화재현장의 사람들 |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 국보 제1호의 지위는 그대로
숭례문 복구의 기본원칙 ㆍ 공사의 원칙을 세우다
화재 전으로의 복구, 원형으로의 복원 | 기존부재를 다시 쓸 것, 전통기법과 도구를 사용할 것
숭례문복구단 ㆍ 숭례문복구단의 구성과 역할
문화재청, 복구의 주체가 되다 | 조선시대 영건도감, 숭례문복구단 | 숭례문복구단의 역할
국민들의 관심이 모아지다 ㆍ 성금과 소나무 기증으로 이어진 국민들의 관심
마음만 받아야 했던 국민의 성금 | 소나무 최초 기증자 166명, 최종 기증자 열 명
나머지 나무는 준경묘의 소나무로
화재 1주년에 열린 숭례문 전시회 ㆍ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숭례문의 변화
전시회 준비 | 지금은 사라진 남지의 자취 | 물거품 된 남지 복원의 꿈
숭례문의 육축은 안전한가 ㆍ 타고 남은 부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다
안전성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복구공사 | 구조안정성 평가 최종보고회
숭례문은 어떻게 수리되어왔을까 ㆍ 근대 이후 이루어진 숭례문 수리과정
수리를 넘어 지붕과 마루의 구조를 바꾸다 |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기회 | 잘못된 관행 바로잡기
전통재료사용의 첫걸음, 전통철물 ㆍ 현대철물 대신 전통철물을 쓰기로 하다
전통건축물의 철물 쓰임새 | 전통철물과 현대철물의 비교 | 전통철물 전문가를 찾아가는 길
문화재 공사현장의 공공연한 비밀, 기계가공 ㆍ 「문화재수리표준품셈」의 모순
원칙과 다른 문화재 수리현장 | 「문화재수리표준품셈」 개정
복구현장에서 일할 사람을 정하다 ㆍ 분야별 장인부터 현장소장까지 복구현장의 책임자들
대목장, 석장, 번와장, 제와장, 단청장 | 장인선정위원회를 통해 장인을 결정하다
문화재 수리업자와 현장소장
제2부 현장
현판을 바로잡다 ㆍ 부서진 현판 수리의 모든 것
현판 수리의 역사 | 글씨는 누가 쓴 것인가 | 변형된 글씨를 바로잡다 | 원형 복원에 관한 이견
목공사 전통기법, 그 현실과 한계 ㆍ 아무도 모르는 전통기법의 실체
완전한 전통기법, 오늘날 가능한가 | 운반은 현대기법으로, 가공은 전통기법으로
대장간을 들이다 ㆍ 전통철물에 대한 관심 불러일으키기
대장간 아이디어 | 쇳대박물관장의 도움을 받다
지반의 높이 ㆍ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지반 높이의 변화
화재 이후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 | 지반 높이에 관한 논쟁 | 지반 높이 확정 후 떠오른 실마리 하나 |
변형이 없으면 변경은 안 될 말
나무와 돌을 다듬는 풍경 ㆍ 전통연장을 사용하는 목수와 석수들
전통연장으로 나무를 다듬다 | 전통기법의 석공사과정 |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봅시다!”|
전통가공과 현대공법의 차이
성곽 뒤 축대를 쌓다 ㆍ 기계로 가공한 석재를 쓰되, 마무리는 손으로
성곽 뒤 축대의 필요성 | 기계냐, 손이냐,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민
갈등은 풀고, 문제는 해결하고 ㆍ 복구현장을 둘러싼 문제 해결하기
숭례문 전시관이 관리동으로 바뀌다 | G20서울정상회의, 가설덧집 디자인 해프닝
비판 보도 해명하기 | 한 재미건축가의 오해
숭례문의 전통기와 ㆍ 전통기와 되살리기의 출발점으로 삼다
전통기와에 관한 우려들 | 전통기와와 현대기와 현장 견학 | 전통기와 VS 현대기와
기와업계의 반발 | 등요 설치, 해결의 실마리
전통철물 제작의 시행착오 ㆍ 지지부진한 제작 대신 옛날 것을 사용하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다 | 실패한 전통철 제작 | 잠시, 현장을 떠나다
지붕과 마루에 관한 새로운 고증자료의 등장ㆍ 1960년대 수리 때 변형된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다
마루는 장마루로, 지붕은 전통구조로
파업으로 중단된 목공사 ㆍ 목공사비를 둘러싼 진실
문제는 공사비? | 언론을 통한 공방 | 해결, 그러나……
제3부 끝을 향하여
상량식 ㆍ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것을 자축하다
전통을 따른 숭례문 상량식 | 뜻밖의 논란, 단기냐 서기냐
단청은 전통재료로 ㆍ 단절된 지 오래된 전통재료로 단청을 한다는 것
전통단청에 관해 공부하다 | 현장실험, 그리고 단청자문회의 | 마감재는 무엇으로? | 색조와 문양의 기준을 정하다
지붕의 원형을 되살리기 위하여 ㆍ 옛 숭례문의 분위기를 회복하다
처마곡 문제 | 숭례문 지붕 변천사 | 뜻밖의 실마리
축성식 ㆍ 성곽공사 완료를 자축하는 석장들의 잔치
축성식의 유래 | 돌에 새기는 이름, 한글? 한자?
기와, 늦어지다 ㆍ 현장을 모르는 제작자, 현실성 부족한 제작단가
현장을 모르는 제작자 | 새 기와로 단장한 창덕궁 부용정
숭례문 관리에 관하여 ㆍ 국가지정문화재 관리는 어디에서 해야 하는가
다시 시작된 숭례문 관리 주체에 관한 논란 | 문화재청, 숭례문 관리를 맡다
추녀에 관해 몰랐던 사실 ㆍ 상하층 추녀 내밀기, 실수와 발견
1960년대 수리 전후로 달라진 추녀의 길이 | 미리 알았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방염제를 둘러싼 논란 ㆍ 정답 없는 논란이 반복되다
방염제에 관한 언론의 보도 | 문화재청의 입장 | 국정감사장에서 다시 논란이 되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고색가칠, 눈속임의 유혹 ㆍ 문화재 수리현장에서 재료의 진정성을 생각하다
새것은 새것대로, 옛것은 옛것대로
뇌록의 산지에 가다 ㆍ 전통안료, 뇌록을 찾아서
전통안료의 대표적 산지, 뇌성산 | 천연기념물로서의 가치
준공행사를 미루다 ㆍ 불가능한 대통령 임기 내 준공행사
준공행사 대신 대국민 보고회로
● 에필로그 | 잃은 것과 얻은 것
● 연표로 보는 숭례문 ● 주 ● 참고문헌 ● 찾아보기
저자
최종덕
출판사리뷰
숭례문 복구 기간 5년 3개월,
가설덧집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지난 2008년 2월 10일 한 노인의 방화로 숭례문이 불에 탔다. 그 뒤 숭례문은 약 5년 3개월여 동안 복구, 복원되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복구가 마무리된 뒤 일단락이 되었다고 여겼으나 몇 달 뒤 숭례문은 다시 뉴스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단청의 박락으로 촉발된 숭례문 복구에 관한 문제제기는 기와로, 나무로 점점 더 확산되었고, 마침내 복구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한 전면적인 감사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지난 5년여 동안 숭례문 가설덧집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복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진행이 되었던 걸까.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으나 현장의 모습을 통해 복구의 과정을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한 권의 책으로 등장했다.
최초로 공개되는 숭례문 복구 과정의 전모, 숭례문에 관한 종합적이고 상세한 기록
『숭례문 세우기-숭례문복구단장 5년의 현장 기록』은 5년여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숭례문 복구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숭례문복구단의 책임자가 현장에서 남긴 숭례문 복구 과정 전반에 관한 기록을 토대로 출발했다. 문화재청 숭례문복구단 책임자로서 지난 5년여 동안 숭례문 복구 현장 중심에 서 있던 저자의 이 책을 통해 최초로 공개되는 숭례문 복구 과정의 전모는 실제로 복구 현장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관한 생생한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의 역할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숭례문 복구는 일련의 과정이 파편적으로 나뉘어 진행된 것이 아니다. 5년여 동안 지속적으로 온갖 과정과 공정, 다양한 사람들이 맞물리면서 복구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공정의 개별적인 문제제기만으로는 현재 우리가 품고 있는 숭례문에 관한 의문이 근본적으로 해소되기 어렵다. 또한 숭례문은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재인 만큼 그것이 언제 어떻게 세워졌고, 그동안 어떤 역사를 품어 왔으며, 우리가 기억하는 숭례문은 어느 때 모습이며 그 모습을 이루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알아야만 오늘 우리 앞에 서 있는 숭례문에 관하여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저자는 복구 현장의 한가운데 서서 단편적인 사실과 장면,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숭례문을 둘러싼 역사적인 연원부터 현재 시점에서 가능한 복구의 공정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시선으로 현장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을 바탕으로 숭례문 복구에 관한 종합적이고,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또한 책을 펴내면서 그는 이 기록을 중심으로 하되 단순히 시간순으로 상황을 나열하는 것에서 나아가 ‘오늘의 시점’에서 이루어진 숭례문 복구를 역사적인 맥락 속에 세워둠으로써 숭례문 복구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2009년부터 시작하여 2013년 준공 직후 완성된, 일반인을 위한 숭례문 복구기
그러나 이 책은 최근 불거진 숭례문 복구에 관한 논란을 해명하기 위해 출간한 책이 아니다. 오랜 세월 문화재청에 근무하며 우리 건축물을 지켜본 저자는 2008년 9월부터 숭례문의 복구에 참여하게 된다. 복구 현장을 지켜보던 그는 우리 문화재의 복원 현장을 있는 그대로 일반인들에게 생생하게 전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평소 ‘문화재’로 불리는 옛 건축물을 원형대로 보존, 수리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가, 라는 의문을 가져왔고, 숭례문 복구를 통해 ‘과거’의 문화재를 ‘오늘’ 현재 시점에서 다시 되살리는 현장의 한계와 고민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기록 안에는 숭례문이 불에 탄 순간은 물론 복구가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고, 마침내 준공식이 치러진 직후인 2013년 6월 드디어 책 한 권 분량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화재의 순간부터 준공까지 복구의 전 과정을 다룬 책
숭례문이 불에 타는 순간, 불 타는 상층 문루에 포커스를 맞추던 뉴스 카메라의 바깥에서는 불길이 닿기 전에 현판이라도 구해야 한다고 동분서주하는 이들이 있었다. 화재 현장의 급박한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프롤로그를 연 이 책은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기 전 준비 과정을 제1부에서 소개하고 있다. 숭례문 복구의 기본원칙은 어떻게 정해졌는지, 숭례문의 복구 주체가 문화재청으로 결정된 과정과 국민들의 성원을 둘러싸고 일어난 풍경, 전통철물부터 기계가공의 공공연한 현실, 대목장을 비롯한 석장과 단청장 등의 복구 공사를 책임질 장인들의 선정과정 등을 소상히 다루고 있다. 이어지는 제2부에서는 본격적인 공사의 시작 이후 일어난 현장의 이야기를 다룬다. 화재의 순간 가까스로 구해낸 현판의 수리와 이를 계기로 그동안 몰랐던 변형된 현판을 바로 잡은 과정, 목공사와 석공사 현장에서 전통기법을 도입하는 과정의 고민, 전통기와의 현실과 한계, 그리고 이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현장의 고민, 지반의 높이를 비롯, 지붕과 마루의 모양까지 오랜 세월 변형되어온 숭례문의 원형을 찾아가는 과정 등을 각종 그림과 도면 등을 활용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숭례문 복구를 둘러싸고 일어난 숱한 오해와 이를 해명하는 과정, 전통기법을 적용하기 위해 거쳤던 무수한 회의와 실험의 내용, 공사 중간에 일어난 목공사 파업의 전말까지 숨가쁘게 돌아가는 복구 현장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전달하고 있다. 공사의 마무리 단계를 다룬 제3부에서는 상량식과 축성식의 풍경부터 전통단청기법의 도입 과정, 준공 이후 관리 주체의 문제에서부터 준공식 일정과 관련된 일련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의 주체를 둘러싼 현실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숭례문 복구를 통해 옛 건축물의 보존과 복구,
그 실상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다
고민과 갈등, 시행착오와 문제 해결까지 숭례문을 둘러싼 문화재 복원 현장의 생생한 기록
화재라는 불행한 사건 이후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된 숭례문의 복구를 책임진 문화재청은 ‘성문은 화재 전의 모습으로 복구’하고 ‘성곽과 지반은 원형대로 복원’하며, ‘전통기법과 도구를 사용하여 복구한다’는 복구의 기본원칙을 천명했다. 숭례문이 불에 탄 것은 불행한 일이었으나 그 불행을 계기로 숭례문의 원형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고, 그동안 유야무야해오던 우리의 전통기법과 도구의 현실에 관해 전면적으로 확인, 점검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 셈이다.
화재 이후 숭례문복구단에 참여한 저자는 사라져가는 전통기법과 도구를 어떻게 다시 현장에서 되살릴 수 있는가, 아울러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변형되어온 숭례문의 원형을 어떻게 복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고문서와 국내외의 논문과 단행본, 역대 문화재 관련 수리보고서 등을 포함한 다양한 문헌자료를 샅샅이 살피는 것은 물론, 목공사와 석공사 장인들과 전통기법에 관해 의논하고, 기와, 단청, 철물 등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작하면서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현장에서 사라진 전통기법을 현장에 도입하기 위해 현장에서는 숱한 시행착오가 거듭되었고, 때로는 업계의 격렬한 반대, 언론의 비판에도 부딪쳐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능률과 효율을 앞세워 기계를 사용해야 한다는 요구와 복구현장을 둘러싼 여러 이해 관계 속에서의 갈등을 해결하면서 한편으로는 각 분야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회의와 숱한 실험의 결과를 거쳐 전통재료와 기법을 결정해나가야 했다. 이러한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숭례문의 복구 과정만이 아닌 오늘날 우리 문화재 복원 현장의 현주소가 어떠한지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숭례문 복구로 드러난 우리 문화재 복원 현장의 현주소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수리된 문화재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으로 1956년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난 2011년 복원한 경복궁까지 우리는 전국에 산재한 숱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훼손된 부분을 복구해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러한 문화재의 복구 현장에는 우리 고유의 전통연장은 사라지고 일본으로부터 흘러들어온 목공기계와 석공기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기와에 도입된 KS규정은 전통기와의 물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우리 전통기와는 품질 미달의 불명예를 안고 현장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는 전통기와와는 물성이 전혀 다른 현대기와가 차지했다.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전통단청을 폐기했다. 대량생산과 높은 능률이 무엇보다 미덕으로 떠받들어졌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숭례문 복구 이전까지 고스란히 이어졌고, 당연한 관행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문화재를 수리한다는 이들은 전통기법으로 일하겠다고 계약한 뒤 현장에서는 공공연하게 기계를 사용했고, 기와를 만드는 이들도, 단청을 하는 이들도 옛날 방법 대신 편리한 오늘날의 재료와 오늘날의 방식으로 문화재를 ‘수리’해왔다. 이런 풍경은 문화재 수리현장에서 당연하게 여겨졌고, 되돌릴 방법은 까마득해보였다. 2008년 5월 20일 발표된 ‘숭례문 복구 기본원칙’ 가운데 전통기법과 연장을 사용한다는 원칙을 포함시킨 것은 그간 문화재 수리현장에서 지켜지지 않았던 기본적인 원칙을 확실하게 지켜나가야 한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그러나 문화재의 수리현장에서 전통기법과 연장을 사용한다는 것은 의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우리는 옛 건축물을 원래의 모습과 방식으로 복원, 복구, 수리하는 방법을 대부분 잊고 있었다. 전통기법으로 나무를 켤 줄도 몰랐으며, 기계가 아닌 방법으로 돌을 깨고 다듬는 것도 지난했다. 전통철은 만드는 방법을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전통기와가 현대기와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모를 만큼 이미 그것에 대한 관심도 거둔 지 오래였고, 단청은 색은 물론 칠하고 난 뒤 어떻게 방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본 경험조차 희미했다. 숭례문 복구의 현장은 눈에 보이는 숭례문을 복구하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 잊혀진 우리의 전통기법을 복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398년 조선의 태조 임금이 지은 뒤 2010년 불타기 전까지,
610년을 이어온 파란만장한 숭례문의 지난날
『숭례문 세우기』를 보고 있자면 지금 서울 한복판에 서 있는 숭례문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나의 건축물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건물의 역사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믿는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숭례문과 관련된 기록을 일일이 찾고, 수리 때마다 발견된 상량문, 수리보고서, 관련 문헌 등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섭렵하여 우리가 일상적인 풍경으로 대하고 있는 숭례문의 역사를 고스란히 되살려놓았다. 또한 숭례문의 다양한 옛 모습을 보여주는 시각 자료들을 총 망라하여 시대별로 숭례문과 주변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일별할 수 있게 하였다.
숭례문은 언제부터 지금의 자리에 있어왔는가
조선 태조 임금의 명으로 1396년 1월 도성의 기초를 놓은 뒤 숭례문은 같은 해 10월 상량을 하고, 1398년 완공한 뒤 지금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나 화재 전 우리가 보던 숭례문은 태조 대 지어진 그 모습이 아니었다. 1447년 8월 세종 임금은 숭례문을 새로 짓기를 명했고, 이듬해 5월에 공사를 마쳤다. 이후 숭례문은 성종 대에 대대적인 수리를 거쳤고, 고종 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도성의 성문들도 함께 수리를 했다. 그러나 이 당시 숭례문 역시 우리가 보는 숭례문의 모습은 아니었다.
화재 전 우리가 보던 숭례문은 언제부터 그 모습이었는가
그렇다면 화재 이전 우리가 떠올리는 그 숭례문의 모습은 언제 만들어진 것인가. 숭례문의 운명 역시 우리 역사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07년 숭례문의 좌우 성벽은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되었고, 그 앞에 있던 연못은 매몰되었다.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 숭례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처마는 뒤틀어지고 현판과 육축은 총탄의 세례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전쟁 직후 1953년 응급복구를 거친 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대대적인 수리를 거친 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기억 속 숭례문의 모습이다.
숭례문이 국보 제1호가 된 사연
숭례문이 왜 국보 제1호가 되었는지에 관한 사연을 읽고 있자면 국보 제1호에 대한 우리의 의미 부여가 과연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숭례문이 국보 제1호가 된 것은 일제의 한반도 문화재정책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한반도에 있는 문화재는 일본에 있는 문화재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보고 ‘국보’가 아닌 ‘보물’로 지정했다. 당시 국보는 일본에 있는 중요 문화재로 한정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일제는 숭례문을 보물로 지정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보물 제1호로 지정했다. 해방 이후 우리 정부는 보물을 국보로 한 단계 격상시키면서 그 순서는 그대로 유지하여 숭례문은 보물 제1호에서 자연스럽게 국보 제1호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국보 제1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숭례문 화재로 우리가 잃은 것과 얻은 것을 살피다
숭례문 화재로 우리가 잃은 것
숭례문은 육축과 상하층의 2층 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상하층 문루 중 하층 문루는 거의 온전했다. 상층의 평방 위에 있는 공포와 지붕이 불에 탔고, 그로 인해 목부재와 기와, 그리고 단청이 피해를 입었다. 전체 목부재 중 34퍼센트는 다시 사용할 수 있었고, 아쉽게도 약 66퍼센트를 잃었다. 훼손된 목부재 가운데 전체 목부재의 약 20퍼센트가 조선시대의 목부재였다. 특히 아쉬운 것은 상층 문루 목부재 중 상량문이 적혀 있던 목부재를 잃은 것이다. 아울러 지붕 위 장식기와는 잡상 총 64개 중 3개, 토수 총 8개 중 2개만 재사용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잃었다. 그 가운데 취두 1개, 잡상 8개, 토수 1개가 조선시대의 것이고, 나머지는 1997년에 제작된 것이었다. 단청은 1988년 화학안료로 단청한 것이라 전통단청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만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다.
복구공사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불 탄 숭례문 복구를 계기로 얻은 것은 무엇이 있을까. 무엇보다 전통기법과 재료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전동공구 대신 전통기법으로 나무와 돌을 가공했고, 특히 돌은 가르는 것부터 다듬는 것까지 정과 망치를 이용했다. 화재 전 숭례문의 기와는 99.9퍼센트 공장기와였다. 단청안료와 접착제는 화학제품이었다. 그러던 것을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전통기와를 만들어 올렸고, 단청 역시 전통재료를 통해 우리의 전통단청의 기법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철물 역시 전통철물을 새로 제작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기존의 것을 가급적 다시 사용했고, 경복궁 경회루에서 회수한 것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또한 1907년 철거된 성곽을 일부 복원한 것, 1960년대 수리로 변형된 지붕의 모양과 내부구조를 원래의 모습과 공법으로 되돌린 것, 단청의 색조와 문양을 조선시대 단청의 흔적을 찾아 모로단청의 분위기로 돌려놓은 것, 숭례문을 오르는 계단 폭을 바로 잡은 것, 그리고 현판의 글씨를 바로 잡은 것 등을 복구를 통해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화재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이전의 모습을 되살린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한계와, 앞으로의 과제를 얻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 전통기법의 한계를 확인한 것 역시 얻은 게 아닌가라는 자문으로 끝을 맺는다. 전통철부터 기와, 목공사와 석공사는 물론이고 단청까지 대부분의 공정에서 전통기법과 재료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저자는 숭례문 복구 과정을 통해 거의 맥이 끊겨 아무도 복원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전통기법과 재료를 통한 수리를 시도했고, 그것의 한계를 경험하고 앞으로의 해나가야 할 과제를 받은 것 또한 숭례문 복구 공사를 통해 얻은 것이 아닌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숭례문 복구 기간 내내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며, 훗날 이 기록이 우리 건축물의 복원과 수리 현장에서 전통기법과 재료가 더 널리 쓰이는 계기가 되어줄 것을 소망했던 저자의 자문에 독자들은 어떤 답을 내려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