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는 어떤 여행을 원하는가
여행과 관광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성찰을 담고있는 특별한 여행기
여행이 관광이라는 말과 구별되지 않는 시대에, 여행의 본질을 묻고 여행자의 내면적 성찰을 강조하는 특별한 여행기다. 기존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는 여행서의 대부분은 단순 가이드북이거나 관광 명소를 좇으며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간략히 소개하고 지은이의 감상을 곁들이는 식이다. 또한 인문학 여행기라는 이름을 단 여러 책들도 작가 자신의 감상을 범박하게 늘어놓거나, 그 나라와 국민성에 대한 오래된 선입견을 아무 고민 없이 반복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윤여일의 『여행의 사고』는 여행의 출발을 자신의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는 데서 출발한다. 저자는 여행기를 시작하면서 나름의 원칙을 세운다. “기존에 지니고 있던 앎으로 구체적인 생활의 장소를 내리누르는 일을 피”할 것. “인문학적 취미에 기대어 한 장소를 쉽사리 의미로 포장해 내놓는 일을 경계”할 것. “정리된 결론보다는 생각이 거쳐 간 절차들을 적”을 것. 이 책은 그러한 시도 끝에 여행의 본질이 무엇인지, 타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윤리 감각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지 끊임없이 사유할 거리들을 독자들에게 각각 던지고 있다.
세 번째 권에서는 저자가 공부하는 필드이기도 한 일본과 중국 등의 아시아를 다루고 있다. 동아시아라는 지평 위에서 배움의 길과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4~6장은 주로 자신의 배움와 관련하여 사표로 삼고 있는 인물들을 조명한다. 다케우치 요시미와 루쉰의 생전 활동을 살피고 그 흔적을 좇고 있으며, 저자의 중국인 스승인 쑨거 선생과의 인연과 선생으로부터 받은 지적 훈련에 대해서 쓰고 있다. 7장부터는 중국 남서부 지방 곧 윈난 성에서 시작하는 차마고도 여정을 담는다. 중국의 소수 민족들이 사는 지방을 여행하면서 번역이라는 문제, 여행과 글쓰기라는 표현의 문제에 대해 밀도 있는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목차
1. 정신으로의 여행
2. 아시아를 공부/여행하는 일, 그리고 오키나와
3. 홋카이도에서 만난 조선
4. 한 사상가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 도쿄
5. 베이징, 번역에서 여행을 사고하다.
6. 사오싱과 상하이, 루쉰에게서 정치를 보다.
7. 생존이 빚어낸 문명의 길, 차마고도
8. 텍스트로서의 장소, 샹그릴라
9. 징훙과 루앙남타, 차와 비단 그리고 숙성의 시간
10. 여행과 표현
저자
윤여일
출판사리뷰
어떤 여행을 원하는가
나는 내가 꺼리는 여행을 늘어놓고 싶다. 속되게 표현하자면, 경치나 풍물을 눈에 바르는 여행, 그리하여 관광객의 시선에 머무르는 여행, 그리하여 한 번 찍었으니 두 번 다녀올 필요가 없는 여행, 현지 사회의 역사와 고유한 맥락을 무시하는 여행, 그래서 꼭 이곳이 아니라 저곳을 다녀왔어도 되는 여행, 이리저리 난폭하게 문명의 잣대를 들이대는 여행, 자신의 시간 위에서만 배회하는 여행, 그래서 결국 자신이 바뀌지 않는 여행.
그러나 역시 정작 적어보고 싶은 것은 내가 원하는 여행이다. 나라 단위가 아니라 마을 단위에서 생활 감각을 체험하는 여행, 자신의 감각과 자기 사회의 논리를 되묻게 만드는 여행, 현지인의 목소리를 듣지만 그것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여행, 카메라를 사용하되 그 폭력성을 의식하는 여행, 마음의 장소에 다다르는 여행, 물음을 안기는 여행, 길을 잃는 여행, 친구가 생기는 여행, 세계를 평면이 아닌 깊이로 사고하는 여행, 마지막으로 자기로의 여행. - 『여행의 사고 하나』, 45쪽
진정한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여행기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게 이런 건가 보다. 나를 둘러싼 이 황야를 거니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속 황야를 살피는 일이로구나. -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여행의 사고 하나』, 20쪽)
여행이 관광이라는 말과 구별되지 않는 시대에, 여행의 본질을 묻고 여행자의 내면적 성찰을 강조하는 특별한 여행기다. 이 책의 저자 윤여일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수유너머의 지역 연구 코뮌인 수유너머 R의 동아시아 연구자로 활동했다. 저자는 그동안 책에 갇힌 채 이론 공부에만 몰두해온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자신의 무뎌진 감각을 갱신하자 2007년부터 여행을 시작한다. 이는 지역학 연구자로서 스스로에게 ‘장소’를 읽는 훈련을 부과하는 일이기도 했다. 과테말라와 멕시코, 인도와 네팔, 중국과 일본 등 저자에게 여행지는 낯선 세계를 배우는 학습의 현장이자 타자의 존재를 윤리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사색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윤여일의 『여행의 사고』 시리즈는 그동안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감각의 여행기다. 기존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는 여행서의 대부분은 단순 가이드북이거나 관광 명소를 좇으며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간략히 소개하고 지은이의 감상을 곁들이는 식이다. 또한 인문학 여행기라는 이름을 단 여러 책들도 작가 자신의 감상을 범박하게 늘어놓거나, 그 나라와 국민성에 대한 오래된 선입견을 아무 고민 없이 반복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윤여일의 『여행의 사고』는 여행의 출발을 자신의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는 데서 출발한다. 저자는 여행기를 시작하면서 나름의 원칙을 세운다. “기존에 지니고 있던 앎으로 구체적인 생활의 장소를 내리누르는 일을 피”할 것. “인문학적 취미에 기대어 한 장소를 쉽사리 의미로 포장해 내놓는 일을 경계”할 것. “정리된 결론보다는 생각이 거쳐 간 절차들을 적”을 것. 이는 기존 여행자들이 이미 그려 놓은 풍경화에 몇 개의 색깔을 덧칠하는 것이 아니라, 구상부터 스케치까지 흰 도화지 위에 모든 것을 다시 그려보겠다는 각오다.
저자가 여행지를 돌며 새삼 깨달은 바는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단선적인 시간성 위에 깔끔하게 정돈되어 진행되어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여러 겹의 시간성 위에 놓인 그 문명의 층위를 세심하게 이해하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벌인다. 한편으로는 그 시간의 지층을 가로질러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무늬까지 들여다보려고 시도한다. 저자가 현지인들과의 만남에 특별히 관심을 쏟는 것도 이 때문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연구자 구스타보 씨(『여행의 사고 하나』, 106~129쪽), 네팔의 포카라에서 만난 티베트 난민 캠프 거주자 푼척 왕모 씨(『여행의 사고 둘』, 316~323쪽), 홋카이도에서 만난 아이누 민족운동가 오가와 류키치 씨(『여행의 사고 셋』, 86~90쪽) 등 그의 여정 가운데는 늘 몇 겹의 깊이로 그 사회의 역사와 현실의 문제의식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여행의 사고』가 기존 여행서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었던 시선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끈질긴 관찰과 개성적인 글쓰기가 돋보이는 인문 여행기
여행자가 현지 삶의 밀도를 통과해 의미에 닿으려면 여행의 사고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 인내란 현지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과 사건으로부터 뜻밖의 긴 이야기가 걸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인내다.
- 『여행의 사고 셋』, 21쪽
저자에게 여행이란 책을 읽는 일에 비견된다. 그는 이 책에서 마치 책의 내용을 꼭꼭 씹어 삼키듯, 여행지라는 ‘장소’ 텍스트를 그 뒤에 가려진 행간까지 고려해가며 밀도 있게 읽어낸다. 또 현지에서 보고 들은 내용 중 이해되지 않던 부분들을 여행 후 다시 조사하거나, 여행 전 궁금했던 부분들을 현지인에게 끈질기게 물어가며 답을 구한다. 그와 같은 저자의 학구열 덕분에 이 책은 여느 인문 여행기 이상의 내용적 충실성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여행의 본질이 무엇인지, 타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윤리 감각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지 끊임없이 사유한다는 점에서 높은 수준의 성찰적 에세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이 여행기의 또 다른 장점은 저자의 글쓰기에 있다. 저자의 글에서는 사회과학도의 세밀한 관찰력과 분석력, 그리고 철학도의 깊은 사고력과 논리력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문학도의 재기발랄함과 표현성을 녹여냄으로써, 여느 인문서 이상으로 생각의 밀도는 높지만 결코 어렵거나 딱딱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예컨대 LA 코리아타운 술자리에서 아저씨들의 수다를 통해 그들의 미국 이민사와 그에 얽힌 물질적 욕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며(『여행의 사고 하나』, 315~336쪽), 신종 인플루엔자 의심 환자로 오해를 받아 인도의 한 병원에 억류되어 곤욕을 치르는 장면은 마치 한 편의 부조리극으로도 읽힌다(『여행의 사고 둘』, 49~57쪽). 대상과 인물에 대한 끈질긴 관찰을 통하여 이를 자신만의 감각으로 읽어내는 힘은 저자의 글쓰기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여행자의 윤리 - 타문화에서 마주한 고민의 기록
여행은 대체로 어딘가로 가서 무언가를 보고 오는 일이지만 그 과정은 단순치 않다. 가는 길이 뚫려 있고, 머물고 먹을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누군가의 수고가 필요하다. 더구나 내가 여행지로 들르는 그곳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행길을 따라 타인의 삶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 『여행의 사고 둘』, 184쪽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크게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여행자의 윤리이다. 저자는 먼저 여행자의 카메라가 지닌 폭력성에 주목한다. 사진은 “내가 피사체로 정한 상대방은 담기지만 정작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나 자신의 흔적은 남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비윤리적이라는 비판. 상대방의 동의 없이 사진을 찍고 그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에는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저자는 우리가 흔히 ‘현지’라고 부른 그곳이 전시된 유물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여행자의 방문이 필연적으로 ‘타인의 삶’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곧 여행자가 늘어나면 그곳은 관광지로 개발되고, 거기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양식도 바뀐다는 것. 예컨대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거리로 내몰린 현지인들은 레스토랑에서 전통춤을 스테이크에 끼워 팔고, 성매매와 접시 닦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또 해안에 리조트가 세워지면 어부는 바다를 잃고, 골프장이 들어선 땅에서 농민들은 물을 빼앗긴다.” 따라서 여행자가 “누군가의 노동, 누군가에게 더욱 필요할지 모를 물과 전기와 음식물을 사들이며 돈을 지불했다고” 해서 그 행위는 ‘정당한’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 “은밀하고도 거대한 착취의 구조 속”에 자신 또한 당사자로 참여하고 있는 사실이 저자 스스로에게도 깊은 고민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