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18,000 20,000
제조사
돌베개
원산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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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 고려, 발해, 그리고 신라의 역사를 거꾸로 올라가면서 그리스도교의 한반도 전래 역사를 살펴본, 역사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를 조망한 책이다.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는 18, 9세기에 뿌리를 내리고 이 시기를 전후로 한 그리스도교 역사에 관심을 두고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고대 한반도에 전래된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사적 입장에서 읽어 내기 어렵다.

그리스도교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식 교회 설립년도보다 훨씬 이전에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조선 지식인과 민중들이 예수를 만나고, 십자가 군대에 고려인들이 참전하고, 개성에는 조지라는 그리스도교인이 살았으며, 발해 사람들은 보살에게 십자가 목걸이를 걸어 주고, 신라인들은 불국사와 석굴암에 그리스도교 문화를 남겼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강인한 생명으로 고대, 중세, 현대를 이어 한반도에 신앙의 싹을 키우고 있다.

목차

서장 / 한국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 제1의 종교 / 가시 면류관을 쓴 우리 역사 / 그리스도교 전래의 수수께끼 / 사라진 동방 그리스도교 / 동양인 예수와 동양인 제자들 /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 / 예수, 불국사에 오다

1장 / 야소교 신드롬
‘야소’란 말은 언제 사용되었을까? / 북학파가 본 야소교 / 성호학파가 본 야소교 / 조선·중국·일본의 야소교 마찰 / 베스트셀러 서학서를 불태워라 / 벗은 제2의 나 / 서학의 본산 북경 천주당 / 예수를 보고 놀란 사신들

2장 / 길리시단과 임진왜란
너희는 길리시단이냐? / 나막신과 푸른 눈의 이방인들 / 박연과 홍이포 / 하멜과 박연의 기구한 만남 / 홍도와 조선인 노예들 / 일본인 기리시탄과 조선 침략 / 십자가 군기에 찢긴 조선 산하 / 오타 쥴리아와 조선인 성인들 / 기리시탄 금교령과 박해 / 조선인 기리시탄의 귀국과 순교 / 서산대사의 십자가와 기리시탄 승려 / 조선인들의 동남아 선교

3장 / 까울리의 십자가
고려군이 본 십자가 깃발 / 고려촌의 흙 십자가 / 까울리의 국제무역 항구 벽란도 / 충렬왕의 처 할머니 소르칵타니 베키 / 하느님을 노래한 이색 / 절이 되어 버린 예배당 / 개경에 온 조지 / 제국대장공주와 고당왕 조지 / 소주와 쌍화점

4장 / 발해와 신라에 핀 그리스도교
글로벌 공동체 국가 발해 / 하느님 자손과 십자가를 한 삼존보살 / 신라 석굴암과 누가의 초상화 / 불국사에서 나온 돌십자가 / 경교로 변한 천주교 / 당나라에 비친 경교 / 목탁을 치는 사제들 / 유불도의 옷을 입은 경교 / 경주로 간 성모 마리아와 천주 기와

보론 / 동방 그리스도교의 재조명
서양 중심의 그리스도교 / 영원한 이단자 네스토리우스 / 그리스도교의 동서 분열 / 화해와 용서

저자

최상한

출판사리뷰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천 년 그 이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한국 제1의 종교는 불교일까? 아니면 그리스도교일까?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개신교인은 861만 명, 천주교인은 514만 명이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치면 1,37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9.2%를 차지한다. 그리고 불교는 전체 인구의 22.8%를 차지한다. 수치상으로 보면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한 그리스도교가 한국 제1의 종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천주교와 개신교로 분리하는 경향 때문에, 지금도 한국 제1의 종교는 불교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해서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울지 모른다.
― 그리스도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뉘고, 개신교는 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의 다양한 교단을 낳았다. 교단끼리의 신앙관과 교리가 다른 것처럼,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신앙관과 교리의 차이 또한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인류 구원을 위한 사랑이었다는 믿음에 대해서만은 천주교와 개신교가 일치한다.
― 그리스도교가 한국 제1의 종교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언제쯤 우리 역사에 전래되었을까?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의 한반도 전래 역사는 신라와 발해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최초 전래된 해는 천주교 1784년, 개신교 1885년이다. 한국 그리스도교가 226년의 짧은 기간 동안 역사가 깊은 다른 종교보다 급성장하여 제1의 종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1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불교보다 더 많은 수의 교인을 둔 제1의 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 1784년에 한국 그리스도교가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고정관념은 그보다 1천여 년 전에 그리스도교가 우리 역사에 남겼던 발자취를 망각해 버리는 행위이다.
― 그리스도교를 천주교와 개신교로 분리할 때, 우리는 한반도와 다른 나라에 전해진 그리스도교를 하나로 바라볼 수 없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하나의 그리스도교로 인식해야만 고대 한반도에 전래된 그리스도교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교는 천주교와 개신교 전체를 의미한다.

고대 한반도에 전래된 그리스도교의 흔적은 어디에 있는가?

― 이 책은 천주교 설립년도인 1784년, 개신교 설립년도인 1885년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책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는 네스토리안교인 경교(景敎)를 포함한다. 경교를 그리스도교에 포함하는 문제는 이미 이 책의 ‘보론’에서 밝히고 있다. 199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리아 동방 교회의 총주교 마르 딘카 4세의 그리스도론에 관한 대화합 공동선언을 통해 네스토리안교의 이단의 혐의는 없어졌다. 또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경교와 천주교를 구분하지 않았고 같은 종교로 인식했다.
― 마리아의 신성, 인성 문제로 이단이 된 동방 그리스도교(네스토리안교)는 중앙아시아, 몽골, 중국으로 들어와 경교로 정립되었다. 중국의 당나라, 송나라, 몽골의 원나라와 교류한 신라, 발해, 고려에도 경교가 들어왔다. 그리고 임진왜란 전후로는 서방 그리스도교가 이미 조선 사회에 유행했다.
―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교에 관한 문헌이 없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독자적인 역사 기록이 없는 이유를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어울림의 신앙에서 찾았다. 다른 종교와의 어울림이라는 말 자체만으로도 현대의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에게는 이단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에서 어울림의 신앙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천 년 이상 우리 민족과 함께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 경교가 중국에서 유행하고 수많은 경교 사원이 생겼을 때 그 사원들의 이름에는 하나같이 절 사(寺) 자가 붙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상단에는 경교 십자가 문양과 함께 불교의 연꽃, 도교의 부운(浮雲) 등이 어우러져 있다. 경교 신자들은 목탁을 두드렸으며, 현재 불교에서 두드리는 목탁은 불교의 원산지인 인도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도구라는 점. 어쩌면 우리가 아는 불국사도 단지 부처만을 믿는 절의 의미가 아닌 사원의 의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어울림의 신앙을 이루던 경교와 불교가 시대가 지나면서 세력이 큰 불교로 흡수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판단이다. 그리스도교의 아시아 동진 연구자인 고든(E.A. Golden)은 1917년 금강산 장안사에 체류하면서 이곳에 경교비의 모조비를 세우고, ?도(道)의 상징?(The Symbol of the Way)이라는 논문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 논문에서 고든은 동양 불교문화 속에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인 경교의 흔적이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 이 책은 한반도와 주변 국가의 문물·사상의 교류, 출토된 유물 등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한반도 유입의 흔적들을 시대별로 찾고 있다. “천 년 전 한반도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왔을까?”라는 지극히 당연한 물음에 대한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대답을 이 책은 하고 있다.

한반도에 남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조선
“성당과 교회가 없어도, 서양 선교사가 없어도 야소교를 죽음으로 지켜낸 야소 신자들의 신앙에서 조선혼으로 농축된 그리스도교가 있었다.”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책이다. 그러나 1592년부터 1871년까지 약 300년 간의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를 집대성한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와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역사비망기」에서 사료적 근거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사」와 「조선순교자역사비망기」는 조선 중엽이후부터 조선 말까지 그리스도교 전래 역사를 각종 자료와 서신을 수집하여 편집한 책이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책이 자료로 다산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최초의 한국 그리스도교 전래사를 저술한 이는 다산 정약용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1784년에 세례를 받았고, 그의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이때 다산의 나이는 23세였는데, 성균관에 진사로 들어간 지 1년이 지난 때였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순교자역사비망기」에서 다산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조선의 천주교 기원에 관하여 우리가 대부분의 사실을 인용한 자료들은 자주 언급되는 정약용에 의하여 수집되었다. 그는 세례 때 요한으로 불렸다. 그는 시초부터 천주교의 거의 모든 사건에 관계하였고 또 거의 모든 주요 지도자들은 그의 친척이거나 친구였다. 문학과 관직에서 뛰어난 사람으로 그는 천주교를 배반하는 나약함을 보였다. 그것으로 1801년의 그의 유배가 모면되지는 못했다. 수년 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 그는 천주교를 열심히 신봉하였고, 신심과 모범적인 큰 극기의 온갖 수련에 오랫동안 몰두했으며 매우 그리스도인답게 사망하였다. 그는 또 약간의 종교 저술을 남겼다. 우리는 불행히도 너무 간략한, 그러나 매우 잘 작성된 이 기록들을 베끼고 연결하는 데 그쳤다.

달레 신부와 다블뤼 주교가 그들의 책에 인용한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한반도에 전래된 그리스도 역사를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함께 기록한 책으로 추측된다. 현재 이 책은 전해지지 않지만, 다산의 묘에서 발굴된 다산의 십자가는 다산의 신앙심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에 다산의 십자가가 있다. 이 십자가는 다산의 4대 후손 정바오로가 다산의 묘에서 발굴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지식인과 북학파의 교우론
그리스도교가 조선에 전래되기 전부터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서학서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특히 연행을 통한 경험은 그들에게 큰 문명 충격이었다. 북경의 거대한 성당과 성당에 그려진 벽화는 놀라움 그 자체였고,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을 통해 들은 그리스도교 지식과 서학서는 그들에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성호좌파의 문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고, 북학파(北學派)라 불리는 일군의 실학자들은 학문으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서학서는 마테오 리치 신부가 쓴 야소교 교리서인 「교우론」이다. 이 책은 1595년 중국 광동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의 제1항은 “나의 벗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의 반쪽이니, 바로 제2의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벗을 자기처럼 여겨야 한다”로 시작된다. 제2항은 “벗과 나는 두 몸이지만, 두 몸 안의 그 마음은 하나일 따름이다”라고 하여 벗의 마음을 중요시했다.
「교우론」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처음 소개되는데, 이때는 천주교가 조선에 창설되기 170년 전의 일이었다. 박지원이 쓴 「회성원집」 발문은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과 영락없는 판박이였다.

옛날에 붕우(朋友)를 말하는 사람들은 붕우를 ‘제2의 나’라 일컫기도 했고, ‘주선인’(周旋人)이라 일컫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자를 만드는 자가 날개 우(羽) 자를 빌려 벗 붕(朋) 자를 만들었고, 손 수(手) 자와 또 우(又) 자를 합쳐서 벗 우(友) 자를 만들었으니, 붕우란 마치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그의 책에서 붕우를 이렇게 보았다.

상제께서 사람에게 두 눈과 두 귀, 두 손과 두 발을 준 것은 두 친구가 서로 돕도록 하고자 함이니 그래야 비로소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友)라는 글자는 옛날에 쌍(?)이라고 했으니 이는 양손이다. 있어야만 되고 없어서는 안 된다. 또한 붕(朋)이라는 글자는 옛날에 우(羽)라 했으니 이는 곧 두 개의 날개로, 새는 이를 갖추어야 비로소 날 수 있다. 옛 현자가 친구를 보는 것이 어찌 이러하지 않겠는가.

예수의 ‘서로 사랑하라’를 박지원은 ‘벗은 제2의 나’라는 벗 사랑으로 풀었다. 양반 가문 출신 홍대용, 박지원도 참된 ‘교우론’을 알았기에 서러움 받는 서얼 출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함께 제2의 나로 지냈다. 북학파는 비록 야소교를 신앙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봉건 조선 사회에서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마테오 리치 신부의 「교우론」이 동양과 서양의 벗 사귐을 조화시켰다면, 북학파는 중국과 조선 지식인들의 만남을 제2의 나로 성화시켰다. 조선에 성당과 교회가 없었어도, 조선에 서양 신부와 서양 선교사가 살고 있지 않았어도, 예수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북학파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길리시단(=기리시탄=그리스도교인)
천주교단에서는 1784년에 공식적으로 조선에 천주교가 설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의 임진왜란 시기의 역사를 천주교 전래의 전사(前史) 정도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통해 10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고, 또 이들 중 3만 명 이상이 마카오, 필리핀, 인도, 유럽 등지에 노예로 팔려갔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일본 땅에서 그리스도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순교자가 된 이들도 있었다. 일본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는 26위성인기념관이 있는데 이들 26명의 순교 성인 중 3명이 조선인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그리스도교인이었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조선 여성 오타 쥴리아는 일본 땅에서 순교한 대표적 조선인 그리스도교인이다. 그녀는 한때 한국 절두산 순교성지에 가묘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현재도 도쿄의 코즈시마 섬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축제를 연다. 일본에서 포로로 지내다 조선으로 귀국한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이후 신앙생활에 대한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이미 조선에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서방 그리스도교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찍혀 동진(東進)하던 네스토리안교는 서양 신부들이 아시아 대륙으로 퍼져 나가기 천 년 전부터 중국, 몽골, 만주, 고려 국경 일대에서 터전을 잡아 가고 있었다.”

쿠빌라이의 사위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중국에 원(元) 제국을 세운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우리나라와도 아주 인연이 많은 인물이다.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두 차례 침략했지만 모두 실패에 끝났고, 이때 많은 고려인과 몽골인이 일본 땅에서 죽었다. 일본의 후쿠오카 시에 있는 겐코시료칸(元寇史料館)에는 여몽연합군의 병기를 전시하고 있는데, 병기 중에 특이한 것은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몽골 군대의 철갑주가 있다는 점이다. 철갑주의 십자가는 다름 아닌 동방 그리스도교의 전통 문양이었다. 동방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문양은 몽골 병사들 중에 동방 그리스도교인들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고려에도 그리스도교의 존재는 알려지고 있었다.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을 했으니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다. 쿠빌라이는 모든 종교에 관대했는데, 그리스도교의 부활절과 성탄절을 포함해서 다른 종교들의 기념일을 모두 챙겼다고 한다. 쿠빌라이는 마르코 폴로를 통해 서방 그리스도교의 수장인 교황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신부를 요청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온다. 쿠빌라이의 생일잔치에 초대된 충렬왕은 상석에 앉아 각종 종교인들의 행사를 눈앞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의 충렬왕이 그리스도교를 알았다고 단정해도 되지 않을까?
또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몽골의 서방 침공으로 이슬람 세력에 의해 막혀 있던 실크로드가 열리고 이 길을 따라 서방의 그리스도교가 들어왔을 때 이들은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아가던 또 다른 그리스도교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방 그리스도교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찍힌 동방 그리스도교, 특히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하는 네스토리안교는 중국과 몽골에서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부흥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있었다.
제국대장공주의 할머니이자 쿠빌라이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는 독실한 동방 그리스도교인이며, 그녀의 신앙은 쿠빌라이를 비롯한 자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충렬왕은 처 할머니 되는 소르칵타니 베키의 신앙을 몰랐을까? 동방 그리스도교라는 이방의 종교는 이미 고려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개경에 온 조지
조지(George)는 서양에서 인기 있는 남자의 그리스도교식 이름이다. 이 이름은 성 조지(Saint George)에 의해서 유행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성 조지는 3세기 말 로마 병사로서 서방과 동방 그리스도교에서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고려인들이 유럽과 중동에서 인기 있었던 조지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지의 한자 음차는 활리길사(闊里吉思, 기와르기스)이다. 바로 활리길사로 불렸던 조지가 고려의 수도 개경에 살고 있었다.
조지는 1299년 정동행성의 평장정사(平章政事)로 부임해 와서 개경에서 2년간 살았다. 조지는 동방 그리스도교인이었다. 그는 개경에 도착하자 고려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가지의 개혁 조치를 시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고려의 노비제도를 개혁하려한 것이다. 비록 노비제 개혁 조치는 큰 성과가 없었지만 그리스도교인이었던 조지가 노비제 개혁을 시도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실행으로 옮기려고 한 것은 아닐까? 예수는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과 친구가 되었다. 「성경」은 안식일에는 종들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말고 안식시키라고 하였다. 또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며, 데리고 있는 종이 7년째 되는 해에는 자유롭게 놓아주되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조지는 2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여러 가지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가 고려에서 행하였던 일련의 조치에는 그리스도교의 색채가 가미되어 있었다. 조지는 고려 신하들을 모아 놓고 정초에 왕에게 하례하는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봉은사에서 3일 동안 연습시키기도 하였다. 『고려사절요』는 하례 의식을 연습하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조지의 신앙이 고려 땅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행적으로 보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것은 고려 왕들도 조선 왕들도 그들의 신하들도 조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해
“발해의 다민족 공동체라는 특수성을 이해한다면,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동방 그리스도교인 네스토리안교가 발해의 불교와 어울림의 신앙을 빚어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담비의 길을 타고 들어온 하느님
발해의 글로벌 공동체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5개의 중요한 교통망을 통해 형성되었다. 5개의 교통망은 조공도(朝貢道), 일본도(日本道), 영주도(營州道), 거란도(契丹道), 신라도(新羅道)이다. 그리고 5개의 교통망 이외에 발해에서 1만여km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잇는 대장정의 길도 있었다. 이 길을 ‘담비의 길’이라고 부른다. 담비의 길은 발해의 상경에서 지금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와 치타를 거쳐 사마르칸트까지 연결되었다. 10세기 이전에 중앙아시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으며, 중국과 터키족들의 싸움 때문에 실크로드는 안전한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발해와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실크로드보다 북쪽에 있는 담비의 길을 개척했다. 담비의 길을 통해 모피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물이 교류했다. 대표적으로 마구(馬球)와 네츠케(根付)는 담비의 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발해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된 것이다.
발해는 당나라, 일본과 근거리 교류를 하는 동안, 담비의 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원거리 교류를 개척했다. 종교와 문화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교류하면서 나라와 나라로 전파되기 때문에 발해의 주민을 구성하는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 위구르인, 이란인 등은 자연히 발해의 종교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발해의 다민족 글로벌 공동체라는 특수성을 이해한다면,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동방 그리스도교인 네스토리안교가 발해의 불교와 어울림의 신앙을 빚어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발해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경박호(鏡泊湖)의 전설이 「성경」의 창세기와 흡사하다는 것도 이러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십자가를 목에 건 보살상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융합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몽골 제국에서 13세기의 동방 그리스도교 성녀였던 소로칵타니 베키가 17세기에 와서 보살로 둔갑해 버린 것처럼, 절 사(寺) 자가 교회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십자가를 한 보살과 어울림의 신앙
예전에 발해 땅이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발해의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불상, 장식용 기와, 사천왕상 머리, 용의 머리, 꽃잎 모양의 여러 가지 장식물과 함께 동방 그리스도교의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점토판이 발굴되었다. 절터에서 사천왕상 머리, 용의 머리, 십자가가 발굴되었다는 것은 발해의 종교가 불교를 근간으로 샤머니즘과 동방 그리스도교를 접목한 신앙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아니 그 절터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절과 사뭇 다를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몽골 제국에서 절 사(寺) 자로 끝나는 이름의 교회가 있었듯이, 아브리코스 절터를 굳이 부처님을 숭배한 절이었다고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때 발해의 수도였던 동경용원부는 지금 중국의 훈츈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곳에서 삼존불상이 발견되었다. 부처와 보살들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었어, 부처는 가부좌만 하지 않았다면 흡사 발해의 관료로 착각될 정도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처의 왼쪽에 있는 협시보살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부처는 가슴 가운데에 십자가 문양을 달고 있다.
불교문화가 절대적이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에서도 이러한 삼존불상이 보이지 않는데, 유독 발해의 삼존불상에서만 십자가를 단 부처와 보살이 있다는 것은 발해의 종교가 다양한 교류를 통해 그들만의 색다른 신앙을 내재화시켰음을 뜻한다. 이는 발해에 불교와 함께 동방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발해 사람들이 동방 그리스도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음을 말한다.
삼존불상 외에도 동방 그리스도교가 발해에 유입되었음을 증명하는 유물로는 압록강 건너 남만주의 안산 부근에서 발굴된 7개의 기와 십자가와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경배도가 조각된 암각화를 들 수 있다.

신라
“신라의 많은 유물에는 헬레니즘 문화, 간다라 미술, 중동 문화의 향기가 깊게 스며 있다. 헬레니즘 문화가 서역의 실크로드를 타고 신라까지 전파되었다면, 이때 그리스도교는 신라에서 빛을 보지 않았을까?”

석굴암과 누가의 초상화
신라 불교 문화의 총아 석굴암은 서역의 석굴사원 양식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석굴암 후벽에 부조되어 있는 십대제자의 모습이 서구인과 너무나 많이 닮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일대를 포함하여 동로마, 중동, 인도까지 연결되는 서역은 각 나라의 문화와 문물이 소개되고 전파되는 동서 문화의 교류지이며, 집산지였다. 동서 문화를 교류시킨 대동맥은 실크로드였으며, 실크로드를 동서로 연결하는 요충지가 바로 서역이었다. 그래서 서역은 그리스도교 문화, 불교 문화, 그리고 회교 문화를 융합하여 다양하고 독특한 서역 문화를 만들었다.
석굴암은 서역에서 전해진 양식을 신라의 독창미로 되살린 융화와 가공의 극치였다. 이런 석굴암의 양식을 성 어거스틴 복음서에 나오는 누가의 초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만은 없다. 누가의 초상화는 불상이 아니지만, 초상화의 양식이 석굴암의 양식과 거의 같다. 초상화는 석굴암처럼 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돔은 중근동 지대에서 발생하여 로마 시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했으며,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방인 신라에 까지 전해졌다.
그리스도교 동진 연구의 권위자 고든은 석굴암 전실 내벽에 부각된 십일면관음상과 십나한상, 그리고 범천상과 제석천상 등에 나타난 옷 무늬나 신발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누가의 초상화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는 볼 수 없지만, 헬레니즘 문화에 가미되어 있는 그리스도교 양식이 서역을 통해 동진하여 석굴암의 양식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다.

불국사의 돌십자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경교돌십자가’(Nestorian Cross, Stone)라는 이름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 돌십자가는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굴된 것으로 8~9세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돌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대칭인 초기 그리스의 십자가 형태이다. 이 십자가는 동방정교회와 초대교회에서 사용하였다.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동방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도 그리스형을 띤다. 불국사의 돌십자가가 경교돌십자가라고 한다면 신라에 동방 그리스도교가 어떤 형태로든 유입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돌십자가 외에 7~8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두 점의 철제 십자가 무늬 장식이 경주에서 발굴되기도 하였다. 불국사의 돌십자가와 경주에서 발굴된 두 점의 십자가 무늬 장식에 대해 학문적인 검토가 더 요구되지만, 대체적인 학계의 주장은 동방 그리스도교의 신라 유입설로 무게 중심이 기울어지고 있다.

상품필수 정보

도서명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저자/출판사
최상한,돌베개
크기/전자책용량
152*223*24
쪽수
432
제품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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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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